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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참회기도도량으로 유명한 삼각산 도선사에는 어느 절 보다 포교, 복지에 능한 스님들이 많다. 이는 수좌출신이면서도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선 후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며 조계종 종무행정의 기틀을 다진 청담(靑潭, 1902~1971) 스님의 가풍(家風) 탓이리라.
도선사 한주 동광 스님도 그러한 분이다.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과 불교방송 이사, 청담학원 이사장, 중앙승가대 이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청담장학문화재단 이사장, 중앙종회 의원, 생명나눔실천회 이사 소임을 맡아 포교 및 복지ㆍ인재불사에 헌신하고 있다. 활발한 전법활동을 펼치면서도 언제나 고요한 미소를 잃지 않는 동광 스님은 은사인 청담 스님처럼 하심과 자비행이 몸에 배인 스님이다. 2001년 조주 선사가 법을 편 중국 하북성 조주 관음원에 동행한 인연으로 9년만에 도선사를 찾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동광 스님의 처소에 다가서니, 스님이 문을 열어놓고 계신다.
“나는 선지식도 아니고, 법문할 것도 없는데 뭐하러 오셨어요?”
“청담 스님 문하에서 인욕, 하심공부를 몸으로 익힌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1942년 서울 시내의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난 동광 스님은 어린 시절, 부친의 고향인 상주에서 자랐다. 상주중, 상주농고를 다닐 때 불교학생회 ‘룸비니’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룸비니 총재인 청담 스님을 이때 알게 됐다. <금강경>을 비롯한 경전에도 밝았던 부친과 칠순이 넘어서도 <천수경> 독송과 염불을 쉬지 않고 봉정암 순례까지 하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다른 일 보다는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청담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은 중앙대에 진학했으나 가정 형편과 몸이 좋지 않아 휴학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를 통해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이었던 청담 스님을 뵙게 된 것. 1970년 3월, 조계사 총무원장실에서 첫 인사를 드리자, 청담 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니, 뭐하러 왔나?”
“부처님 깨달음을 알아서 동방에 빛을 발하겠습니다.”
그러자 청담 스님은 “니, 밥 못 먹어서 밥 얻어 먹으러 온 거 아니지?”하시며, ‘동방의 빛’이란 뜻을 지닌 동광(東光)이란 법명을 지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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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웠던 청담 스님은 매사에 강직했으며, 제자들에게는 하심과 검소함, 부지런함을 말없이 보여준 엄격한 분이었다. 총무원장 재임시에도 새벽예불과 108배를 거르지 않을 정도로 솔선수범 한 스님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단 정화와 불교 중흥을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일생을 회향했다. 열반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대중의 가슴에 하심, 인욕, 정진 바라밀의 수범으로 기억되어 자비보살, 인욕보살로 존경받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특히 청담 스님은 중생의 무명을 밝히기 위해 가지가지의 설법으로 긴 법문을 하기로 유명했다. 서 너 시간 법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한 사람이라도 경청하는 사람이 있으면심지어 밤을 세워가며 설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칠순의 고령에도 열반하는 순간까지 법문을 쉬지 않은 청담 스님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였다.
제자들이나 초청하는 인사들이 설법을 중단하시길 청하면, “아닙니다. 어디 사람에게만 법문을 하나요. 삼라만상 우주법계에다 하지요.”라고 하셨단다.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송장 앞에서도 법문을 했으며, 설법하다가 소변 보러 갔다 올 수 없다시며 기저귀를 차고 법문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스님의 중생구제의 원력을 엿보게 한다.
동광 스님은 1971년 11월 15일 청담 스님이 입적하기 1주일전 대구, 안동, 부산까지 스님을 마지막으로 모시면서 스승의 유훈과도 같은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산 범어사에서 열리는 국제보살계 수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청담 스님은 처음으로 열린 조계종 중진스님 재교육에 참석했다. 50여 명이 참석한 화계사 법당에서 청담 스님은 “앞으로 스님들이 공부를 안 하면 30~50년 후에 사회인들의 지탄을 받을 것”이라며, 불교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에게 미래지향적인 수행과 포교를 당부했다.
이날 오후, 동화사 주지 경산 스님 진산식에 참석하러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다. 동광 스님이 초를 사서 밤길을 밝히며 산길을 걷는데, 청담 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되었으니 처음 마음 먹은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를 전하는 훌륭한 불제자가 되라”고 당부했다. 이윽고,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 수곽(水廓)에 이르자 남은 초를 끄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초를 밝혀 놓으라고 하셨다. 사소한듯 보이는 이타행에 동광 스님은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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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청담 스님은 안동교육대학 학생회의 초청으로 법문을 하러 가게 되었다. 교통편이 불편해서 약속시간을 경우 맞춰서 법문을 시작했는데, 대학생들이 크게 환희심을 내자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려 3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른 체 쉬지 않고 법문했다.
안동에서 잠을 잔 후 그 다음날 새벽, 범어사 국제보살계 수계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갔다. 대만의 고승 백성(白聖) 스님과 베트남의 챠오 스님 등 외국 고승 20명과 국내 고승 30여명이 대거 참석한 3일간의 국제행사를 무사히 거행하자, 정부에서는 당시 제일 큰 군함으로 각국 고승들을 모시고 한산섬까지 유람을 시켜주었다. 바닷바람이 불자 대부분의 스님들이 실내로 들어갔는데, 청담 스님은 홀로 주장자를 짚고 군함 말미에서 바닷물을 응시하며 수중중생을 위해 염불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동광 스님은 큰 감명을 받았다.
“물고기들에게까지 법문하시는 모습을 보고 스님께서 만 중생을 위해 법을 전하는 구나. ‘이것이 도인의 자비심이로구나’ 하고 감탄했지요.”
국제보살계 수계식을 봉행하고 상경한 후 3일만에 청담 스님이 입적하시자, 동광 스님은 스승을 시봉한 시간들이 마치 부처님께서 길에서 열반하셨듯이 마지막 전법의 여정에서 유훈을 남긴 것이었음을 실감했다. 특히 지방으로 가시기 며칠 전, 밤을 세워 ‘光明(광명)’이란 휘호를 쓰시고 서명 위에 ‘般涅槃(반열반)’이란 글자를 써 당신의 열반을 암시했다는 것이 동광 스님이 증언이다.
“그날따라 갈아놓은 먹이 남으면 종이를 준비하고, 종이가 남으면 먹을 또 갈도록 해서 먹과 종이가 딱 들어맞을 때까지 ‘광명’이란 글자를 쓰셔서 어느덧 날이 새고 말았습니다. 제가 먹을 갈면서 ‘글씨가 쇠바퀴 굴러가듯 굉장한 힘이 느껴집니다.’하니 스님께서 무척 좋아하셨지요.”
은사에 대한 동광 스님의 그리움과 존경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른다. 이제 화제를 돌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질문을 던졌다.
“1998년 도선사 주지 재임 때 <마음의 자유를 찾아서>란 법문집을 내신 걸로 압니다. 미망의 골짜기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제시하셨는데, 스님은 어느 정도 자유를 찾아서 누리시는지요?”
“걸림 없이 살기 위해 계속 공부를 하는 거죠. 대자유인이신 부처님 처럼 자유롭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이제는 나이도 들어서인지 욕심 내지 않고 조용히 부처님 말씀 전하면서 회향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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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청담장학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장학사업으로 인재양성과 포교사업을 펼치고 계신데, 이러한 불사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지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국민학교 시절, 미군이 학교에 주둔해 책ㆍ걸상을 화롯불의 장작으로 불태운 적이 있었어요. 교실이 없어지자 마을 이곳저곳에서 공부하던 기억이 나요. 중학교 때는 집안이 가난해 공납금을 내지 못해서 교실에서 여러 번 쫒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큰스님이 인재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청소년포교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모습을 보고, 문도 스님들과 도선사 신도들이 힘을 모아 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진주산업대 전신인 진주공립농업학교 12회 졸업생인 청담 대종사의 탄신 1백주기를 맞아 설립된 진주산업대 청담사상연구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동광 스님은 그동안 청담장학문화재단을 통해 학술세미나와 연구지 발간, 장학사업 등을 후원해 왔다. 청담대종사선사비를 진주산업대 교정에 세우는 등 스승의 유지를 선양하기 위한 다양한 불사를 주도하거나 후원해 온 동광 스님은 문도회와 신도들의 힘을 모아 진주에 (가칭)청담스님기념관 설립을 발원하고 있다. 지역민 누구나 와서 공연과 법회, 복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종합불교센터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40년전, 동광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국민들의 불심은 오늘날 보다 깊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요즘,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 하며 고통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해결방안은 없는 것일까?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사상적, 경제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분열되어 고통 받는 근본 이유는 우리 국민의 공업(共業)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은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누구나 참회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늘 지방 어디를 가시든 하루도 빼놓지 않고 회중시계의 나침반으로 도선사 석불전을 향해 몸소 108배를 하셨지요.”
좌선할 때 우뚝한 모양으로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잇다 해서 ‘올연(兀然) 수좌’란 별명을 얻은 청담 스님은 당시 만주에 주석하던 경허 스님의 수제자 수월 스님을 친견해 지도ㆍ점검을 받은 열혈 수좌였다. 성철 스님과 함께 봉암사결사를 주도하는 등 치열한 구도과정을 거쳐 1934년 수덕사 만공 선사와의 선문답으로 깨침을 인가 받은 선사이기도 하다. 그런 분이 입적하는 순간까지 108참회를 한 것은 개인의 공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국민의 업장소멸과 행복을 기원한 보살행이었다는 것이 동광 스님의 견해다.
좌선과 염불과 같은 수행과 함께 삶속에서 보살행을 펼치며 업장을 소멸하고 공덕을 쌓는 복혜쌍수(福慧雙修)의 중요성을 스승으로부터 배운 동광 스님은 신도들에게 수시로 복짓는(作福) 일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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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 ‘부처님께서 해인삼매 가운데서(能仁海印三昧中) 뜻대로 부사의함을 나타내고(繁出如意不思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니(雨寶益生滿虛空)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衆生隨器得利益)’라는 글이 나옵니다. 여래의 자비는 평등해서 차별이 없는데, 중생이 받아들이는 그 과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며 불평하는 사람들은 중생심으로 부처님의 평등한 복전(福田)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밭은 하나인데 씨앗이 무엇이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싹을 틔우는 것과 같습니다. 탐진치를 버리고 오직 부처님께 귀의하는 진실한 불자가 돼야 합니다.”
동광 스님은 복을 짓고 받는 것을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비유해 거듭 설명했다.
“에너지는 일정하며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물리법칙이 있듯이, 복을 받기만 하고 짓지 않으면 업이 되고 맙니다. 늘 물질적, 정신적으로 욕심을 비우고 살면 복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남긴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정신은 필요 없는 탐진치를 버리고 좋은 생각은 가지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행(言行) 그대로가 법문이었던 스승의 유훈 그대로 일하고 포교하는 과정에서 시비분별을 초월한 평상심(平常心)을 실현하기 노력한 동광 스님은 1984년 전후, 죽음의 문턱을 넘나 들며 불ㆍ보살의 가피를 체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을 때 결핵을 심하게 앓아서 수행도 제대로 못했는데, 어느 날 아침 예불을 마친 후 코와 입으로 혈담이 쏟아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죽는가 보다 했는데, 1주일 후 퇴원한 뒤 6개월만에 ‘음성’ 판정이 나와 부처님 가피력을 확신하게 되었지요. 기간을 정해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소임을 보면서도 새벽예불을 빠뜨리지 않고, 아침에 경전 한 구절이라도 읽고 살아온 공덕이 아닌가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생사를 몸으로 겪은 후 삶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됐고, 생사가 본래 없는 성품자리에 대한 믿음도 더욱 깊어졌다. 이미 고등학생 시절 <금강경>을 100독하고,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과 보조국사의 어록을 볼 정도로 선(禪)과 깊은 인연을 맺은 동광 스님은 요즘도 <임제록>과 <금강경오가해>를 수시로 독송하며 생활속의 마음공부를 놓지 않고 있다.
“은사스님은 좌선만을 강조하지 않고 일거수 일투족이 모범이 되는 동중선(動中禪)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방에 앉아서 보면 ‘골짜기 물이 대숲을 지나니 물이 푸르고, 바람이 꽃을 스치니 향기롭다’고 하는 시어가 실감이 납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게 공부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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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 스님은 <육조단경>에 나오는 혜능 스님의 게송, 즉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菩提本無樹), 마음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이 묻으랴(何處惹塵埃)’에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화두 삼아 동중선을 닦아왔다. 여러 불교 잡지에 기고해 온 선(禪)과 관련한 기고문들은 오랫동안 ‘본래무일물’을 삶속에서 쓰고 누려온 체험에서 나온 안목을 밝힌 글들이다.
청담 스님이 입적하기 직전 마지막 1년을 시봉하던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동광 스님이 출가생활을 돌아본 소감은 어떨까?
“하루 해가 지면 다리 뻗고 통곡한다던 고인들의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큰스님 유지를 잇고자 애는 썼지만 작은 힘 밖에 안된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건강을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고 용맹정진 하지 못한 회한(悔恨)이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들이나 시민들에게 전할 말씀이 계신다면…?”
“모든 분들이 항상 편안한 가운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니까 각박해지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다 보니 개인과 사회구성원, 국가간의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동광 스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즐겁다고 한다. “스님을 뵈면 주위가 환해집니다.”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동광 스님은 환희심이 나고 더욱 사람들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고 한다. 늘 스스로 하심하면서 자비로운 얼굴, 조용한 언행으로 주변을 밝고 행복하게 하는 구도자는 다름 아닌 대승보살이다. 수행을 생활 밖에서, 산속에서만 찾으려 하는 수행자는 ‘평상심이 도’라고 한 조사스님들의 법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무문 선사는 <무문관>에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이렇게 노래했다.
“봄에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이 있으며, 여름은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눈이 있다. 만일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호시절(好時節)이다.”
동광 스님은
1942년 서울 출생. 1970년 도선사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 71년 석주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74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도선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불교방송 이사, 청담학원 이사장, 중앙승가대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도선사 한주, 청담장학문화재단이사장, 중앙종회 의원, 생명나눔실천회 이사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