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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부산 다음으로 불자들이 많은 전통적인 불심도시이다. 전국에서 온 수많은 불자들이 정성스럽게 쌀을 짊어지고 팔공산을 올라가 갓바위부처님을 친견하는 원력이 대구의 신심을 웅변해준다. 하지만 부산과는 달리 수행 붐이 아직 조성되지 않은 곳이 대구이기도 하다. 이런 대구 도심 한복판에 근본불교 수행도량이 생겨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남구 대명동 앞산네거리 지하철 현충로역 3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위빠사나 수행전문도량 대각사(www.daegaksa.com)가 바로 그곳. 4층 건물을 매입해 창건한 이 도심포교당의 빌딩 벽에는 ‘불교명상대학 개강’이란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진 현수막이 세로로 걸려있다.
대각사가 창건된 것은 5월 5일. 창건주는 은해사 서운암에 주석하는 법산 스님이다. 당대의 선사이자 율사인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제방 선원과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온몸으로 참선과 위빠사나를 수행한 스님은 거해 스님과 함께 한국의 1세대 위빠사나 수행자로 꼽힌다. 전국에 300여 곳의 불교교양대학이 있지만 불교명상대학이 설립된 것은 이 곳이 처음. 특히 기존 요가지도자에 비견되는 불교명상지도자의 배출이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법당과 선방, 강의실 등으로 꾸며진 4층 포교당 건물의 맨 윗층으로 올라가니, 법산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미얀마에서 가장 유명한 꽝띤(Kaung thin)차를 우려주신다. 중국 보이차와 우리나라 발효차 맛을 섞은듯한 친근한 차맛이 느껴진다. 스님을 도심포교당에서 뵈니 3년 전 은해사 서운암에서 뵈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고요한 산사에서 두문불출하며 토요일 위빠사나수행만 지도하던 스님이 대구 도심에 불교명상대학을 개설한 것은 물론 부처님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다.
“스님, 위빠사나의 정의를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를 ‘뭇 삶들의 정화를 위한,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을 향해 진리의 길을 나아가기 위한 오직 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위빠사나란 자신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잘 꿰뚫어 보고 감정의 속박과 느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수행법입니다. 이 수행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인류의 신앙을 초월한 복락의 길이며 나아가 현실적으로 보다 건전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길입니다.”
법산 스님은 대각사에 여래선원과 불교명상대학을 설립하고 7월 2일 입학식 겸 개강식을 가질 예정이다. 스님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법을 전해야 진정 내 제자이다’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며, 불교명상대학의 설립취지를 설명한다.
“부처님의 8만 4천 경전이 중생의 병에 대한 처방전이자 약방문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많이 외우고 알아서 교양을 갖춘들 수행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죠. 신앙의 왕초보로 생을 끝내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책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체험 없이는 남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경험한 만큼 남을 지도할 수 있도록 실참과 이론을 함께 교육할 계획입니다. 불교명상지도자가 배출되어 수행센터를 개설할 경우 간접적인 지도를 계속하며 지원할 생각입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스님은 교리강좌와 경전공부, 실참수행이 연결되어 선교겸수(禪敎兼修)가 이뤄지도록 불교명상대학 커리큘럼을 짰다. <대념처경> <금강경> <아비담마> <청정도론>등의 경전에서 위빠사나 수행과 직결되는 부분을 집중 지도하고, 수행을 체험하는 코스도 일반인들의 시간과 근기에 맞게 다양화 했다. 불교명상 체험코스는 3개월 과정, 지도자 코스는 2년 과정으로 진행된다. 매주 화ㆍ목요일은 오전(10시~12시 30분) 오후(7시~9시 30분)반으로 나눠 사띠(sati: 마음챙김) 요가와 위빠사나를 실참하고, 토요일은 은해사 서운암에서 수행을 한다. 기초교리와 경전강좌는 매주 금요일 진행한다. 특히 다른 위빠사나선원과는 달리 사띠 요가를 가르쳐 심신을 함께 닦는 점이 장점이다. 사띠 요가란 어떤 것이며, 왜 필요한 것일까?
“사띠 요가란 행주좌와의 일체 움직임 속에서 깊은 마음 챙김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여 집중력을 증진시키고, 나아가 사념(사량ㆍ분별심)이 없는 깨어있음을 키워서 결국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요가로 몸을 다스리며 위빠사나 명상으로 마음을 길들여 헐떡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올해 세수 65세. 적지 않은 연세에 불사를 일으킨 법산 스님은 마지막 회향하는 심정으로 도심수행도량을 열게 되었다고 말한다. 화ㆍ목ㆍ금요일은 대각사 여래선원에 나와서 수행자들을 지도하지만 나머지 요일은 영천 은해사 서운암에서 홀로 정진한다.
“수행자라면 임종할 때 자기가 날 잡아서 가고 올 정도는 돼야지요. 자진열반할 때는 조용한 산사가 좋겠지요.”
법산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고 ‘이 길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고 오직 한 길을 걸어왔다. 스님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그런데 이 행복은 개인의 것만이 아닌 모든 이와 함께하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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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살려면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남에게 사랑 받으려면 남을 사랑하고, 뺨을 맞으려면 남의 뺨을 때리면 됩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행복해지려면 이타행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타행(利他行)이 선이라면 이자행(利自行)은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善)이 창조와 발전의 에너지라면, 악은 파괴와 방해의 에너지입니다. 악을 행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선을 행하면 뒤로 넘어지면 홍시가 입에 떨어지고 앞으로 넘어져도 돈을 줍습니다. 악행하는 사람들은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고 살고, 선행하는 사람은 ‘다행이야, 다행이야’ 하며 삽니다.”
법산 스님은 악이 탐진치 3독에 중독된 상태라면, 선은 청정한 마음이자 구세주라고 말한다. 구세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청정심’이란 말이다. 큰 선업을 쌓으면 작은 악업들은 영향력을 잃게 된다. 마치 100와트 전구 아래서는 작은 촛불의 빛이 보이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1촉짜리 선업을 짓고도 100와트짜리 광명과 행복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만 한다.
대각사 여래선원과 불교명상대학 불사와 함께 법산 스님은 법보시에도 심혈을 쏟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 33일>과 <중도선> <그대들도 나처럼 이 길로 오라> 등을 저술한 스님은 10여 년간 직접 편집해서 발행한 <금강경의 주장자, 빈손도 내려놔라>를 <깨달음으로 가는 금강경>(가제)으로 수정ㆍ보완해 출판할 예정이다. 장면마다 일화와 삽화를 넣어 보는 경전, 이해하기 쉬운 경전으로 만든 <…빈손도 내려놔라>(전 2권)는 <금강경>을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해설한 역작으로 수행승들에게 입소문을 탄 방대한 분량의 역작이다. 이 책을 직접 저술한 까닭이 궁금했다.
“10여년 전 도올 김용옥씨가 <금강경>을 강의할 때, 절집안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을 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금강경>은 스님들이 강의해야 하는데, 이건 직무유기다’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때부터 <금강경>을 해설하며 4년 동안 남방불교에서 관련 삽화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생에 제가 짊어진 걸망을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 다가옵니다. 내가 가고 없어도 이 책이 남아 법보시가 된다면 다행이겠지요.”
법산 스님의 <금강경> 해설은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그리고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해설되어 대승권 스님들의 해설과는 차이점이 적지 않다. 한 예로 스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4상(相: 관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상(我相)은 인도 브라만의 아트만 사상에서 비롯된 ‘나는 영원하다’라는 자아불멸론적 견해이며, 인상(人相)은 자아를 부정하는 대신 ‘몸과 마음인 개체가 참나’라는 순세파 유물론에서 비롯된 개아 단멸론적 견해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나는 운명론적으로 이미 정해진 생명체이다’하는 사명파의 존재 숙명론적 견해이며, 수자상(壽者相)은 자이나교의 영혼불멸론적 견해입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로막는 이 네 가지 관념은 고정불변의 자기중심적인 인식상태가 견고하게 바왕가(生命識: 7식과 8식을 합친 개념의 識) 내부에 깊이 각인된 상태의 고정관념을 말합니다.”
법산 스님에 따르면 바왕가의 본질을 알아서 4상을 타파해야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왕가란 무엇일까?
“바왕가란 업의 기록과 기억을 저장하는 자료실인 동시에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생명선, 생명의 뿌리를 말해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순간이나마 마음에 비춰진 모든 인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이것은 삶과 죽음, 재생이 있게 하는 존재의 씨앗이며 뿌리입니다. 저장된 바왕가식은 다음 탄생을 잇는 ‘재생의식’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고정불변적인 자아관념 즉, ‘나(我)’에 대한 자아의식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바왕가식의 성향과 이생에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며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쌓아온 관념들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구속해서 부리는 고삐가 되어버렸다. 법산 스님은 우리가 해야 할 수행은 먼저 이 끈질긴 자아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한다. 부처님께서 ‘놓아라, 버려라, 비워라’ 하고 이르시는 바도 이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며, <금강경>의 가르침도 바로 이 에고(Ego)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설명이다.
“‘내가 이것을 버리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 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 자아관념을 놓아버리면 실재를 볼 수 있는 가슴이 열리게 됩니다. 집착하지 않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칭찬이나 비난, 사랑과 증오,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해 등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왜 여기 나를 두고 무아(無我)라고 했을까? 수행자가 나라고 알고 믿는 내가 나 아닌 줄을 깨달으면 그때는 진정한 부처자리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에고의식을 비우고 무아가 되는 것은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향해 가는 가장 중요한 뗏목과 같다. 그리고 에고의식을 비우기 위해서는 먼저 바왕가식을 비우는 것이 관건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길들여 조복시키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의 방법은 놀랍게도 위빠사나와 선(禪)이 일치한다. 바로 사량ㆍ분별심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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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어지럽히는 망상은 여섯 감각기관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갈애와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마음은 대상을 만나는 찰나 분별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인식되는 대상이 좋거나, 싫거나,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무기(無記) 가운데 하나는 선별하게 되는 거죠. 인식된 대상에서 생각이라는 대상으로 바뀌어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은 대상 즉, 부분적인 것 외에는 ‘있음 그대로’의 실재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되는 사념의 확산은 ‘좋다, 나쁘다’, ‘내가 남보다 낫다, 못하다’ 라고 하는 여러 가지 분별심이나 아만심, 두려움과 욕망, 불안함, 산란심으로 번져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감각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受), 대상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行)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법산 스님은 ‘고통이나 그 조건(업)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해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작업인 수행을 지속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스님은 특히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바른 노력, 마음 집중, 마음 챙김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싫다, 좋다’ 하는 분별의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량ㆍ분별심이 약화되면 될 수록 욕망의 사슬도 느슨해지고 행동반경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져, 탐진치 3독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종의 3조 승찬 대사가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심을 쉴지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버리면 통연히 명백하리라(但莫憎愛 洞然明白)’라 한 법문과 완전히 같은 맥락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 온갖 시비ㆍ분별에서 벗어나 무아ㆍ무심의 삶을 사는 것이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전해온 여래선(如來禪)의 핵심이다. 여래선이란 조사선과 간화선이 성립되기 이전, 달마 대사로부터 5조홍인 대사까지 전해진 <능가경> 위주의 달마선(達摩禪)과 같다. 이른 바, ‘마음을 보는 한 가지 법이 일체 행을 총섭한다(觀心一法 總攝諸行)’고 하는 관심법, 즉 마음을 주시하는 심념처(心念處) 위주의 위빠사나이다. 간화(看話)니 묵조(默照)니 지관(止觀)이니 하며 구분하지만, 그 어떤 수행법이든 관법(觀法)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부처님 수행법이다.
이러한 알아차림 수행이 깊어지면 어떤 경지가 전개될까? 법산 스님은 지속적인 정진으로 보다 향상된 경계에 진입하면 할수록 하찮은 즐거움과 감각적인 쾌락의 추구와 세간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된다고 한다.
“지혜의 정도가 보다 완벽한 경계까지 향상되면 그때 ‘욕망의 버림이 행복이다. 감각적인 즐거움을 뛰어넘는 것이 참 행복이다.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이치를 보는 것이 닙바나(열반)이다’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수행법인들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는 것 하나라도 생활속에서 실행해 보는 것이 참으로 귀한 세상이다. 인터넷의 바다에는 온갖 경전 해설과 수행정보가 넘쳐나지만 정작 수행하는 불자들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날로 알음알이만 치성해 지는 세상. 움직이고 머무는 가운데 배운 바를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록 갈등과 경쟁이 줄어들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사회가 이뤄지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부처님이 말씀한 ‘일상생활 속의 마음 챙김’ 방법을 찬찬히 되새김질하며 일상속의 수행을 다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비구들이여! 몸의 드나듦에 마음을 모아 관찰하여 바르게 알아차리느니라. 앞이나 뒤를 볼 때, 몸을 구부리고 펼 때, 옷을 입거나 발우를 지닐 때, 먹고 마시고 맛볼 때, 마음을 모아 바르게 알아차리느니라. 걷거나 서 있을 때, 앉거나 누워 있을 때, 잠들거나 잠이 깰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자연의 소리 등 일체를 바르게 알아차리느니라. 수행자는 이와 같이 머무느니라.”(대념처경)
일체의 물질적 정신적 관찰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사량ㆍ분별하지 않고 수용하며 사는 삶이 깨어있는 삶이다. 대주 선사가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일체처에 무심한 것이 해탈’이라 한 법어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법산 스님의 말씀을 통해, 여래선과 조사선이 둘이 아님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법산(붓다피야) 스님은
1946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70년 범어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일타 스님을 은사로 모신 후 불국사, 정혜사, 은해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며 89년부터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서 다년간 정진했다. 현재 은해사 서운암과 대구 대각사 여래선원에서 재가자를 지도하고 있다. <금강경의 주장자, 빈손도 내려놔라> <중도선> <그대들도 나처럼 이 길로 오라> <위빠사나 수행법 33일> 등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