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9 (음)
> 신행 > 법문·교리 > 선지식
[선지식을 찾아서] 혜암 스님(경기도 정혜사 주석)
“내가 도둑질을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혜암 스님은...
경기도 포천 왕방산 자락의 조그만 포교당인 정혜사(禎慧寺)에 주석하고 계시다. 젊은 시절 춘천 성수고등학교, 부천 소명여고, 동국대 부속중, 영산성지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병을 얻어 출가,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교육평론집 <조국은 내 사랑>(고려원 펴냄) <사랑의 학교>(나라원)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핀다>(리빙북스)와 교육을 주제로 한 소설 <작은 천사들의 분노>(나라원) <학교는 있다>(〃)를 펴냈다.
혜암스님은 ‘선지식을 찾아서’ 코너의 취재에 손사래를 쳤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당신은 말석도 가당치 않다고 말했다. 대신 어쭙잖은 글이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게 하며 원고를 건넸다. ‘섬기는 이의 해탈, 사혼(師魂)이 이끈 사율(師律)의 힘’이란 제목이 붙어있었다. 평소 생각했던 교육관과 교사상을 그려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편집자>

가을에 접어든 어느 날. 희망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 종례시간이었다. 돌연히 난처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님! 제 돈이 없어졌어요. 제 돈 10만원이 없어졌어요."
정숙이가 손을 들고 안절부절 하였다.
학급학생들의 시선이 울상이 된 그녀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정숙이의 놀라는 표정을 바라보는 박 선생. 그는 학급담임을 처음 맡은 초년교사였다.

"무슨 돈이었어요?"
이렇게 묻는 박 선생은 곧 자신의 태도에 회의를 느꼈다. 무슨 돈이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회의의 수렁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박 선생이 누군가 훔쳐갔을 거라는 의심을 먼저 품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대부분 그런 상황의 끝은 학생들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문제의 근본부터 짚어보려고 한 것이었다.

"오늘 옷을 찾을 돈인데, 어떡해요."
정숙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박 선생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정답을 알고 있지 못했다.
"혹시 누가 정숙이 돈 주은 학생 없나요?"
당황스러운 끝에 겨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너무 너무 순진하시다."
"저 나이에 왠일?"
"우리 형편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시구만."
곧이어 한 남학생이 빈정대듯이 한마디를 내놓는다.
"선생님요, 돈을 주웠다면 쉽게 내놓겠어요?"
"무슨 뜻이죠?"
"저절로 굴러온 것이라면 횡재수인데 누가 그걸 포기하겠냐구요. 더구나 우리는 항상 용돈이 궁한 편이거든요."
"그렇다고 가져가도 된다면 너무 한 겁니다. 혹시 주은 사람 있거든 돌려주세요. 지금 곤란하다면…."

박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말끝을 얼버무리려 했다. 이때 돈을 잃어버린 정숙이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빈지갑을 흔들며 말했다.
"선생님, 종례시간 전까지 분명히 있었어요, 잠시 교실 밖엘 나갔다 온 사이에 없어졌다구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구요. 도둑맞은 거라구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제 지갑이 이렇게 열려 있어요."
박 선생은 더욱 난처해진 표정으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일이 평소에도 자주 생기나요?"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색이 된 박 선생은 답답하여 오히려 학생들에게 묻고 있었다.
돈을 잃어버린 정숙이는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오해하실 거예요. 제가 그 돈을 모두 다른데다 쓰고 핑계를 댄다고 야단을 치실 게 분명해요."
박 선생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보이는 현실이 두려웠던 것일까? 자신의 고교시절이 언뜻 떠올랐다. 그때엔 선생님들이 직접 학생들을 문초하였다.
''모두 일어나 손을 머리위에 얹고 책상 옆으로 정렬하라. 그리고 분단장들은 뒤에서부터 책상 속, 가방, 그리고 온 몸을 샅샅이 수색하라!''

이렇게 가방을 뒤지고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 돈을 찾겠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다. 몸수색을 당하던 우리들은 모두 불쾌했었다. 결국 적발된 학우는 그 후 학교에선 볼 수 없었고.
학생들을 믿지 못해 그렇게 다짜고짜 몸수색을 집행했던 그 추억의 선생님은 학생들의 순진한 마음에 개운치 않는 상처만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서로 믿을게 못 된다는 것만 가르쳤던 것이었다. 그런 모습은 교직을 독재자의 권위로 전락케 했고 범죄를 쫓아가는 형사로 변질케 했으며 결국은 타율도덕형의 인성을 양성하는데 일조하는 결과만 얻었을 뿐이었다. 성숙한 민주의식(자율도덕율)을 가르쳐야할 책임은 전문직책자인 교사에게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돈을 훔쳐간 학생을 찾아낼 마땅한 방법도 없질 않는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급박해졌다. 눈을 감은 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교실이 법당인 듯, 학생들이 부처인 듯하였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는 불제자였기에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불성의 삶이 되기를 오로지 갈망해 왔던 그였다. 학생들은 조용해졌고 놀라는 눈으로 그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잠시 교사의 전문성 진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문성은 일반성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에 책임이 따르는 성질의 것이며, 그 책임의 한계인 평가(척도)기준을 전문분야가 할 수 있는 최대반경지점에 매김으로서 전문성의 본질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특히 교직은 ''인성교육''에 있어 높은 신뢰도가 요구되어지는 전문직이다. 이에 교사는 일반성과 다른 적극적인 사고의 틀을 갖추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가정''의 학부모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역할 수행에 따른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기에 한시가 바쁜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하며, ''일반사회''라고 하는 삶의 현장 역시 인성교육의 비전문성 현상 자체이며 이미 인성교육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오염이 녹아있는, 문자 그대로 ''일반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과 이러한 ''사회''를 향해 ''인성교육''이라는 ''선의지(善意志)의 전문교육''을 ''함께 책임지자''는 교사의 요구는 교사의 근본 마음자리를 외면하는 것이며, ''인성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터득한 전문가로서의 교사들이 해야 할 합당한 행위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 될 것이다.

학생의 잘됨은 교사 덕분이고 잘못됨은 ''가정탓, 사회탓''이라는 비열한 공식이 교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면 교사의 정체성은 단순지식만을 주입하는 지배적인 아만(我慢)의 산물에 불과한 것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학부모는 교사의 경제생활을 책임져 주기로 하고, 교사는 그들의 귀한 자녀들을 맡아 사회인성교육에 책임져 주기로 함으로서 교사에게 전문성에 대한 책임이 부여되는 사회계약적인 관계가 성립된 것과 다름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간의 도덕의지를 결정하는 것이 양심의 작용이라고 볼 때 이성적 사회계약상의 책임 자체를 부정하고 책임을 최소화 내지 전가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달고 자기합리화에 몰입하는 행위는 양심 도태행위이며 도덕적 변별력을 상실한 부도덕한 해법의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내탓할 줄 모르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자기합리화를 지저분하게 모색하고 강구하는 책임전가형 인격이 교사의 통념적 본래의지라고 하면 이는 인간의 도덕적 미학의 완성을 추구하는 공교육 본령에 대한 배반이다. 교사가 속마음에서 가정탓, 사회탓으로 돌리며 위선자의 길로 일관하겠다면 학생이 배울 도덕성도 그와 같은 위선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활연(豁然)한 모습을 통해 지각변환(地覺變還)이 있기를 바란다면 나의 잘못된 판단일까? 아무튼 박 선생의 얘기를 계속해야겠다.


지금 학생들 앞에 고통스러운 그에게는 돈을 도둑맞은 학생을 동정함이 우선이 아니었다. 도둑맞은 그 돈은 얼마이든 당장에 대신하여도 될 것이었다.(그는 그날 정숙이에게 10만원을 주었다. 이 학생에 대한 교사의 신뢰감이었다.) 그러나 도둑질한 제자의 ''길 잃은 양심''은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다는 무거운 현실에 직면하여 온몸으로 떨고 있는 것이었다.
교육이 미래를 위한 희망찬 준비라고 할 때 돈을 훔친 학생에게 짙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래에 대한 처연한 느낌과 선도 책임능력의 한계점을 느낀 당혹함이었다.
드디어 ''내가 범인''이라고 나서는 검은 환영(幻影)이 난현한 공포가 되어 그를 일순간에 덮쳐왔다. 급작스럽게 닦친 위압감에 떨며 얼떨결에 마음속에서 외쳐본다.

"나는 잘못이 없어! 잘못된 가정교육 탓도 있고 나쁜 걸 많이 보여주는 사회환경 탓도 있어. 난 아니야!"
공포를 벗어나려 내면의 갈등에 부딪쳐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성(魔聲)은 온몸이 소스라치게 뇌리를 할퀴듯 덤벼든다.
"학교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데? 좋은 사람 만들어 꿈을 키워주는 곳 아냐? 그런데 선생이란 것들이 너처럼 남의 탓하는 거 아주 전문적으로 좋아하더라구. 이렇게 도둑질이나 하며 당신들 탓하며 나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좋은 선생님 만나고 싶었지만, 좋게 살고싶은 내 마음 알아주는 선생님이 혹시 계실까 찾아봤지만 제탓할 줄 모르는 꼬라지들 보면 다 틀렸어.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단말야. 닮고 싶은 선생이 없더라구. 그런데 뭐? 당신의 잘못이 없다구? 야, 이 비겁한 위선자야! 당신 직업이 선생 맞아? 나는 돈 내고 사람공부하는 학생이고, 당신은 돈 받고 사람 가르치는 선생직업이 분명하잖아! 사람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건 당장 내 눈앞에서 나를 가르쳐야 할 선생이라는 직업의 당신이 분명하잖아! 이런 좀도둑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소도둑이 되겠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잘못 사는 내 인생에 대해 당신들 책임 없다는 뻔뻔한 전문직업의 양심에다가 잘못된 내 인생의 비수를 꽂아주고 말겠어."
분노하는 마성은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증오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것은 철모르는 어린 학생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이것은 자신의 위선을 향한 외침이었다. 마침내 위선의 성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둑질을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한참 만에 터진 예상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울컥''치밀어 오르는 울음 섞인 목소리였기에 학생들은 모두 놀랬다. 범접치 못할 기운이 서려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한참이나 지켜봤던 학생들이었다.
일반적인 현실감각으로서는 이해되는 않는 몽환적인 고백이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으나 박 선생은 도둑질한 이름 모를 제자 앞에 교사로서의 책임을 가식없이 고백한 것이었다.

"내가 도둑질을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야말로 그 학생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선생임을 확연히 인정하면서 힘없이 주저앉아 그 학생에 대한 속죄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도둑질을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일그러진 제자의 환영이 이제 보니 바로 자신의 진실이었음을 바로 알아듣는 소리였다. 마치(頓悟)의 게송(偈頌)인 듯, 방만(放漫)해진 교단생활에서 무디어졌던 초발심이 깨어나듯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것은 곧 자신의 법성(法聲)이었다.
사람(인격)을 가르친다면서 ''남탓''만 하는 위선자들에게 제자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리고 사회와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지식을 전수하는 강사가 있을지언정 교사는 왜 있겠는가? 여기 한 학생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단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가정에 더없이 소중한 자녀이며 귀한 인생이어야 할 한사람 비행학생의 어두운 미래징후에 대한 교육적 책임을 교사가 지지 않고 서로의 탓만으로 미룰 수는 없었기에 모두 혼자 짊어지려는 벅찬 양심이었으며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도 힘겨운 것이었다.
그의 한마디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발견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기다렸던 선생님을, 닮고 싶은 선생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용해하려는 그였다.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모은 두 손을 떼지 못하는 선생님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책임을 혼자 감당하려는 담임선생님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순진한 감정도 억제할 수 없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선생님 일어나셔요. 우리도 눈물이 나오잖아요."

3일 후에 그 수줍었던 돈이 선생님 앞으로 남몰래 찾아온 것도, 수업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는 것도, 학급성적이 오르고, 학급대항 합창경연대회에서도 2등씩이나 했다는 것... 바로 감동 받았던 학생들이 스스로 해낸 작품들이었다. 특히, 훔쳐갔던 돈이 선생님 앞으로 남몰래 찾아온 것에 대해 이 교사가 밝힘으로서 학생들의 선의지를 강화하는 본성교육(本性敎育)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훌륭한 학생의 거듭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학생들도 뜨겁게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장래에 사회적 비리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한사람의 범죄성향이 지워졌으며 모두가 본성의 빛을 촉진하는 장면이었다. 이 학생은 훌륭히 변했고 변한 그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 등 말씀 따라 뉘우침은 그때그때의 카라르시스(Katharsis)에 지나지 않으며 지속하지 않는다. 교사가 뉘우침을 보임으로써 만들어지는 창조현상이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위장하는 교사 앞에 가슴으로 뉘우치는 제자가 존재할 수없는 것은 인과법칙(因果法則)이 파동으로 전하는 호환작용(互還作用)이기 때문이다. 이제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편견도 필요 없게 되었고, 교사와 학생들의 얼굴은 태양 같은 마음으로 밝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교사의 직책신실(職責信實)에서 학생들은 장래의 직업윤리를 배우지 않았겠는가? 가정과 사회가 아무리 악스럽더라도 하루를 거의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교사의 인격에서 주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의 이 사태를 남들은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교사''라는 직업이 전문직이므로 마땅히 교사가 1차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그가 보여준 셈이었다. 직책에 대한 그러한 지조, 그러한 사랑이 일관하여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한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이 학생도 서서히 그리고 분명히 변해갈 것이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지 않는가? 교사가 학생들의 현명한 친구처럼 좋은 인적환경이 되어 주면 학생들은 반드시 환경따라 변할 것이라는 믿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의 사고를 여일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장차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대통령직을 맡든 그 무엇을 맡든 기만, 유혹과 태만에 넘어가지 않고 제 맡은 직책에 신실한 국민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꿈으로 충만해 있었음과 다름 아니다.
만일 그가 아이들의 본성(불성, 성령, 양심)을 못믿고 짜증을 내거나 주머니를 뒤지며 전문성이 없는 일반적 경향에 따라 사법적인 범인색출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인성교육에 필수요건인 신뢰감과 존경심 대신에 오로지 사제불신(師弟不信)과 단절감의 골을 더 깊게 함으로써 본성(불성, 성령, 양심)의 기(氣)를 죽이고 결국 비인성교육, 비리(非理)사회의 근원이 되는 타율형 도덕교육에 더없는 공헌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가시적(可視的) 동기부여는 학생들이 지니고 다니는 상한 감정들을 녹여 주었고 양심력이 살아있는 행복한 학급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그에게 교실은 마음을 닦는 법당이 되었고 학생은 감동을 주는 부처가 되었다. 이제 그는 가장 낮아진 섬기는 자로서 가장 넓어진 이해하는 자로서 가장 깊어진 사랑하는 자로서 환희로운 믿음의 교실역사를 지켜가게 될 것이다.
글=혜암 스님, 사진=박재완 기자 |
2010-08-27 오후 9:29: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5.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