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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먹는 사람도 있지.”
열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아버님께 들은 말입니다. 이웃 마을에 잔치가 있었는데, 그때는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준비를 했지요. 남정네들이 물지게를 지거나 물동이를 들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 잔치를 준비하면서 아버님께서 물지게를 지셨던 겁니다. 그걸 보신 어머님이 심하게 아버님을 나무라셨는데 아버님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 한마디를 하셨던 겁니다. 옆에서 그 말씀을 들은 나는 뭔지 모를 감동에 젖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행자시절 내 가슴에서 다시 피어났습니다.
나라도 절도 가난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불편했고 그만큼 몸이 고달프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님의 그 낮은 목소리가 무엇보다 큰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지극하게 기도하게 했습니다. 별로 한 일도 없이 고희(古稀)를 맞은 지금까지도 그 말씀은 내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6.25 전쟁이 나서 다들 피난을 갔는데, 나도 어찌하다보니 마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외삼촌이 내 손을 잡고 어느 절로 갔어요. 성주사라는 절인데 거기 외종조부가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에도 외종조부 되시는 분은 스님이셨습니다.
“네 어머니가 8세 때 봤다. 그런데 지금 그 아들이 14세 나이로 이렇게 찾아 왔구나.”
스님은 매우 반가워하시며 절에 머물며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가 맨질한 스님의 모습, 정갈한 방, 향 내음 진한 법당 등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이라 고령산 보광사로 소풍을 가보긴했지만 그렇게 절집에서 먹고 자는 일을 처음 겪으며 어리둥절했지요. 어느 날 스님의 방에서 잡지 하나를 보게 됐습니다.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태국 군인들이 보던 잡지였습니다. 그 책에서 사진 하나를 보았는데, 국왕과 어느 스님이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사진 속의 스님이 국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 계시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스님, 국왕보다 스님이 더 높은 분인가요?”
“높다마다. 스님이 왕보다야 높지.”
“그럼 스님은 어떤 사람이 되는가요. 아무나 스님이 될 수 있나요?”
“아무렴. 아무나 될 수 있지. 법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단다.”
소풍 때나 절에 가보고 지나가는 탁발승을 본 게 전부였던 나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학교행사 때 교장선생님과 함께 단상에 앉으시는 군수님이나 경찰서장님만 ‘높은 사람’인 줄 알았고, 군수나 서장이 되고 싶었던 시골아이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마음이 왈칵 쏟아져 까닭모를 설렘이 가슴을 오랫동안 채웠습니다. 물론 그것이 출가의 결정적인 인연이 되었지요. 외삼촌을 따라가서 인사를 드린 바로 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그 스님은 뒷날 조계종 제 3대 4대 6대 종정을 지내신 고암(古庵 1899~1988) 스님이셨습니다. 참으로 인자하시고 열정적으로 수행하시던 승단의 귀감(龜鑑)이셨지요.
해인사에서 공양간 일을 소임 맡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소변을 커다란 나무통에 받았어요. 거름으로 쓰려고 말입니다. 큰스님께서 해우소 곁에 있는 그 소변통에서 뭔가를 열심히 건져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다가가서 보니까 오줌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파리를 살려주시려고 싸리 꼬챙이를 휘젖고 계셨습니다. 나는 공양간에 파리가 많아서 그놈들을 몰살시키려고 산에서 파리버섯을 따다가 보리밥에 짓이겨 널어놓았는데 큰스님께서는 오줌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려고 애쓰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나는 밝고 찬란한 자비의 덩어리, 생불(生佛)을 보았습니다. 그 감동은 참으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어요. 참된 가르침은 큰 목소리나 유창한 말재주가 아니라 진실한 행동이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6년간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했고 4년을 그 강원에서 중강 노릇을 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큰 법문을 공부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범어사에서 행자시절을 보낸 시간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갱두, 채공, 강사스님 시자, 관음전 기도 등의 소임을 번갈아 하면서 숨 쉴 틈 없이 살았던 그 1년이 그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가장 고생스러울 때 가장 큰 공부를 하는 겁니다. 가장 힘든 시간이 가장 큰 힘을 주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 시간에 저에게 힘을 준 것은 ‘준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먹는 사람도 있다’는 아버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린 나에게 그 고된 생활을 버틸 신심이나 원력이 따로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님의 그 말씀과 은사 스님의 자상하면서도 단호한 가르침이 저를 버티게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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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安心)하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하시지요? 조심(操心)하라는 말도, 관심(觀心)을 가지라는 말도, 용심(用心)을 잘 하라는 말도 더러 들으실 겁니다. 자 이렇게 마음 심(心)자가 들어가는 말들이 있는데, 불교가 가르치는 핵심이 여기 다 들어 있어요. 경전을 공부하고 선수행을 하는 궁극의 목적이 뭡니까? 마음을 편안케 하여 번뇌가 없는 것, 절대고요[寂滅]에 이르러 청정한 자성을 밝히고 유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 장황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마음을 편하게[安心]하여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교의 궁극입니다.
달마를 찾아간 혜가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호소했고 달마는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독촉했습니다. 팔뚝을 잘라 바칠 정도로 구도심이 간절했던 혜가는 ‘마음은 본래 불안한 것이 아니라 편안한 것’임을 깨우치는 순간 달마의 법을 이어 받았잖습니까?
안심이 되어야 부처도 보이고 극락도 보입니다. 안심을 이루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이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감독하고 코치하는 겁니다. 물론 뛰는 선수도 자신이지요. 선수와 감독과 코치를 동시에 하는 겁니다. 마음을 바깥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자기 안에서 늘 단속하는 것이 조심입니다. 번뇌와 망상, 혼침과 산란은 바늘구멍보다 작은 틈으로도 찾아들어옵니다. 그렇게 들어와서는 황소가 드나들 만큼 커다란 구멍을 내지요. 그 커다란 구멍을 통해 드나드는 것은 모두가 불안덩어리입니다. 조심이 없으면 안심도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조심은 어떻게 하느냐? 관심을 잘 하면 됩니다. 자신을 살펴보는 겁니다. 자신의 발아래 뱀이 있는지 쇳조각이 있는지는 오직 자신이 살펴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자리를 살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가 쳐들어 왔는지 산란이 발동하는지 스스로 살피고 제어하고 단속할 일입니다. 그게 관심입니다. 헐떡거림을 쉬지 못하고 발아래를 살피지 못하는데서 불행이 닥쳐오는 겁니다. 관심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용심도 잘 하게 됩니다. 누구나 선심과 악심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용심의 중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쓰는데 튼튼한 기둥이 있다면 헐떡거리고 엎치락뒤치락 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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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안심이 중요하니 안심을 하려면 조심해야 하고 조심을 잘 하려면 관심을 잘하고 용심을 잘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어떤 순서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순서도 없고 앞뒤도 높낮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 네 가지의 마음이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과거생이 궁금하여 현생을 망칠 수 있겠습니까? 내생이 궁금하여 현생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현재도 없는 겁니다. 현재는 어느새 과거가 되고 미래는 또 어느새 현재입니다. 어디에 과거가 있고 현재와 미래가 있겠습니까? 느끼는 순간 따지는 순간 이미 다 놓쳐버립니다.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자리에서 마주치는 현재가 진정한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 현전일념(現前一念)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밝은 마음 지금의 기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뭘 따지려고 하지 말고 안심하면 됩니다. 조심하면 됩니다. 바르게 관심하고 제대로 용심하면 됩니다. 한다는 마음조차 없이 말입니다. 뭘 한다는 것은 존재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니, 거기에는 상(相)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금강경>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공한 것임을 가르친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바로 그렇게, 현생에 안심하고 조심하고 관심하고 용심하는 도리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는 말이 있지요? 무심해 보이고 초탈해 보이는 사람, 그러면서도 늘 자비롭고 이해심이 넓은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안심이 되는 사람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심하기 위해 조심하고 관심과 용심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완전한 부처는 아니더라도 가운데 토막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현생에 가운데 토막이 되면 다음 생에는 온몸이 부처를 이루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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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것이 인과입니다. 누구도 어떤 행위도 벗어날 수 없는 진리가 인과법입니다. ‘불락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의 이야기로 유명한 화두, 황벽선사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인과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으니 지금의 마음이 곧 인이고 과입니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겁니다.
해인사 강원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대구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 시절엔 해인사에서 대구가 상당히 먼 길이었고 별 일없이 다닐 수도 없는 길이었지요. 그래서 누가 나간다면 학용품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도 여러 사람의 부탁을 받고 돈을 챙겨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어디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타시는데 함지박 가득 미꾸라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글바글 거품을 내는 미꾸라지들의 운명은 뻔했습니다. 대구 인근의 화원장터에서 팔리면 반드시 국솥으로 들어갈 것이었습니다.
나는 주머니 속의 돈을 생각했습니다. 강원의 여러 스님들이 물건을 사다달라며 주신 돈이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에 앞서 자꾸만 미꾸라지들의 운명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겁니다. 결국 옆의 신도님을 시켜 값을 알아보고 기사님에게 위천 다리 중간에 차를 세우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다리 난간에서 한 동이의 미꾸라지들을 방생했습니다. 아마 몇 마리는 다이빙이 서툴러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 생명들을 살렸다는 기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즐거웠으니 강원에 돌아와 들은 핀잔과 원성은 꽃잎을 스치는 봄바람이었지요. 그 후에 여러 차례 방생법회를 다녔지만, 위천 다리 복판에서 혼자 감행했던 방생보다 기쁜 방생은 없었습니다.
모든 업은 마음에 새겨집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에 악업을 새깁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선업을 새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에 어떤 인을 새겨 어떤 과를 예약하는지 스스로 관심하고 조심하시가 바랍니다. 그런 생활이 무르익으면 번뇌 망상이 쳐들어 올 틈이 없는 삶, 안심하고 사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보광스님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보광 스님은 해인사 강원을 나와 4년 동안 중강을 지냈고 해인사 선원 등에서 16하안거를 성만했다. 해인사 재무 및 규정국장 소임과 용탑선원장을 역임했다. 부산에 전등사를 창건, 도시포교에 매진하며 (재)대각회 이사, 부산서구 사암연합회장, 부산불교교육원장 등을 지냈다.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과 부산시장 사회봉사공로 표창을 받았다. 현재는 해인사총동문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