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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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천진불 천운 스님
현대적 포교, 불교교육법 전형 제시한 선지식

조계종 원로의원 천운당(天雲堂) 상원(尙遠) 대종사(大宗師)는 호남불교를 일으킨 개척자이며 현대 도심 포교, 불교 교육, 복지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정립한 선각자였다.

1932년 1월1일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천운 스님은 해방이 됐을 때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부정하고 한학을 고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러웠던 스님은 서울로 도망쳐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떠났다가 마침 길에서 비구니스님을 만나 내장사로 가게 됐다. 그 때가 16살이었다.

내장사에서의 첫 새벽 스님은 도량석으로 울려 퍼지던 <화엄경> ‘약찬게’의 청아하면서도 절절한 염불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날 스님은 박한영 스님을 만났다. 당시 팔순의 노스님은 소년의 사연을 듣고 절에서 글을 배우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천운 스님은 그 때부터 한영 스님의 시자로 절집 생활을 시작했다. 노스님의 공양상을 챙기고, 측간으로 모시며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 등 고된 시봉을 하면서 아침저녁 예불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한영 스님은 그를 친손자처럼 아끼고 귀여워했다. 스님은 한영 스님 이불 밑에서 ‘할아버지’라고 안기며 잠을 잤다. 천운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한영 스님의 수행과 불교관과 품성, 미래를 읽는 혜안을 배워 후일 천운 스님으로 하여금 호남 불교 중흥의 주역을 담당케 했다.

내장사 생활 1년 만에 한영 스님이 입적하자 천운 스님은 월정사로 옮겨 은사인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을 만난다. 스님은 이종욱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았다. 이종욱 스님을 12년 동안 모시면서 천운 스님은 무소유의 삶과 포교의 가르침를 배웠다.

스승은 젊은 천운 스님에게 “포교하는 사람은 감투 쓰면 안된다. 무소유로 살아라. 여자관계 철두철미해라”는 세 가지를 간곡히 부탁했다. 은사스님 역시 엄하지만 자비로운 분이었다. 천운 스님은 생전에 은사스님에 대해 “여든이 넘어서 마흔이 넘은 제자를 비행기 태우며 놀 정도로 허물이 없고 자비로운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전단지 배포 등 현대 포교의 귀감
천운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활약하는 한편 군승이 없는 군에서 불교모임을 이끌며 군내 포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은사스님이 입적한 뒤 천운 스님은 조계산 토굴, 도갑사ㆍ대흥사ㆍ선운사 선원 등에서 10여 년간 참선을 했다. 특히 스님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 처음 선방을 열어 3~4년 묵언정진을 해냈다. 당시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목에 ‘묵언패’를 걸고 정진해 이후 묵언정진하는 수좌들의 길잡이가 됐다. 당신 공부를 하는 한편 구례 화엄사 주지를 맡아 가람을 일신하고 정진 대중을 외호하는 등 이후 포교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토굴과 선원 등지에서 가행 정진하던 스님은 스스로 깨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불법을 널리 펴고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 한국 불교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원력을 갖고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향림사를 열었다. 이 때가 1971년이었다. 스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고 가는 길’이라는 포교지를 만들어 나누어주며 불법을 알렸다. 천막포교당을 세우고 불교 전단지를 배포하는 포교 방법이 서울과 수도권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10여 년 뒤였으니 스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짐작케 한다.

#시은 갚기 위한 세가지 보살행 진력
천운 스님은 포교를 시작하면서 신도들의 시주를 갚는 길을 고민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학교를 가지 못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 길을 터주는 것이었다. 둘째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쉼터가 되는 것이었다. 셋째는 아픈 사람을 위한 문병이었다. 스님은 이 세가지 원칙을 그대로 실천했다. 스님의 교육열이 강해 향림사에서 학기 초 등록금만 1억원이 넘게 지불했다. 장애인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다 아예 장애인 복지관을 만들었으며 아픈 사람을 마음 놓고 치료하기 위해 한 때 병원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돈은 모두 스님이 전국의 대중들과 만나 법문하고 절 살림을 아껴 모은 소중한 정재였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찬불가를 보급하고 어린이·중고생 법회를 열었다. 또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 모든 것이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되는 대 사건들이었다.


#불교의 미래 위해 신도교육 강조
스님이 포교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신도교육이었다. 새 신도에게 기초 교리강좌는 물론이고 광주불교대학과 광주불교대학원을 설립, 신도를 교육하는 한편 포교사 육성에 힘을 기울여 전국포교사단 광주전남지단의 활성화와 함께 향림사를 호남지역 포교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또 전남지방경찰청 경승실장과 광주교도소 교화위원회 불교회장 소임을 맡아 경찰 및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펼쳐 사회의 어두운 곳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비추는 역할도 수행해 왔다. 복지포교분야에 역점을 둔 스님은 1983년 향림유치원, 1994년 향림사어린이집, 1996년 해남 한듬어린이집을 설립, 운영하는 등 복지를 겸한 어린이 포교와 함께 92년에는 광주시로부터 우산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모범적인 운영으로 지역사회에서 불교위상을 높여왔다. 이외에도 인근 군부대들을 중심으로 군포교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군불자를 배출했으며 종립 정광중ㆍ고등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사업에도 헌신했다. 스님은 향림사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생활 속 불교를 실현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향림출판사 등을 세워 향림사를 호남 포교의 중심처로 세웠다.
스님의 원력은 1994년 불교광주방송 설립으로 이어졌다. 1996년에는 광주지역 2000여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수계법회가 열려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님의 이 같은 공을 종단에서도 인정해 스님은 두 차례 포교대상을 수상 했다. 또 2001년 조계종 사회복지대상 특별상, 2002년엔 제1회 전국 교정인의 날 국민포장을 품수했다.

#정성 다해 아이들 보살핀 천진불
천운 스님은 향림사에서 아이들 교육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스님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처 키우는 일”이라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공부하며 무럭무럭 자라도록 보살폈다. 스님에게 아이들은 부처며 화두였다. 스님은 힘닿는 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줄 뿐 특별히 강요하는 것도 없었다. 유난히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있으면 행동이 달라질 때까지 스님 방에서 재우며 키웠다. 40년 동안 이렇게 스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150여 명에 이른다.
스님은 엄격하면서도 매우 유머가 넘치는 분이었다. 수행자로서 혹은 종단의 큰 스님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의 말로,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눈으로 사람을 대하고 천진하게 굴었다. 이 때문에 엄격하다는 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재가자들은 스님의 우스개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금세 마음이 풀어져 편안하게 대했다고 스님을 만난 이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은 또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따랐다. 스님은 생전에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인데 너무 욕심이 많아 제대로 못 보는 것”이라며 수행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욕심 없는 삶을 강조했다.


#“수행자 본분 지키라” 강조
천운 스님의 법문은 쉬우면서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늘 불교의 연기 사상에 입각하면서 누구나 생활과 삶 속에서 지켜야할 윤리와 원칙을 갖고 불교를 설명하고 가르침을 내렸다. 늘 화내지 말고 남의 말 잘 듣고 험담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수행이라며 남 탓 하지 말고 스스로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했다.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였으며 부처님의 올곧은 제자였다. 출가한 이래 조석예불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으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6시 15분 아침 공양을 마치고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면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친절히 상담했다. 점심공양 후에는 광주불교대학, 사무실, 복지관, 정광학원, 향림원 등을 돌아보는 생활을 입적 전 까지 어긴 적이 없었다.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도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게 곧 불교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부처님의 ‘칠불통게(七佛通偈)’를 강조했다. 수행자의 본분을 가장 중요시 여기시던 평생의 가르침을 가시는 길에도 불자들에게 새삼 강조했다.


#다시 듣는 천운 스님의 법문
(전략)…불교가 중국을 거쳐 전해지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도 부처님 가르침이 전래됐습니다.
본래 인도 왕족이었던 허 황후가 서기 48년 불상을 모시고 뱃길로 가야에 온 것은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승려였던 마라난타 존자가 384년 법성포로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고, 이로써 화려했던 백제불교가 시작됐습니다. 제주도에는 한라산 영실에 존자암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부처님 제세 시 제자였던 발타라 존자가 한라산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부도가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600년 전 중국을 거쳐 고구려(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2600년 전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는 부처님 열반이후 부처님 제자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는 진인(眞人)불교였습니다. 고구려 이전, 이 땅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한문으로 쓰여진 경전에 의존하기보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인 진인불교였을 것입니다.
오늘 또다시 맞이하는 초파일에 진인불교를 생각해봅니다. 문자에 갇혀있는 불교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불교를 말합니다.
36년 전, 광주에 향림사를 창건할 당시 주위에서 모두들 말렸습니다. 나무 하나 없이 민가와 함께 있는 절에 누가 오겠냐고요. 그렇지만 부처님은 산속에 계시지 않았고,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가르침을 펴셨고 길에서 가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속세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바꾸었고, 뜻 모르는 경전을 읽기보다 찬불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참선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돌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향림사에는 오래전부터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장애인, 고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절과 복지시설에서 먹고 자는 대중이 150여 명에 이릅니다. 신도들의 보시와 봉사로 이제껏 한번도 굶지 않았고, 누구에게 비굴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참으로 곤혹스런 시대였습니다.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선지식들의 간절한 수행과 포교로 불교의 맥은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더 큰 힘은 어머니들이었습니다. 흔히들 치마불교라고 하지만 어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불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참선을 한다고 앉지도 못했고, 글을 모르기에 경전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들의 입에서는 한시도 염불과 주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나무아미타불’하며 숟가락하나 더 놓고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인불교입니다.
참선, 염불, 주력, 포교, 가람수호는 오늘의 불자들이 행해야할 5대수행입니다. 불자라면 이 가운데 하나라도 선택해 간절히 해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문제를 살펴보면 입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천수경> 십악참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하는데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등 4가지가 바로 입과 관련된 것입니다. 구업을 막는 방법으로 염불과 주력이 최고입니다.
공부를 했고 안했고는 화내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는가를 보려면 얼마나 화를 내지 않는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살면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내고 보면 모든 허물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을 원망해서는 더욱 안됩니다.
입으로 진실된 말을 하고, 자비실천을 수행하면 성내는 마음은 저절로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금년은 초파일과 어린이날이 겹쳤습니다. 어린이는 마음에 때가 없이 순수합니다. 깨끗한 거울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따라서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부모들이 싸우거나, 못살겠다며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맑은 마음의 거울에 비쳐져서 언젠가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초파일을 맞아 진인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한 부처님의 가르침(七佛通偈)을 소개합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것이 곧 불교다)
-천운 스님의 불기2550년(2006년) 광주 향림사 봉축법문 中에서
정리=조동섭 기자 |
2010-10-11 오전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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