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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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정안 스님(대둔산 태고사 주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도 염불 쉬지 말아야”

원효 대사가 ‘도인이 날 땅’이라며 춤을 추었다는 충남 금산 대둔산의 길지(吉地)에 둥지를 튼 태고사. 비 내린 뒤 더욱 웅장하게 다가오는 산세는 ‘대둔산의 도인’으로 알려진 태고사 조실 도천 큰스님의 위엄처럼 범접하기 힘들었다.
2006년에는 성지순례차, 2008년에는 도천 큰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방문했던 대둔산. 4년의 세월이 흐른만큼 더욱 노후된 애마(愛馬) 승용차는 가파른 산길을 숨가쁘게 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산중턱에서부터 차 엔진룸에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서둘러 차를 세워 본네트를 열어보니 냉각수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애마도 늙었고, 주인도 나이를 먹었지만 머리속에 담고 있는 번뇌 덩어리는 그닥 줄지 않았다. 연기를 내며 끓어오르는 냉각수처럼 내 마음도 안절부절. 다행히 차가 손상될 정도의 엔진 과열은 아니어서, 근심을 내려놓고 호젓한 산길을 오른다.

촉촉한 빗물에 더욱 청명한 녹색 기운을 발산하는 산길을 20 여분 정도 오르니, 송시열(宋時烈ㆍ1607~1689) 선생이 썼다는 ‘석문(石門)’이란 휘호가 새겨진 바위 통로가 나온다. 몇 번이나 통과했던 석문의 안과 밖이 이번에는 마치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선 처럼 느껴져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석문을 통과해 절 아래서 보면, 태고사 뒤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왼쪽 봉우리는 관음봉 또는 문수봉이라 불리는데, 이런 봉우리가 있는 절은 큰 도인들이 나온다고 전해져 온다. 범종각을 비롯해 깨끗이 단장된 도량이 오랜 중창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었음을 보여준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 여기 저기 교통사고가 난 탓에 태고사 주지 정안(正安) 스님과의 약속시간이 1시간이나 늦었다. 서둘러 관음전 옆에 있는 거처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스님, 2년만에 뵙습니다. (도천) 큰스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큰스님은 100세의 고령이라 요즘은 직접 일은 안 하시지만 여전히 불사를 직접 감독하십니다.”
‘도천 큰스님의 분신’이라 불릴 정도로 정진에 열심인 정안 스님은 신도들로부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효자스님”이란 찬탄을 받는다. 스님은 1968년 입재 후 41년동안 관음ㆍ지장 기도정진을 멈추지 않은 놀라운 정진력을 보여주고 있다. 스님은 3년마다 천일 기도결제를 하고 해제하는 바로 당일, 결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태고사는 사시사철 기도정진이 끊어지지 않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스님의 사분정근은 새벽 4~6시, 오전 9시반~12시반, 오후 2~4시, 저녁 6시반~8시반 등 하루 8시간 진행된다. <천수경>과 <금강경> 독송, 지장보살 정근, 축원 등으로 이어지는 기도는 사시사철 이어진다.


“태고사의 수행 가풍(家風)은 어떤 것입니까?”
“큰스님은 평생 천수다라니로 수행한 수월(경허 선사의 수제자) 큰스님의 가풍을 그대로 잇고 있습니다. 보살도와 일, 참선과 계행이 오롯이 하나인 수행입니다.”
무려 41년 동안 한 도량에서 관음정근과 지장정근을 통해 염불수행에 몰두해 온 정안 스님의 구도과정, 특히 출가동기가 궁금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이듬해 전주공고 화학과를 졸업한 나는 대학입시에 떨어져 장수 고향 집에서 3년 동안 놀면서 인생의 허무를 느꼈습니다. 다시 팔공산에 들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걷지를 못하게 되었어요. 약을 먹고 병을 고치는 와중에 더욱 무상(無常)을 느껴, ‘출가를 해서 나도 한번 대도(大道)를 이뤄 중생제도에 나서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죠.”

정안 스님은 24세에 임실 죽림사로 출가하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10년 동안 어산(범패)을 익히고, 강원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배운 후 참선으로 깨치겠다고 당찬 포부도 세웠다.
“칠순이 넘은 계운 스님으로부터 3년간 어산을 죽자 사자 배웠지요. 새벽마다 도량석과 종성, 예불을 모신 후 절을 하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위대하고 위대하고 위대하신 선지식을 친견하게 해달라’고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발원했습니다.”

이런 간절한 발원 덕분인지, 정안 스님은 담양 보광사 주지 도광 큰스님을 통해 새로운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68년 8~10월 석달 간, 정안 스님은 동철 스님의 소개로 담양 보광사에서 다시 행자생활을 했다. 도광 큰스님은 다른 행자 두 명과 함께 매일 법문을 했는데, 그 말씀이 감명 깊게 가슴에 배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광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시 죽림사로 돌아가 범패를 마저 배우고 싶다고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스님은 마침 금산 태고사에 갈 일이 있다며 같이 나가자고 하셨다. 이 길이 바로 태고사 조실 도천 큰스님과의 숙명적인 인연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이다.

68년 10월 말, 도광 큰스님을 따라 도착한 태고사는 원효 스님이 창건한 호남 제일의 도량이었음에도, 당시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양철로 지은 법당에 부처님만 모셔놓은 정도였다. 오후 2시가 넘어 대혜성 노보살님이 청국장으로 밥을 차려주었는데, 평생 제일 맛있는 공양이었다. 공양을 마친 후 태고사에서 온몸으로 불사중이던 도천 큰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몇 달 전, 담양 보광사에서 큰스님을 처음 뵐 때를 스님은 회상했다.

‘이 스님이야말로 진짜 진짜 진짜 스님이시로구나. 이 분이야말로 옛날 옛날 옛날 스님이시로구나.’
태고사에서 다시 정안 스님을 만난 도천 큰스님은 이렇게 질문했다.
“너, 거기(보광사) 있지 뭣하러 왔느냐?”
“스님, 저 여기 있으러 안 왔어요.”
태고사는 산세가 험하고 일도 많아서 잠시라도 머물러 있는 스님이 없었다. 조금 일을 할 것 같으면 도망 치는 스님들이 대부분이어서 도천 큰스님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이튿날 도광 큰스님이 태고사를 떠나는데, 정안 스님에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태고사에 남게 되었는데, 도천 큰스님께서 흔들리는 마음을 아셨는지 “이런 데서 기도하면 소원이 다 이뤄질테니 한번 열심히 해봐라.” 하고 격려했다.

“처음엔 ‘며칠만 정진해볼까?’하고 시작했는데, 노보살님께서 ‘100일간 기한을 정해 정진을 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장수 본가에 한번 다녀온 후, 음력 10월 보름, 100일간의 관음정진에 들어갔습니다. 100일기도를 마치니,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스님이 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도천 큰스님께서도 ‘이번에는 3년간 천일기도를 해보거라. 천일기도를 하면 업도 녹아지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신심이 깊어지고 성불도 가능하니, 기도를 잘 해봐라.’며 당부하셨습니다.”

정안 스님은 며칠간 갈등을 하다가, 성지인 태고사의 중창을 위해 기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다시 한번 장수 본가에 다녀온 후 이듬해인 69년 4월 보름 사미계를 받고 와서, 5월부터 3년간의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아침ㆍ저녁으로 기도정진을 했는데, 낮에는 현산 스님(現 화엄사 선원장)이 대신 기도를 해주었다.


세 번째 천일정진을 마친 9년만에 삼불전이 완공되었고, 이후 3년마다 천일정진이 회향되면서 전각이 하나씩 건립됐다. 결국, 극락보전 산신각 관음전 지장전 백팔계단 종각 선방 등이 천일정진을 시작한지 40여년만에 모두 지어졌다. 정성껏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3년마다 천일이란 기한을 정해 기도정진을 하는 것은 불사 성취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염불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이었다. 천일정진을 시작할 때는 12년간 관음정근을 했는데, 이후에는 지장정근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6.25 동란을 겪으면서 남북이 서로 죽이는 큰 원결을 맺었어요. 몇 백만 명이 서로 죽인 동족상잔(同族相殘)이 일어났으니, 그 원한을 풀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지장정근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 정안 스님이 도천 큰스님께 지장정근기도를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송광사의 구산 방장스님을 뵙고 오너라.” 하셨다. 구산 스님은 법련화 보살님이 시주한 서울 법련사에 매달 올라와 법문을 하셨는데, 정안 스님은 법회 전날 구산 스님을 뵙고 질문을 드렸다.
“지장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고 싶습니다.”
“아주 장한 원을 세우셨네. 지장보살님은 일체중생을 깨우쳐주고 조상 영가를 극락왕생 시키는 원력을 세웠으니, 힘껏 정진해 보시게나.”

구산 스님은 신묘장구대다라니 1080독을 세 번 한 이후에 견처를 얻었다는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방장스님의 격려로 자신감을 얻은 정안 스님은 다섯 번째 천일정진을 지장정근으로 입재하면서 서울 불광사의 광덕 큰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청했다. 이날 광덕 큰스님은 지장예찬 법문을 설했는데, 그렇게 신심이 날 수 없었다.

99년 2월 지장재일, 정안 스님은 69년 관음ㆍ지장정근을 시작한 이래 1만일정진을 회향했다. 그러나 정안 스님은 회향일 곧바로 쉬지 않고 그날로 다시 지장기도를 시작했다. 41년간 쉼없이 이어진 천일정진, 그 가운데 30년간 계속된 지장정근을 하며 스님은 내세에도 지장보살의 원을 실천하겠다는 발원을 했다. 독송용 <금강경>을 만들어서 광덕 스님께 점검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정안 스님은 광덕 스님에게 당신의 원력을 숨김 없이 밝혔다.
“지장정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해 지장보살의 원력과 보현보살의 보현행원을 세세생생 실천하고 싶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광덕 스님이 정안 스님의 어깨를 잡아 힘차게 흔들며 당부했다.

“꼭 너는 보현행원을 하거라! 보현행원이다!”
이렇게 광덕 스님이 힘과 용기를 주자, 그때부터 정안 스님이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 할 때 마다 저절로 보현행원과 관련한 법문이 쏟아져 나왔다. 오랜 관음ㆍ지장 염불로 득력(得力)한 정안 스님은 어느 경전을 보거나 고승의 법문 테이프를 들어도 그대로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바를 정(正)’자, ‘편안한 안(安)’자란 법명 그대로 안심(安心)을 얻었기에 탐욕과 애욕, 성냄, 어리석음이 저절로 사라졌다고 한다.

“기도해서 저절로 삼독이 없어져서 일체에 걸림이 없고 안락해졌습니다. 지장기도를 할수록 자비로워지고 편안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 처럼 철저하게 크게 깨닫기(廓徹大悟) 위해 오로지 정진할 뿐입니다.”
2011년 음력 2월 지장재일이면 정안 스님이 염불정진을 한 지 42년 째 되는 해다. 같은 도량에서 해제 없이 결제를 계속해 온 수행자는 거의 없다. 특별하고도 간절한 원(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매일 8시간 꼬박 선 채로 쉼없이 이어온 사분정근을 하면서 어찌 번뇌가 없었겠는가.


“처음엔 번뇌가 말도 못했지요. 중간에 너무 애를 쓰다가 상기(上氣)가 들어 혈압이 높아져서 3년 정도는 힘들 때마다 앉아서 염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도 꼭 해나간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세월이 장구하다는 생각은 안들었습니다. 지금도 처음 입재할 때랑 마음가짐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동안 한결같이 간절한 염불정진을 한다는 것이 약삭 빠른 현대인들에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몇 년은 고사하고 몇 달, 며칠 정진을 해보고 안되면 금새 포기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 아닌가. 이러한 말법(末法)시대에 정안 스님의 용맹정진은 더욱 귀한 수행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희유(稀有)한 일이기에 일반인이 보기에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지 모른다.

86년 7월 백중기도 회향 때는 간장독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대둔산 의상대에서 환하게 빛이 나는 방광현상이 나타났다. 99년 2월 지장재일, 1만일 기도회향 때는 불꽃 가운데서 한 쌍의 화룡(火龍)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안 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신도들이 갖가지 가피를 입은 일이나 영험담이 무수하지만 이는 ‘신심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적이 일어났다고 호들갑 떨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미신으로 몰아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다.
정안 스님의 수행담을 들으면서 수행자의 의지와 원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더욱 큰 귀감이 된다. 그러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안 스님과 같은 정진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편을 통해 부족함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수행을 할수 있을까.

“신도님들은 아침ㆍ저녁에 <천수경> 7편을 하고 <금강경>을 1독 한 후 지장정근을 하신 후 츰부다라니를 하시면 좋습니다.”
정안 스님에 따르면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안으로 지은 업을 정화한다면, <지장경>에 나오는 츰부다라니는 밖으로 지은 업을 녹인다고 한다. 모성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의 다라니와 부성을 상징하는 지장보살의 다라니가 안팎으로 업을 녹이고 지혜와 공덕을 함께 닦게 한다. 그리고 해탈경인 <금강경>은 최종적으로 공도리를 깨닫게 한다는 설명이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화두삼아 간절히 염불해 보세요. 매순간이 한결같이 이어지면 동정일여가 이어지고 이것이 더욱 깊어져 쭈욱 이어지면 오매일여, 숙면일여가 됩니다. 염불정근도 일심으로 하게 되면 참선의 화두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화두이든 염불이든 일념(一念)이 상응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장보살’ 염불을 통해 삼매에 들면 과연 어떤 상태일까?
“지장정근을 통해 일념상응이 되면 염불하는 자가 지장보살이 됩니까?”
“‘내가 지장보살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상(相)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직 ‘지장보살’ 한 생각만 찾아야 합니다.”
“어떤 스님들은 염불로 일념이 되면 ‘염불하는 놈이 무엇인가?’ 하고 화두를 챙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염불하는 놈이 무엇인가?’ 하고 찾으면, 염불하는 놈과 찾는 놈이 두 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지장보살’ 한 생각만 쫒아나가십시오. 그렇게 ‘지장보살’ 하나로 똘똘 뭉치면 화두 드는 상태와 다름이 없습니다.”
정안 스님은 이러한 일념삼매에 들어 체ㆍ상ㆍ용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을 때 완전한 깨침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체(體)는 입만 열어도 어긋나고 마는 진리의 본체입니다. 상(相)은 일체 현상계가 나의 몸이어서, 이 세상 그대로가 실상(實相)인 세계입니다. 용(用)은 일체와 하나인 자리에서 생각을 내고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정안 스님의 법문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진실함이 배어있다. 평생 남의 돈만 세다가 퇴직하는 은행원 처럼, 한 평생 남의 살림살이만 저울질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수행자가 허다하다. ‘부처님 아들’이란 뜻의 ‘불자(佛子)’ 타이틀을 가진 이라면 지금 당장 염불이나 주력, 화두를 챙기면서 내 살림살이 한번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하산하는 길에 한없이 자비롭고 순박한 정안 스님의 미소를 떠올리며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을 흥겹게 불러본다.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정안 스님은
1943년 전북 장수 출생, 66년 임실 죽림사에서 출가했다. 69년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1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68년부터 현재까지 쉼없이 천일 관음ㆍ지장 기도정근을 이어오며 염불수행을 하고 있다. 현재 금산 태고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글ㆍ사진 김성우(작가, 본지 논설위원) | buddhapia5@hamail.net
2010-09-12 오후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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