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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불교학술원(원장 로버트 버스웰)은 8월 12~13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한국 간화선 종장인 前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혜국 스님(간화선의 유래와 수행방법),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참선 수행의 목적),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향상의 정맥)이 기조발제와 회향법문을 통해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을 떠나기 전에 이미 왕궁에 태어나셨고 마야 부인 태속에 들기 전에 중생을 제도해 마쳤다.”
젊은 시절 이 법문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양의 세계’ 즉 ‘말의 세계’에 너무나 익어진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말 이전의 세계는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법문이 간화선을 바로 알려준 법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는 조사스님의 낙처를 바로 보는 안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눈으로 보면 간화선은 이 모임이 시작되거나 시작되지 않거나 간에 이미 완벽하게 보여 지고 있다. 간화선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많은 수의 대나무 그릇을 바다에 담갔을 때 그릇마다 바닷물이 가득 차 들어오지만 바닷물 자체는 온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는 이치와 같다. 다만 사람들이 잘못 생각해 자기 그릇 속에 들어있는 물만 따로 존재하는 걸로 착각하고, 내 영혼 네 영혼이 따로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 즉 연기법을 모르고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독립된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생들의 생각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간화선의 특성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내가 부처임을 바로 보는 세계이다.
기록의 역사가 아닌 존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 스님이 파안미소했다. 이것이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소식이다. 바로 마음과 마음을 전한 소식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소식이다. 이러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도리를 세 곳에서 보이셨다고 해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고불미생전 면목(古佛未生前 面目)을 역력하게 보여준 소식이다. 이 삼처전심이 바로 간화선 역사의 시작이다.
기록하는 주인공 보라. 기록만 보면 허상
혹자는 삼처전심의 기록이 있고 없고를 갖고 진위를 따지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기록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생각이다. 기록할 줄 아는 주인공을 더 깊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기록만 갖고 진리를 보려면 그런 생각은 실상을 부정하고 그림자를 쫓는 격이다. 기록이란 이미 상법(相法)일 수밖에 없다. 존재자체인 무성연기(無性綠起) 즉 실상의 세계는 기록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가(禪家)에서는 인간의 기록을 믿는 게 아니고 마음을 깨달은 선지식들의 점검을 믿는다. 역대 33조사와 제대 선지식들이 한결 같이 삼처전심을 찬탄하고 거량해온 터에 그 보다 더한 참 기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기에 동토 초조 달마대사는 확연무성이라 하셨다. 확연해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한 자리라는 것이다. 2조 혜가를 거쳐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는 것인데, 오직 고르고 분별함을 꺼린다. (고르고 분별하기 때문에 지극한 도에 이르지 못한다) 단지 미워하고 사랑함이 없다면, 텅 비어 명백하리라(至道無難 唯?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 것이다. 양변을 여윈 중도를 깨달아야 이심전심이라는 가르침이다.
4조 도신 스님의 안심법문에 이어 5조 홍인 조사에 이르면 이심전심의 세계를 선문답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홍인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한 채의 집이 있다. 그 속에 온갖 오물이 가득하다. 이 어떠한 물건인가?” 거듭 말씀하시기를, “모든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어 한 물건도 없을 때 이 무슨 물건인가?” 여기서 몰록 깨달으면 조사선(祖師禪)이요 깨닫지 못하고 참구해야 한다면 간화선(看話禪)이다. 이와 같이 조사선과 간화선은 이름만 다를 뿐이다. 선 그 자체에는 그 이름도 없다. 5조를 이은 6조 혜능 스님은 이러한 사상을 무념위종(無念爲宗)이요 무상위체(無相爲?)요 무주위본(無住爲本)이라는 사상으로 본래성불(本來成佛)의 도리를 깨달으라고 했다. 바로 돈오사상이다.
화두 타파한 자리가 평상심이요 중도
이렇게 생각 끊어진 자리인 참선법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6조 문하에서 강호제현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강서의 마조 스님, 호남의 석두 스님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마조 스님(709-788)의 중도(中道)와 평상심(平常心)을 살펴보자. 마조 스님은 중도를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고 가르쳤다. 그 중에서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많이 강조하셨다.
“무엇이 평상심이냐? 조작이 없고 시비가 끊어졌으며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단상(斷常)이 없고 범성(凡聖)이 없는 것이다”라고 평상심을 정리해 스승인 6조의 무념위종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기 까닭에 간화선(看話禪)에서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이 되어 화두를 타파한 자리 그 자리가 바로 평상심이요 중도라고 한다.
북종선 신수 대사 계열에서는 자성청정 가운데 청정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닦는 법을 강조하여 점수돈오(漸修頓悟)라고 했고 남종선 6조 혜능 계열에서는 자성청정 가운데 청정을 본각(本覺)으로 보고 본각에 중점을 둔 까닭에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했다. 그러니까 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지 법 그 자체에는 돈이니 점이니 본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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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서 백장을 거쳐 황벽의 전심법요, 임제의 무위진인, 조주(778~897)에 와서 무자(無字)화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판치생모(板齒生毛, 앞니에 털이남) 등 많은 화두가 제시됐다. 특히나 조주 스님은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서 5칙이나 되는 공안을 들어 보였다. 이는 간화선이 이미 3조 때부터 이야기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혜 스님(1089~1163) 대에 와서 간화선이 새로 생긴 걸로 본다면 그것은 문자로 정형화된 간화선만 보는 것이 된다.
조주 스님을 거쳐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 선사는 제자인 대혜에게 임제 정종기를 내렸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삼현(三玄) 삼요(三要)와 사료간(四料簡) 사빈주(四賓主)와 금강왕의 보검과 땅에 웅크린 사자(踞地獅子)와 한 할이 한 할의 작용을 하지 못함(一喝不作一喝用)과 고기 찾는 장대 그림자 풀(探竿影草 ‘고기 찾는 장대[探竿]’은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에는, 먼저 물의 깊고 얕음을 알아보기 위하여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이고, ‘그림자 풀[影草]’은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가려 할 때에 먼저 불 커진 방안에 주인이 잠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풀 묶음을 달빛에 흔들어서 그 창문에 비추어 보는 것)과 한 할에 손과 주인의 나뉨(一喝分賓主)과 비침과 작용이 동시에 행하여짐(照用一時行)등의 허다하게 얽힌 실오라기들을 많은 학자들이 알음알이를 따라 주해를 내리는데 나의 왕궁창고 속에는 이러한 칼이 없다함을 결코 몰랐다 하리라. 막상 염롱해 드러내 보이면 보는 자들은 그저 눈만 껌뻑 거릴 뿐이다. 모름지기 저 으뜸가는 근기라면 계합증득하고 시험 인정함에 있어서 정면으로 또는 측면으로 제접해 본분수단을 쓰거늘 어찌 방편과 지위점차를 빌리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원오가 대혜에게 수시한 유명한 임제 정종기의 한구절로서 종문만세의 궤범이다. 삼현삼요와 조용일시 등의 전기대용(全機大用)도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요. 평지낙절(平地落節)이거늘 이것을 교가에서 주석을 붙이듯 알음알이 따라 해석하면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본분종사들이 금기하는 것이다”라고 절절이 밝혀 놓으셨다. 그뿐 아니라 근세의 서산 대사 역시 <선 교결>에서 간화선의 수승함을 간절하게 밝혔다. 또,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자성이 공했기에 삼계가 유심(唯心)이다. 삼계유심이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함인데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모두 공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하며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이를 일러 마음이라 중도(中道)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아니하고 깨끗하고 더러움도 취하지 않으며 양변을 초월한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으로 자성청정을 빼고서는 하나도 성립될게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삶ㆍ수행 하나 되어 정견 서야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중봉(中峰) 선사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중봉 스님은 스승을 생각하며 우리들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보이고 있다. 내 스승 고봉 화상은 항상 학인에게 이르기를 “오직 본참 공안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간절히 참구하라. 궁구하고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화두를 타파하면 바야흐로 성불한지 이미 오래임을 스스로 알 것이다. 이 도리는 기왕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이 생을 요달하고 죽음에서 벗어나는데 모두가 시험하신 묘방이다. 오직 귀한 것은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뿐이니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으면 누구나 상응하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감에 “첫째 입각처가 온당해야만 깨달음도 친절하니라. 설사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철저한 신심만 퇴전치 않으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라고 간절하게 가르쳐 보이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교(敎)이다. 그 가르침의 근본 뜻을 선(禪)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근본 뜻인 선에 들어가자면 직접 체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교를 객체화시켜서 지식화가 되어선 안 된다. 이러한 사상을 교외별전 불립문자(敎外別傳 不立文字)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어 정견이 확실하게 서야한다는 말이다. 영상으로 비쳐진 대상화된 사물이라면 중도연기(中道綠起)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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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이란 중도연기에서 본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정견이 바로 서야 연기법(綠起法)과 무아(無我)사상 그리고 공(空)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견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에 참선을 시작해보니 주로 번뇌 망상과 싸우느라 공부가 순일하지를 못했다. 화두가 무엇인지 깊은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선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자리를 화두(話頭)라고 한다. 그런데 그 화두가 반야공성(般若空性)을 일러준 일구라는 걸 모르고 잘못 생각해 소소 영령한 주인공이 각자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 깨달아야 하겠다는 구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고 깨달아야 할 실체가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푹 쉬지를 못하고 빨리 깨닫겠다는 속효심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참선이란 쉬고 쉬어서 의정이 독로하게 되면 비우고 또 비워 철저한 무(無)에 도달하게 된다. 그 순간 우주전체가 내가 되고 내가 곧 우주 전체가 된다. 즉 체로금풍(?露金風)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여러 해를 방황하다가 성철스님 문하에 살 때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게 되었다.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의 세계는 곧 바로 참구해 들어가야지 생각으로 따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화두참선이란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세계임을 알게 되었다.
영원한 행복 참다운 평화는 부족함을 채워서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구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 그때에야 영원한 평화 참다운 행복이 온다. 간화선은 구하는 세계가 아니고 덜어내는 길이다. 돈오의 길이다. 돈오란 더 이상 덜어낼게 없는 상태다.
그런데 덜어낸다고 해서 덜어낼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방황했던 것이다. 처음 참선한다고 앉았으면 주로 번뇌 망상과 싸우게 마련이다 참선하는 이가 처음 화두 탈 때로 돌아가 보자. 제자가 스승에게 묻기를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고 물으니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니라”라고 답했다. 우주의 대 진리를 묻는데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을까? 이것이 화두다.
화두를 참구하다 보면 참선하는 내가 있고 깨달아야할 뜻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깨달아야할 참 나라는 실체가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된다. 그 원인은 화두가 반야공성을 바로 일러준 일구라는 걸 모르고 화두를 통해서 소소영령한 주인공을 깨달아야 하는 실체가 있는 걸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제법무아도 아니요. 중도 연기법도 아니다.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진 자리가 화두이기에 다만 모를 뿐이라야 한다. 여기서 선지식의 지도가 필요하다. 다만 모르는 놈을 참구하고 참구하되 목마른 이가 물 찾듯이 배고픈 이가 밥 생각하듯 간절 간절하게 참구해야한다. 참선할 때 일어나는 모든 번뇌 망상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 바닷물이 마음이라면 파도는 망상번뇌다. 파도가 바닷물이다. 바람만 잠재우면 파도는 그대로 바닷물이다.
파도를 없애려고 싸우지 말라 파도란 없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일어나는 바닷물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바람을 잠재우라 그릇을 비우라 가득 찼던 그릇을 비우면 그릇은 그대로 허공이 가득하다. 그 허공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본래 허공이었다. 고로 본래 부처다. 허공을 만들 수 없듯이 부처도 닦아서 새로 만드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견이 바로 서야 되고 정견에서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심(大憤心)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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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원오 스님(1063~1135)이 문장로에게 보낸 경책의 글로서 우리들의 경책을 삼고저 한다. <원오심요>에 나오는 글이다.
“부처와 조사는 모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는데 모두 투철하게 깨달아서 마치 두 거울이 서로 비추듯 말이나 현상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격식과 헤아림을 멀리 초월하여 화살과 칼끝이 서로 마주 버티듯 애당초 다른 인연이 없어야 도의 오묘함을 전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음알이가 끊겨 사유를 벗어나고 정식(情識)을 뛰어 넘어 호호탕탕하고 자유자재한곳에 도달하였습니다…(중략). 지난날 스승 오조 법연스님을 뵙고 내 공부를 몽땅 털어놓았는데 그것은 모두 보고 들은 기연의 어구들로서 모두 불법과 심성의 현묘함에 대해였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유구(有句)와 무구(無句)는 등 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재주를 다 부려 보았고 다음은 논리를 세워 열심히 설명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해보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노스님은 꺼내는 족족 간략하게 물리치셨으니 나도 몰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끝내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재삼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하였더니 ‘네가 견해로 헤아리는 것이 다하여 일시에 모두 없어져 버리면 자연 깨달으리라’…(중략). 그 뒤 2년쯤 지나 소옥아 하고 자주 부른 것은 원래 딴 일이 아니라 한 구절에서 통 밑바닥이 빠진듯하여 스승이 전에 보여주셨던 것이 참다운 약석(약이 되는 돌, 돌을 뜨겁게 하여 배앓이를 치료함)이었음을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고조사(古祖師)스님들의 자비가 이와 같았다. 거듭 말하지만 간화선은 말길이 끊어진 자리다. 간화선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모든 말과 글로 부득이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중언부언 허물을 쌓는 일이다. 섶을 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으로 부처님대로부터 근래까지 간화선의 흐름을 대강 짚어 보았다. 결국 법이란 중도연기를 달리 표현할 뿐 그 근본 뜻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본분사이기에 각자 본인이 해결해야할 당사자의 몫일뿐이다. 노력하고 노력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