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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질서 속에 날마다 자신을 담금질 할 때 ‘명품 인생’
파주출판단지와 교하신도시를 품은 심학산. 해발고도 194m의 낮은 산이지만 5곳의 등산로와 근래 조성된 둘레길을 찾는 ‘뚜벅이 족’들이 늘고 있다. 잘 정비된 정상에서는 일산과 파주지역이 한 눈에 조망되고 한강의 유연한 흐름과 임진강 유역, 오두산 전망대와 그 너머 북한 지역의 산자락까지 볼 수 있는 요지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낙조는 사시사철 아름답다.
15년 전, 그러니까 파주 출판단지와 신도시가 형성되지 않았던 당시의 심학산은 여느 야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이 다니는 곳에 길이 나고 길은 삶의 애환으로 다져진다. 심학산에 난 길이 그렇다. 삶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하여, 육신과 정신 건강을 위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하여 길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더 행복한 내일을 갈망한다.
20만 교하 신도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책 코스 심학산의 길들, 그 중심에 약천사가 있다. 등산로나 둘레길의 중간에 위치해 심학산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이 약천사를 거치게 된다. 웅장한 지장보전에서는 기도가 그치지 않고, 2008년 10월에 남북통일과 일체중생의 병고치유를 발원하며 모신 높이 13m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의 엄숙하면서도 다정한 상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희망을 선물한다.
약천사는 심학산에 길이 만들어 지는 시간을 따라 천천히 일구어진 도량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기술과 자본이 투입되어 뚝딱뚝딱 지어지는 아파트 같은 절이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좀 쑥스러운 얘기일지는 몰라도, 목탁 하나로 지은 절입니다.”
약천사 불사를 주도한 허정(虛定) 스님이 ‘목탁 하나로’ 절을 지은 내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야산 기슭의 자그마한 법당에 인연이 닿아 무작정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정진했어요. 정진이란 게 다른 것도 아니었지요. 하루 3번 예불 모시고, 각종 기도 법회와 인연 따라 들어오는 불공에 정성을 들인 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절을 비우지 않고 늘 자리를 지키며 누가 찾아와도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 전부입니다. 뭐 특별한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절지키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소위 말하는 ‘큰손’에 의지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인연불자들의 정성이 모이고 모여 이렇게 도량이 이루어졌고,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있으니 다행이지요.”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고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출가하여 절집에서 가장 처음 배우게 되는 글이 ‘초발심자경문’이다. 허정 스님은 요즘도 45년 전에 보았던 ‘초발심자경문’을 수시로 읽는다. 누가 경전을 권해 달라고 해도 ‘초발심자경문’을 먼저 읽으라고 권한다. 거기 첫출발의 마음에서 오늘의 의미를 길어 올리자는 뜻이다. 근본정신이 흩어지면 만사가 헛일 아닌가. 허정 스님은 “절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법을 베푸는 본분사에 매진했기에 여법한 도량이 일구어 진 것이다.
“지식평등화 시대에 교리로 포교를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들 지식의 측면에서 아는 것이 많고 공부도 열심히 하잖습니까? 신문 방송 등의 미디어나 출판물도 생활화 되어 있고요. 그렇다면 지식이 아닌 신행과 신앙의 측면에서 승속이 소통하고 절과 가정이라는 공간이 소통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스님이 절이라는 공간에서 대중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포교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 비우지 않고 늘 깨어 있는 스님이 있을 때 도량도 깨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스님이 주인 노릇을 잘해야 부처님 가르침도 제대로 전해지는데 현실적으로 안쪽의 주인보다는 바깥의 물상에 이끌려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망하게 생각과 마음이 바빠서 그런 겁니다.”
절의 주인 노릇에 철저한 것, 그것이 허정 스님의 포교 노하우라고 이해됐다. 절은 공간의 의미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를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삶의 피로를 달래려고 나선 산책길에서 만난 장엄한 약사여래 앞에서 마음의 병고를 치유 받고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가슴가득 담아 오듯 절은 시공을 초월한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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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부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유구한 세월동안 많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것도 조금만 공부하면 알 수 있어요. 누가 뭘 깨달았다고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큰 것을 깨달았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 펼쳐 놓으신 길, 그 길을 잘 가는 것입니다. 여법(如法)하게, 가르침대로 말입니다. 선사는 선사의 길을 율사는 율사의 길을 강사는 강사의 길을 가야하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길이 있거든요. 깨닫겠다고 거기 목숨 거는 것이 대안이 아니고 깨달음의 행동을 하는 순간순간의 삶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절대수행자가 되거나 절대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극단이 아니라 튼튼한 근본에서 이루어지는 단단한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알아준다고 합시다. 세상에 영어 잘 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닌데 왜 알아줍니까? 스님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에요. 스님이라는 틀 위에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지 영어를 잘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에서 절대성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떠들어도 허구에 불과합니다. 뿌리가 두터워야 가지가 무성하거든요(根厚枝盛).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북돋우는 역할을 할 때 깨달음의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법신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고 북돋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니 더 이상은 다른 곳에서 헤매지 말아야 합니다.”
허정 스님은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아우름’을 유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별과 시비를 유발하는 것은 종교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분별과 시비까지도 아울러 보듬는 넓은 도량이 될 때 지혜와 자비의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은 언제나 캄캄절벽일 뿐.
인아산붕처(人我山崩處) 무위도자고(無爲道自高)
범유하심자(凡有下心者) 만복자귀의(萬福自歸依)
나를 버리면 스스로 도가 높아지고 내가 없는 가운데 하심하면 만복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 내 것이라고 하는데 대한 집착이 먼저 무너져야 합니다. 제대로 하심과 겸손하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먼저 버려야 하는 겁니다. 내가 없어야 진짜 하심이고 겸손이니, 그 자리에 만복이 깃든다고 한 것입니다.”
아우름의 지혜가 부족할 때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세상을 다스리는 제도가 미비하면 문물이 혼탁해지는 것처럼 개인의 지혜가 부족하면 아울러 보듬을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종교는 세상을 향해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발달과 개방지향적인 사회구조에 따라 종교집단도 세상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고 더러 편승하기도 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불교계는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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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저하게 연기의 도리 속에서 세상을 파악하고 행위를 결정지어야 하는 겁니다. 입으로는 숱하게 연기적 질서를 얘기하면서 하는 행위는 그에서 벗어나 사바세상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으니 스스로 타들어가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떼거리로 밀어붙이는 세상이라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기형화 될수록 나는 바르게 가야한다는 이념이 확고해야 하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을 수 없고 궁극이 있을 수 없는데, 더러 목적의식은 간 곳 없고 방법에 낙착되어 본질을 잃는 것을 봅니다.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정신은 꼭 한 벌의 옷과 바리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의일발도 소유일 수 있고 만의만발도 무소유일수 있습니다. 사적(私的)인 입장에서는 10원도 소유이고 공적(公的)인 개념에서 일억 원도 무소유일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정월에 필요한 것이 있고 유월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어디에 박혀 있느냐하는 것이니 진정한 무소유정신이 늘 성성적적 해야 합니다. 대만의 성운 스님이 한 번의 법회를 위해 대단히 화려하게 장엄하는 법석을 두고 누가 잘못됐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장엄의 근본 의미가 숭고하기 때문 아닙니까?”
세상은 계산에 의해 돌아간다. 계산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셈으로 따져서는 안 될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셈을 버려야 한다. 허정 스님은 셈을 하면 안 되는 관계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부부’를 꼽는다.
“부부는 셈을 떠난 한 덩어리입니다.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듬어야 하는 관계 입니다. 물질에 대한 셈이 서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거기서 갈등이 생기면 가정이 곤란 해 지는 겁니다. 부부간에 셈이 없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사회가 건강해지고 국가 발전 인류평화라는 거창한 소망들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근간(根幹)을 살찌우면 지말(枝末)은 풍성해 집니다. 가정이라는 근간, 부부라는 근간이 튼튼해야 합니다. 셈이 없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집을 버려야 하니 그게 생활 속에서의 수행입니다. <신심명>의 첫 대목 ‘지도무난(至道無難) 유염간택(唯嫌揀擇)’의 도리를 잘 알잖아요? 결국, 나(我)를 없애는 공부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연기의 질서에 거스르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겁니다. 거기서 모든 공부가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인과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했다. 뿌리가 부실한데 화려한 꽃과 잘 익은 과일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고 작은 노력으로 큰 결과를 기대한다. 중생심에는 연기의 질서를 순종하기보다는 욕망의 성취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을 벗어던지는 길은 무엇일까? 허정 스님은 “참회(懺悔)하면 진리를 향해 가는 연기의 길이 보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독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 바른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명검은 수없이 달구고 두드리는 가운데 벼리어 지는 것이다. 한 두 번의 담금질로 잘 드는 칼이 만들어질 수 없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을 달구고 식히고 두드리는 정진이 될 때 명품인생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심학산의 5월은 황홀지경이다. 도량의 안과 밖을 구별할 것도 없이 꽃들이 가득 피어 있고 잎들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며 울렁울렁 초록의 파도를 치고 있다. 그 초록을 배경으로 앉아계시는 약사여래께서는 가까이로 신도시 공사현장을 살피시고 멀리로는 오두산 전망대 넘어 개성 송악산 자락을 바라보고 계신다. 기도도량의 너른 마당에 꽃그늘이 황홀하다.
허정 스님은...
1965년 동화사로 출가, 의현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6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2년 뒤 법주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동화사 교무국장, 대구 용연사 주지, 조계사 주지, 서울 북아현동 금련사 주지(창건), 조계종포교원 연수부장, 경찰청 경승 등을 지냈다. 1995년부터 파주 심학산 약천사에서 도량 불사를 하며 포교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