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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믿고 알고 행하면 행복 성적표 ‘만점’
집착 없는 마음이 ‘정토’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계곡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능선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산이 클수록 등산로도 많다. 성불의 길도, 불국토를 이루는 길도 중생의 수만큼 다양하다. 중생 각자가 불성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여서 각각의 중생이 각자 인연을 따라 부처의 길을 닦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오르는 것이 목적이지만 오르고 나면 다시 내려오는 것이 목적이 된다. 목적은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느냐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불자가 부처님께 귀의해 배우고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경, 염불, 참선, 사경, 절(拜) 등의 정진으로 산을 오르기도 하고 봉사활동, 복지사업, 캠페인 전개 및 동참, 이웃돕기, 장학사업 등으로 산꼭대기의 시원한 바람을 이웃에 전하기도 한다.
남한산을 오르는 여러 길 가운데 서울의 마천동에서 오르는 길은 평일에도 등산객으로 붐빈다. 도심과 산의 경계에 성불사가 있다. 불도(佛道)를 배우는 등산과 불법(佛法)을 세상에 전하는 하산을 동시에 행하는 도량이다. 1976년 성불사를 창건한 학명 스님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을 수행과 전법의 뿌리로 선포했다.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배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절에 다니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절에 와서 함께 지향하는 목적이 있을 때 기도와 정진에 힘을 얻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각각의 사정이 있지만 향하는 목적지는 같은 것처럼, 같은 절에 다니는 불자들도 공동으로 갖는 월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아무렇게나 와서 각자 마음대로 공부하고 기도하라고 한다면 절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불사에서는 ‘바르게 믿고(信) 바르게 알고(解) 바르게 실천하고(行) 바르게 깨닫자(證)’는 것을 공동의 지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학명 스님은 성불사의 사시(寺示) 즉, ‘신해행증’을 구체화 하는데 한 순간도 방일하지 않는다. 그로써 불자들의 지침이 되고 모범이 되어 기도정진과 각종 나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스님은 ‘신해행증’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 했다.
“신(信)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믿음이 없는데 불사에 시주하고 발원하여 기도붙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간에도 믿음이 중요하고 회사나 단체에서도 믿음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믿음이 사라지면 불행해 집니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좋은 것들을 길러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결과를 좋게 하는 믿음과 나쁘게 하는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의 말에 속아 그 실체를 모르고 잘못된 것을 믿었다가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과를 좋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바른 눈, 혜안(慧眼)이 있어야 합니다. 혜안을 갖추기 위해서는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사소한 관계에서 조직과 조직, 국가와 국가의 유기적인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믿음에도 함정이 있다. 허방다리를 밟으면 불행의 구덩이로 빠진다. 허방다리가 아니라 단단한 믿음의 다리를 고르는 지혜가 필요하다. 학명 스님은 세상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해(解)는 바르게 아는 것인데 지혜(智慧)로 가는 길입니다. 바르게 알기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 말입니다. 그릇된 견해는 대개 아집(我執)에서 비롯됩니다. 아집을 버리고 나면 사물이나 어떤 일의 이치가 보입니다. 입고 있으면 옷이고 세탁기에 들어가면 빨래라 합니다. 그것을 나누어 어떠어떠한 천으로 어떤 디자인을 어떻게 재단하고 마름질하여 만들었다는 것까지 분석해 냅니다. 그냥 옷이라고 하는 이 하나의 물건에도 이렇게 많은 측면이 잇는 겁니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말하는 것이 옷이라는 물건의 참모습일까요? <금강경>에서는 ‘소위 불법이란 것은 불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불법일 뿐’이라고 했잖습니까? 우리는 그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 우선 집착을 버려야 하고 다음으로는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여 철저한 깨달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아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맹신(盲信)이나 미신(迷信)에 떨어집니다. 바른 믿음을 지켜 주는 것은 바른 깨달음이고 바른 깨달음은 각종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불교는 바로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안으로 나를 닦고 밖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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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과 나눔의 생활화로 ‘늘 깨어 있는 도량’
“진리는 세상에 회향될 때 참 가치 보이는 것”
스님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바른 실천으로 넘어갔다.
“행(行)은 그냥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법(法)에 의거해 법에 맞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행하는 것이 없으면 세상에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혼자 알고 즐기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지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후 그 오묘한 진리를 중생들에게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고민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한 법의 귀중함을 상징하면서 그 진리는 대중에게 회향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겁니다. 부처님께 한량없는 자비심이 없었다면 불교도 없습니다. 그 깨달은 바를 혼자 즐기고 말았으면 지금가지 면면히 전해 올 불교라는 종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불자의 행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보배세상을 중생들에게 펼쳐 보이셨듯이 불자들도 불법에 귀의하여 배운 바른 진리를 이웃에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자비이고 자비는 실천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이 비판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속의 일도 그런데 불법(佛法)의 찬란한 세상에서 불성을 드러내지 않고 편협한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불자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100년 후 1000년 후의 자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막막할 겁니다. 어떤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윤회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지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이치 말입니다. 미래의 자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지금의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얼마나 굳은 믿음으로 얼마나 배우고 알아차리고 얼마나 실천하는가를 반조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는 순간 환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가 보일 것입니다.”
믿음과 앎과 행함은 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작용도 아니다. 하나로 동시에 돌아가는 것이다.
학명스님은 “믿는 시간 따로 배워서 알아차리는 시간 따로 실천하는 시간 따로 그렇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매 순간 동시에 한 덩어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 도리를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게 깨닫는 것(證)이라는 설명이다.
“천지(天地)는 동근(同根)이라 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너입니다. 미물이라고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미물도 치열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높은 산은 높아서 좋고 낮은 산은 낮아서 좋은 겁니다. 차별(差別)을 넘어서야 진실이 보입니다. ‘토끼와 호랑이’가 지금의 형상을 넘어서면 ‘호랑이와 토끼’로 변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의 차이를 차별해 버리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윤회하는 중생 모두가 일체평등의 자리에 들 수 없게 됩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부처님의 선언은 지금 보이는 차이에 끌리지 말고 근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의 근원은 바로 부처, 불성입니다. 그래서 이웃집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고 옆 동네 독거 어르신이 나의 아버지인 겁니다. 부처가 되길 바란다면 먼저 모든 생명을 부처로 보는 눈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입니다.”
성불사에 다니는 불자들은 모두가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신해행증’의 생활화를 주창하는 학명 스님이 각종 사회사업의 길을 열면 불자들은 묵묵히 그 길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장학재단 설립을 통해 해마다 장학금을 지급하고, 군부대 교도소 법회와 지역 경로당이나 독거 어르신 위문 및 경로잔치는 기본이다. 소년소녀가장 돕기, 농산물직거래 장터 등을 꾸리면서 공부하는 불자상 확립을 위해 <금강경> 강좌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2009년에는 ‘다출산장려금후원회’를 조직해 국가적 화두인 저출산 문제 극복에 동참하고 있다.
“불자님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다시 불자님들에게 나누는 삶의 행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것은 작은 실천이지 거창한 계획이나 구호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불자는 회향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안살림은 나누고 베푸는 바깥살림을 통해 회향될 때 완성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여러 제자들을 청해 대중공양을 올린 사자(師子)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이렇게 비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강물의 맛을 보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는 강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닷물을 마시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사로운 일체의 공양과 보시는 저 강물과 같다. 그래서 복을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한다. 대중은 저 바다와 같다. 모든 훌륭한 사람도 다 대중 가운데 있다.’라고. 물론 부처님은 ‘축생에게 보시를 해도 복을 받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느냐’며 대중공양만 수승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증일아함 ‘불선품’)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바닷물을 떠먹을 준비가 된 사람은 언제든지 바다로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강가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학림 스님은 불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가는 길을 열었고 그 길에서 무한한 공덕의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앎을 견고하게 다지고 바깥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행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일하고 많은 것을 드러내면 아무런 공덕이 없을 뿐 아니라 속으로 집착의 그늘만 두꺼워 지는 겁니다. 그래서 취재에도 응하지 않으려 했던 것인데...”
강을 건넌 사람이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의 길이 반듯하고 공부하여 안살림을 챙기는 힘이 굳건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 그 일에 집착하지 않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학명 스님은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불자가 늘어날수록 사람 사는 세상이 극락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했다.
“극락이 어디입니까? 행복한 그 순간이 극락이고 마음 편한 그 자리가 정토입니다. 수시로 극락을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극락이 허물어지면 지옥이 지어지겠지요? 하루 24시간 가운데 극락을 몇 시간 짓고 지옥을 몇 시간 짓는지 생각해 보면 자신의 성적표가 나옵니다. ‘신해행증’이라는 4과목의 성적표 말입니다.”
법당에서 목탁소리가 울렸다. 법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가사를 수하고 있던 학명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시간 됐으니 이만 줄입니다. 부끄러운데, 아무 말 안들은 걸로 하면 더 좋겠고...”
급하게 법당으로 향하는 학명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엉뚱한 궁금증이 솟았다.
‘스님은 지금 신 해 행 증 4과목 가운데 어느 과목을 수업하러 가시는 걸까?’
학명 스님은...
1960년에 출가 했다. 1976년 대한불교 조계종 남한산 성불사를 창건했다. 전법과 사회사업에 대한 원력으로 벽담장학회를 설립했으며 이웃 주민들을 위한 각종 봉사활동과 후원 사업을 전개하며 군법당 구치소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 법회를 열고 있다. 매년 <금강경>강좌를 실시하며 하남시 사암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선사들의 숨은 이야기> <우리말 천수경> <삼세인과경> <금강경 이야기> 등으로 펴내 문서포교에도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