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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운 스님 후학 20여명에 ‘시역고’ 공개토론 펼쳐
강평회 통해 번역의 견해차 난점 등 극복 가능해
“고전경론 다룰 상설기구 종단차원에서 설립해야”
스승의 높이와 깊이가 눈에 보인다면 무참한 일이다.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고 생각으로 도무지 헤아릴 수없는 스승의 경지 앞에서 후학들은 존경과 분발심을 용출시킨다. 스승의 향훈(香薰)이 주는 무량한 감동은 후학들을 6월의 방초(芳草)처럼 자라게 한다.
교종 본찰 봉선사. 6월 28일 봉선사는 교종 본찰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강학(講學)의 전통이 점점 흐려지는 시절이지만, 보기 드물게 ‘시역고(試譯稿) 강평회(講評會)’를 개최한 것. 한 사람이 먼저 번역한 원고를 여러 사람이 나눠보고 각자의 견해를 토론하여 최종적으로 원고를 완성하는 과정이 ‘시역고 강평회’다. 경전 번역의 객관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의견 절충이 안 될 경우 번역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준이나 지위가 엇비슷한 사람들이 강평회를 하는 경우라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드러내고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이 시역고를 내고 후학들이 강평을 한다면 부담스러울 것이다. 스승은 스승대로 자신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초벌번역을 후학들에게 보이는 것이 쉽지 않고, 후학들 역시 스승의 미완성 원고를 난도질(?) 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상의 역경을 위한 발원 하나로 사적인 감정과 입장을 배재한다면 체면과 입장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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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 시역고 강평회’.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은 체면을 버렸다. 그 후학들도 불법 앞에 평등한 학인으로 마주 앉았다. 강평회는 당일 준비된 것이 아니다. 월운 스님이 시역한 원고를 책으로 묶어 후학들에게 배포하고 토막토막 책임을 지웠다. 후학들은 우선 원고 전체를 정독하고 자신이 맡은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읽고 연구하며 잘잘못을 가려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28일 봉선사 운하당(雲霞堂)에서 강평회를 연 것이다. 이 같은 강평회를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을 지키려는 몸짓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체면을 던지고 강평회를 마련한 월운 스님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오전에 열린 입제식에서 스님은 취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이것으로 인터뷰를 대신하자고 했다)
“내가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여러분의 덕을 좀 보자는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서로 힘을 합쳐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분석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힘을 모아 부처님의 은혜에 소분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땅에 불교가 처음 들어 올 때에는 한문에 의해 전해졌고, 우리 사회의 문물제도 역시 한문을 위주로 전해졌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포교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습니다. 스님들도 그런 추세에 따라 입산하자마자 경전을 배우는데 이질감이 적었고, 나중에 대성하여 중국불교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는데 별 지장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세속에서 한문교육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듯이 사원 역시 입산하는 이의 수도 줄었거니와 입산 연령이 높아져서 종전의 교육과정을 소화시키지 못한 채 사실상 교육의 공백상태가 시작 된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체계나 역사문물이나 생활방식은 여전히 한문체제로 되어 있어 한문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건만, 이에 대한 대응조치가 뒤따르지 못한 채 어느 덧 한글세대에 깊숙이 들어와 적지 않은 혼란상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을 비롯한 상당수의 뜻있는 중견승가들께서 막연하게나마 이 문제를 마음아파하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나’라야 되겠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누군가 해 주겠지 하는 것도 바람직한 생각은 아닙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의식을, 역사를 우리가 손 놓고 있더라도 누군가가 알아서 해 줄 이가 있다면 당연히 손 놓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 종단의 선각자들이 약 반세기 전에 역경원을 만들어 역경을 시작하였음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일입니다. 그 후 근 40년 만인 2001년에 고려대장경의 일차적인 번역을 끝내는 고불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방대한 것도 문제지만 읽음과 동시에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이 공통적인 흠이었습니다.
이렇게 뜻이 안 통하는 번역물이 나오게 된 이유는 문장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옛 어른들의 말씀입니다. 마치 커다란 기계 어느 한 구석에 모래알 하나만 끼어도 기계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장력이 약한 요즘의 실정으로는 그룹식 번역작업이 좀 나을 터인데 달통한 이들이 하는 방식인 단독번역제를 택했기 때문에 자기의 벽(壁)을 자기가 잡지 못하고 넘긴데서 유래한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대본(臺本)으로 삼은 <인본욕생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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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이 어렵다는 말씀은 젊어서부터 들었습니다. 어느 날, 이 경이 얼마나 어렵기에 그토록 야단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더니 이른바 ‘삶은 호박에 이빨’이었습니다. 다시 한글대장경을 찾아 읽어 보아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주석이라고 첨부된 것을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려서는 서당에 좀 다녔고 출가해서는 한 평생 경을 만졌다는 사람으로서 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책하는 자세로 새겨도 보고 번역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충 알고 넘어가면 된다는 오랜 우리의 관습이 번번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아직껏 자신에게 충실치 못했던 자신을 경책하면서 꾸준히 문의(文義)와 문맥의 흐름을 찾는 것으로 참회행을 삼았으나 늘 여의치 않아 손을 떼려고 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게 힘을 주신 것은 도안법사(道安法師)의 소(疏)입니다. 그 문장이 너무 간략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우나 촌철살인인양 한 자(字)의 허언도 없이 직대근원(直戴根源)해 주신 노파심은 어느 노선화(老禪和)의 봉할(棒喝) 보다 고마웠습니다. 이 소로 인해 안세고삼장(安世高三藏) 소역(所譯) 30여종의 경이 일괄 소통될 것 같아 무한히 고마웠습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이 고마움을 여러분과 함께 하려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혼자서 개 그리고 말 그리듯이 번역한 것을 여러분 앞에 기탄없이 털어 놓고, 잘못된 부분을 엄정하게 지적해 달라고 청하리만치 여유로워진 자신의 변화가 첫째의 기쁨이요, 완벽하지 못한 서로서로가 호상탁마 함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주고받아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요, 이러한 작업이 주효(奏效)하여 변하는 세태에 따라 알맞은 경전과 읽을거리를 제공할 기능을 터득하게 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최상의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람이 있다면, 우선 고전경론을 토론하고 읽을 수 있는 상설기관이나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입니다. 여러분들의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기대합니다.”
오후1시. 운하당에는 월운 스님을 비롯해 강평에 참가한 대중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실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고 곧바로 강평회에 들어갔다. 워낙 어려운 경전으로 치부되었던 <인본욕생경>은 부처님과 아난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되며 인연을 따라 여러 법이 생기하는 양상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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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도리를 설하는 <인본욕생경> 자체가 어려워서 그런지, 스승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아니면 참가 대중들의 안목이 스승과 현격해서인지 강평은 시역고에 대한 오탈자 지적과 일부 문장의 번역에 대한 이의제기, 편집상의 문제 지적 등으로 이어졌다.
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취봉 스님의 진행으로 4시간 동안 이어진 강평회는 진지했다. 신규탁 교수(연세대 철학과)가 <인본욕생경>의 번역 및 주석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고 월운 스님이 이 경을 ‘초기대승경’이라 한데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며 강평의 열기가 달구어졌다. 한 사람의 후학이 20여 쪽을 집중 연구하여 발표를 했다. 경상 앞에 꼿꼿이 앉아 후학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기록하는 조실 스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르침’이었다. 토씨 하나에서 문장부호 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지고 첨삭하는 정성으로 달구어진 강평회 그 자체가 장엄한 법석이 아닐 수 없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잊거나 왜곡돼지 않도록 하여 길이 전승시키기 위해 결집 작업을 할 때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칠엽굴의 제1차 결집 장면 말이다. 부처님을 측근에서 시봉했던 사촌동생 아난이 구술(口述)하면 대중이 논의하여 경의 원본을 삼았던 그 장엄한 장면. 그 때는 문자 기록이 아니라 암송하는 것이 유일한 유통 수단이었음을 생각하면, 칠엽굴에서의 제1차 결집으로부터 2500여 년이 지난 이날의 강평회는 시공을 초월한 귀한 불사의 현장이었다.
월운 스님은 어느 대목에서 “나는 웬만치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에게 뭇매를 맡는다”며 “여러분이 오자를 잘 찾나 못 찾나 보려고 그런거야”라며 분위기를 식혀 주기도 했다.
능엄학림 출신인 반산 스님은 “이렇게 귀한 자리가 만들어진 것에 감사드린다”며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경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암사 강주 지형 스님은 “오늘 강평회를 해 보니까 강원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강학을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월운 스님은 “오늘 가지고 온 대본에 지적한 사항을 빠짐없이 적은 뒤 가져가지 말고 나에게 주면 그것을 하나하나 보면서 정리 하겠다”고 부탁했다. 다시 강평회를 마련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날 강평회로 인해 <인본욕생경>의 번역에 날개가 달린 것은 분명했다.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정도의 번역은 아닐지라도 고전을 번역하는 새로운 풍토의 필요성이 제기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같은 인식제고 자체가 월운 스님이 강평회를 마련한 이유의 팔 할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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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마음을 낸 이들도 더욱 정진해야겠지만 새 인물을 개발하여 교육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종단적인 합의와 협조가 절대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한문고전을 전공하는 기구를 상설화해서 우리의 고전은 우리의 기구에서 판독한다는 원칙이 서야 앞으로 한국불교의 명맥을 주동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월운 스님이 주장해 온 ‘상설기구’에 대한 원력이 이 날의 강평회로 그 지평을 넓혀 갈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평회에 참가한 후학들은 한국불교 경학연구와 역경불사의 주역이 될 것이기에 여기 이름을 기록한다.
-취봉(능엄학림 학감) 거부(前 수덕사 강주) 응각(前 백양사 강주) 정산(법주사 강사) 학봉(영축사주지) 현문(능엄학림 강사) 중봉(동화사 강사) 서봉(화명선원장) 우설(통도사 율원장) 승석(청안사주지) 반산(능엄학림 출신)각진(능엄학림 수학) 현암(능엄학림 연구원) 지형(청암사 강주) 일연(봉녕사 강사) 상덕(청암사 강사) 수법(청암사 중강) 운산(운문사 강사) 신규탁(연세대 교수) 김두재(역경원 역경위원) 윤옥선(불경서당) 최윤옥(불경서당) 이상 무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