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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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소유는 ‘나’라는 생각 갖지 않는 평상심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 ‘참선 수행의 목적’ 회향법문
<현대불교 자료사진>

동국대 불교학술원(원장 로버트 버스웰)이 8월 12~13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를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금봉암)은 ‘참선 수행의 목적’을 주제로 회향법문 했다.


참선이 무엇인가? 참선도 부처님 가르침을 성취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선을 왜 하는가?’ ‘불교를 왜 믿는가?’라는 질문도 같습니다. 둘 다 목적이 있습니다. 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그 방법이 불교는 여타 종교나 사상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목적에 도달했을 때도 여타의 종교 사상과는 다릅니다.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행복을 내 밖에서 얻으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로 가다보니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 두게 되었습니다. 물질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밖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은 순기능과 역기능이 항상 함께 따라옵니다. 현대 문명이 풍요롭고 편리하지만 역기능이 있습니다. 역기능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면 불행하게 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행복 만들려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세계를 깨달아야

부처님도 출가해서 발견한 것이지만 밖으로의 추구는 행복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 100%의 만족이 되지는 않습니다. 순기능만 있는 100%의 행복을 만들려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세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는 밖으로 추구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잘 얻게 되고 여기서는 순기능만 작용합니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체험하면 내가 바로 부처와 조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를 발견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선(禪)입니다. 선이라고 하면 좌선(坐禪)을 떠올리는데 그 자리를 발견해야 진정한 좌선입니다. 몸이 앉아 있는 것이 좌선이 아니라 마음이 앉는 것이 진짜 좌선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가능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일상생활이 매일 매일 행복해지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음덕을 끼쳐 줄 수 있어서 공익(公益)을 위하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인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사회와 이웃에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전제 군주국에 살았던 대혜 선사는 대신(大臣)이 수행을 잘해서 정치를 잘 하면 임금을 요순의 지위에 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이 매우 가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내 혼자 잘 되려고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나와 우리 집을 위하여 하다가, 선을 자꾸 하다보면 눈이 열리고 이웃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웃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안 들면 참선 잘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제대로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이기심이 없어지며 남과 더불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참선을 제대로 하면 내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도 편안하게 하려는 큰마음이 열립니다.

최근에 저는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4D의 좋은 기술로 상영되는 영화를 보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교와 비교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선(禪)이 그 쪽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지구 자원이 고갈되어 판도라라는 행성에 가서 자원을 약탈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약탈하려는 인간의 수단이나 그것을 방위하려는 나비족의 방법이 모두 다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폭력적인 방법은 악순환만 되풀이 할 뿐 근본적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절대로 힘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좋다고 한다면 누구나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을 저는 부시형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평화적 해결 방법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됩니다. 거기서 저는 부처님의 위대성을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힘으로 하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해결 방법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 부처님의 불법에 대한 자부심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연기’믿어야 공부할 수 있어
부처님께서 발견한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의 법칙을 이해하기 어려우나 과학이 여러 방면에서 부처님께서 발견한 세계를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연기란 어떤 것도 단일로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두 가지 이상의 어떤 것이 서로 관계 맺어서 가상의 존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걸 믿어야 공부를 하게 되고, 공부를 해도 힘차게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정신과 몸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공(空), 무아(無我)를 깨달으시고 절대적인 행복을 느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을 포함한 우주 자연의 존재 원리를 깨닫고 영원한 행복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공을 이해하여 착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참선은 공(空), 무아(無我)를 체험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참선해서 공, 무아를 체험할 수 있는가? 불교 수행 방법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참선이 공, 무아를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마음의 변화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의식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제8아뢰야식, 제7말나식, 제6식이 이것인데 이 세 가지가 다 잘못되어 내가 있다는 생각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정화하면 공과 무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즉 6식은 표면의식, 7식은 잠재의식, 8식은 무의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식은 가장 심층의 미세한 마음의 작용인데 예를 들어 문틈으로 햇볕이 들어오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먼지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세 가지 미세한 작용이 이 8식에서 일어나는데, 이런 세 가지 미세한 망념 즉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는 근본 무명, 능견상(能見相)이라는 주관적 인식, 경계상(境界相)이라는 객관적 인식 대상이 작용을 시작합니다. 이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도인이나 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꼭 같습니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데 도인은 정화돼서 작용하고, 도인 아닌 사람은 오염돼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도인 안 된 사람은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데 주관과 객관이 있다고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도인이 안 된 사람은 제8식 무의식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심해져서 잠재의식, 표면의식으로 나오면서 집착이 강하게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이다, 손해다’라는 분별심을 일으키며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흘러가는 물과 같다고 합니다. 또 <서장>에서는 반복해서 일어나는 이것을 심고 또 심는 종자와 같다고도 합니다. 구름과 바람과 같다고도 합니다. 처음 작용하면서 거기서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고, 분별로 착각에 빠져서 이런 사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관도 허구이고 착각이라는 것, 이것이 무아, 공인 줄 알면 거기서 세탁이 되어서 주객 없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주객이 없는 작용은 개인의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전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지혜의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욕망을 참선으로 정화해서 본래부터 작용하는 지혜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불교는 잘못된 의식을 지혜로 바꾸어 행동하게 하여 모든 사람이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참선은 세탁기와 같습니다. 어디나 작용은 있습니다. 하나는 세탁돼서 작용하고, 다른 하나는 주관 객관으로 오염돼서 작용합니다. 오염돼서 작용하다 보니 우리는 인종과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 갈등과 같은 역기능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허구이고 착각인 줄 알아서 정화하면 갈등이 없는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 자본주의니 생명 자본주의니 하는 그런 주의를 능가하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모든 종류가 서로 소통하고 상생하면서 평화적으로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참선을 하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참선도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한 마디에 깨달아 버립니다[言下大悟]. 드물지만 이런 사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옛날에도 얻기 어렵다고 하여 난득(難得)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라는 질문에 “뜰앞의 잣나무다”, “마른 똥 막대기다”라는 주관ㆍ객관이 끊어진 말을 들으면 딱 막힙니다. 이 막다른 순간에 주관과 객관이 확 무너지면서 깨닫게 됩니다. 육조 스님께서 의발을 뺏으러 대유령까지 쫓아온 도명 스님에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명 수좌는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았습니다. ‘너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 막대기’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도명 스님은 그 질문을 받는 순간에 주관과 객관이 딱 끊어지면서 바로 깨달았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아바타>의 경우처럼 힘으로 의발을 뺏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집착과 욕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무아의 지혜로써 해결합니다.

세상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안 가지는 것을 무소유라고 아는 것은 착각입니다. 부처님께서 늘 무아, 공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수달다 장자는 재산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건이나 출세, 권력을 아예 안 갖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라는 생각이 없는 평상심을 깨달으면 밖으로 가지든지 갖지 않든지 서로 통하면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무소유는 ‘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평상심입니다. 가져도 가졌다는 생각 없는 평상심으로 지혜롭게 잘 관리할 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밖의 것을 안 가지는 것이 무소유라면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진짜 무소유는 자기라는 생각에 집착 없이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불교는 ‘나’라는 집착이 없이 형편에 따라 있는 그대로 보면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무아(無我)를 알고 실천하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효과가 나옵니다. 형상은 달라도 본질이 다 평등하다고 알아서 비교를 안 하게 되고, 비교에서 오는 모든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됩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모양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우리는 얼마나 싸우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모양은 다르나 본질은 모두 하나입니다. 갈등·대립·투쟁은 자해 행위입니다. 본질을 알면 절대로 비교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습니다.
둘째,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가치와 의미를 알면 하는 일이 즐거워서 열심히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함으로써 전문가가 되고 전문가가 되니 남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는 사람이 되고 인격이 갖추어져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모든 분야에서 이런 훌륭한 어른이 많은 사회와 국가는 안정되고 좋은 사회이고 좋은 국가입니다.

셋째, 자주적인 사람이 됩니다. 안으로 자신의 욕망이나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서 당당히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 소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나라의 국책 사업 몇 가지가 정책을 세울 때는 국가와 국민 전체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계획했다가 오히려 정쟁(政爭)의 도구가 되어 국민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고 괴롭히고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소통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정치권에서 소통부재의 소음이 국민을 정신적으로 얼마나 괴롭히고 있습니까? 진보든 보수든 국가와 국민을 잘 되게 하자고 만든 제도이고 수단입니다. 오직 목적은 국가와 국민을 잘 되게 하자는 것 하나 뿐임을 알면 수단이 목적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수단은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협의해서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정치권이 되어야 국민 세금으로 주는 세비를 받을 자격도 있고,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교통과 정보망이 발달해서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지 않고 소통하는 일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형상만 보지 말고 본질을 보아서 모든 다른 것들이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을 알면 자연적으로 소통하게 됩니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말합니다.
공이라고 해서 완전히 없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항상 역동적인 활발발(活潑潑)한 평상심이 있습니다. 인종 문제, 민족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종교 문제 등등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본 모습입니다. 갈등·대립·투쟁하는 모든 일들은 착각과 오해에서 나온 허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착각과 오해와 허구로부터 깨어나려면 오직 부처님께서 깨치신 본질을 체험해야 합니다. 본질을 체험하게 하는 방법 가운데 화두 참구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갈파(喝破)했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가깝고 절실하게 꼭 알아야 할 화두가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이것이 무엇인가?’입니다. 화두를 통하여 깨달으면 사람은 물론 동물과도 소통하고, 자연과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 이렇게 위대한 공부는 없다고 봅니다. 파급 효과는 이렇게 굉장하지만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는 간단합니다.

존재와 비존재, 작용과 비작용, 이렇게 하나이면서 두면이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인과 중생, 내 종교, 타 종교도 없습니다. 편리를 위해 방편으로 이름 지어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본래 그 자리에서 보면 저 문 밖의 사람이고 몰랐다고 하면 죽은 송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직 손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이 살활(殺活)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것은 그렇게 존재할 뿐입니다. 거기서 ‘수행하라. 깨달아라’하는 것은 멀쩡한 맨살을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알겠습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정리=조동섭 기자 | cetana@gmail.com
2010-08-31 오후 5:43:00
 
한마디
쓴미소 뭐가 날뛴다니까,뭐도 날띄더라 ~ ~ 바로 그꼴이네 ~ ~ , 이자 은사라는거는 땡땡이 중으로 평생 막행막식으로 살다 이제 오늘 내일 하고 있다네. 우리들이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인간계에서 기초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머리밀고 유니폼걸쳐 입은채 들어오다보니 맨날 보는거라곤 수구매판 친일지 매국매적 행위를 한 조선일보 신문 쪼가리 줏워 읽은거 가지고 아는척을 많이 하지, 쯧 쯧 아이고 불쌍해라 ~ ~ 이걸 어쩌나.
(2010-09-03 오후 3: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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