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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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요놈’을 마음챙김 하라
[선지식을 찾아서] 태안사 원각선원장 일오 스님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인 9~10세기, 당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한 선승들이 귀국해 개산한 선종의 아홉 산문을 일컫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산간 오지에서 선농일치(禪農一致)를 기치로 낮에 밭 갈고 밤에 참선에 매진한 당시 선승들의 드높은 수도정신은 민초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구산선문의 전개는 교학불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훗날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수행전통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됐다.

현재 구산선문 가운데 선종 사찰로서 명맥을 있고 있는 곳은 홍척 국사가 남원군 산내면에 개산한 실상산문, 혜철 국사가 곡성군 곡성면에 개산한 동리산문, 도현 국사가 문경군 가은면에 개산한 희양산문이 있다. 이 중 희양산문과 실상산문의 맥을 이은 봉암사와 실상사는 오늘날도 많은 수좌들과 신도들이 찾는 거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리산문의 맥을 이은 태안사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수행도량이다.

4월 26일, 9년 만에 다시 찾은 태안사(주지 각일)의 호젓한 산길은 여전히 비포장 도로로 남아있었다. 840번 지방도로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약 2km 정도의 길은 화려하지는 않지는 담백한 아름다움으로 걷기 좋은 숲길이다. 녹음이 우거진 이 길을 올라 계곡을 건너는 능파각을 지나 태안사 일주문을 지나면 원형으로 조성한 큰 연못이 눈을 시원하게 적신다.

신라 경덕왕 원년(724년)에 혜철 선사가 창건한 태안사는 인근의 화엄사와 송광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의 거찰이었지만 지금은 선원 위주로 운영되는 조용한 수행도량이 되었다. 태안사 하면 떠오르는 선지식은 청화 스님(1924~2003). 1985년 태안사 주지를 맡은 청화 스님은 절을 중창하고 염불선을 선양하며 동리산문의 선풍을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종무소에서 잠시 머문 후, 15분 정도 소요되는 산길을 따라 명적암에 올랐다. 이곳에 주석하며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는 원각선원 선원장 일오 스님은 2004년 서울 상도동 보문사에서 열린 7인 선사 법회에서 처음 대중 앞에 등장해 선법문을 펼쳐 많은 수행자들에게 환희심을 준 선승이다. 65년 출가한 이래 오로지 제방선원에서 수행에만 매진해 온 일오 스님은 초기불교를 바탕으로 한 자상한 선법문으로 난해한 선(禪)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스님은 대중설법 보다는 선원에서 수좌들과 함께 정진하며 먼 길을 찾아오는 구도자들을 상대로 길을 안내하는 역할에 자족해 왔다. 이번 방문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는 여러 불자들의 뜻을 모아 그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대신 전달하고 싶은 여망을 담아 이뤄진 셈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동리산에 운무가 고풍스럽게 깔린 명적암에서 일오 스님은 보이차를 내어주며 불청객을 맞는다.
“천안함 침몰 사고로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인데, 내가 무슨 법문을 한다는 게 맞지 않은 것 같은데….”
인터뷰를 거듭 사양하며 차나 마시고 가라는 일오 스님에게 이런 때일수록 스님들의 안심(安心)법문이 더욱 절실하다며 간곡히 법문을 청하니, 스님은 이윽고 웃으며 응락하신다.

-일반 불자들은 격외도리(格外道理)를 담은 큰스님들의 선법문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초기불교를 곁들이며 선 도리를 설법해 불자들의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특히 연기법을 강조하시는 데,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격외도리를 아무리 잘 설하고 선문답을 아무리 기상천외하게 하더라도 무심(無心)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해종사(知解宗師)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 나를 본다’고 했듯이, 연기란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이기에 꼭 알아야 합니다. 연기의 근본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으로, 견성과 무아의 도리를 깨닫는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는 일체의 존재가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이라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줄 알고 집착하면서 ‘나’ 본위로 살다 보니 탐진치에 끄달려 허우적 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를 미진축망(迷眞逐妄) 또는 ‘미기축물(迷己逐物)’이라고 합니다. 망상에 빠져 진리를 잃고 헤맨다, 물질인 대상에 정신이 팔려 자기를 잃고 헤맨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현상계가 실체가 없음이 마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如夢幻泡影] 줄 알게 되면 속지 않게 됩니다.”



-연기를 공 도리로 풀이한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연기의 도리는 팔만대장경의 근본 뜻을 함축한 반야심경 260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특히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와 액을 넘어섰다고 하는 법문이 핵심입니다. 오온은 바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인데, 이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육근(六根: 주관)이 육경(六境: 객관)을 접촉해서 육식(六識: 인식작용)이 일어난 것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고, 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양 살아갑니다. 이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연기설법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것이 환상이요 꿈인 줄 아는 것이 해탈의 시작입니다.”

-무아나 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보살의 만행을 소홀히 할 가능성도 높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해놓았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이해가 안 되니까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줄 몰라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연기 즉 공’이라 하니까 물질이 다 없어진 상태가 공인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물질이 나툰 색 이대로가 곧 공인 것입니다. 인연화합 되어 눈앞에 펼쳐진 현상세계 그대로가 공이란 말입니다. 무아, 공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정불변의 실체도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를 말하면서 부득이 진아(眞我)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간화선이 경전적인 근거가 없는 수행법이라며 비판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두 수행법의 공통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초기불교나 대승불교가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표현만 다를뿐인데, 잘못 보니까 오해를 하고 서로 비방하는 업을 짓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띠(sati) 즉, 마음챙김은 내 본래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고 잘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간화선으로 말하자면 성성적적(惺惺寂寂: 고요하고도 또렷한 마음상태)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이니 주인공이니, 한물건이니, 참나라고 하는 말은 찾아야 할 그 무엇이 따로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붙인 명칭에 불과합니다. ‘사띠’라는 것은 항상 드러나 있는 보고 듣고 말하고 감각하는 이 마음자리를 마음챙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요놈’을 바로 보라는 말입니다. 임제 스님이 ‘다만,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 라고 한, ‘눈앞에 벌거벗은 한 놈’입니다. 눈앞에 드러난 이 마음을 늘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찰나찰나 생멸을 거듭하는 ‘거짓 나’를 마음챙김함으로써 육근ㆍ육진으로부터 벗어난 참나로 홀로서기 하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근본을 바로 보면 다 옳은데,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해 진리인 달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 이후에 늘 위빠사나로 마음챙김을 하셨다는데, 참선 할 때 잠든 이후의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깊이 잠이 든 때도 한결 같아야 한다는 숙면일여(熟眠一如)를 말하지만, 숙면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깨어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잠이 든 상태에서 공부한다기 보다는, 평소의 마음챙김이 한결같아서 잠들기 직전 알아차림이 잘 가다듬어 있다면 숙면일여가 가능합니다. 잠들기 전에 화두가 잘 들려있으면, 잠이 깨어 눈을 뜨면 잠 들기 전 화두 들던 상태가 그대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에고(ego)의식이 사라진 ‘무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횡행하는 것 같습니다. 무아와 깨달음, 해탈의 상관성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백장 선사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나서 육근과 육진을 멀리 벗어났도다[靈光獨耀 逈脫根塵]. 그 본체가 참되고 영원함을 드러내니 문자에 구애되지 않네[體露眞常 不拘文字].’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마음에 거리낄 것이나, 막고 방해 할 것이 없다는 뜻의 ‘심무가애(心無?碍)’로 표현합니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뉜 현상세계에서 벗어났을 때 무아를 체득하고 대무심의 경지에 듭니다. 무아라 해서 아무 것도 없고 목석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아도 봄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는 묘용의 세계입니다. 부설 거사가 열반송에서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이 없고[目無所見無分別]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도 끊겼네[耳聽無聲絶是非] 분별과 시비일랑 모두 놓아버리고[分別是非都放下] 다만 마음부처를 보아 스스로 귀의할 뿐[但看心佛自歸依]’이라고 설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육조 스님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하셨지만, ‘오유일물(吾有一物: 나에게 한물건이 있으니…)’이라고도 표현하셨지요. 정반대의 표현 같지만 무아, 무심의 상태는 이렇게 중도적인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무아와 무심의 이치를 잘 알면 실제 참선공부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남악회양 스님이 처음 육조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하는 질문에 막혀 8년만에 도를 깨치고 다시 돌아와 이렇게 답합니다. ‘설사 한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남악회양 스님은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修證卽不無] 물들지 않습니다[汚染卽不得]’하고 답했습니다. 본래부처, 참나라고 하는 그 자리는 한물건도 없어서 본래 깨끗해서 오염시킬 수 없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들일래야 물들일 수 없는 이 자리가 바로 ‘심무가애’, ‘영식독로’한 자리입니다. 텅 빈 허공과 같이 실체가 없지만 불생불멸하며 있는 그대로 여여한 세계인 것입니다.”



-영식(靈識)이 독로한 상태를 진아라고 부른다면, 이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상(我相)이 떨어져 나간, 영식이 독로한 무아, 무심의 경계는 하나의 본래심이 오롯이 드러난 경지로서 텅빈 공에만 머무는 게 아닙니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그 자리를 맛 보면 ‘참 진(眞)’자를 붙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자칫, 영원한 실체로서의 아트만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진아는 무아, 연기사상이 뒷받침되어 그 어떠한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대무심의 경지에서는 무아니, 진아니 하는 어떠한 견해도 없어야 합니다. 깨달았다는 한 생각, 하나의 상(相)이 떠오른다면 이미 어긋난 것입니다. 대무심의 경지는 바보나 목석과 같은 경계가 아니라 태양 보다 더 밝고 생생한 지혜광명을 쓰면서도 씀이 없는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경계인 것입니다.”

일오 스님은 <상윳따니까야(장아함) 우다나경(자설경)>의 한 부분을 소개하며, 초기불교에서도 대승불교의 본래심, 불생불멸 하는 열반의 세계를 드러낸 법문이 적지 않다고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 윤회)을 여의고, 대상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일오 스님은 초기경전을 열람하다 보면, 말끝에 단박 깨닫는[言下大悟] 일이 부처님 당시나 조사스님 회상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다고 하신다. 이는 자성이 본래청정해서 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다.
“직하(直下)에 무심하면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육조 스님은 그래서 ‘보리의 자성이 본래청정 하니, 다만 이 마음을 그대로 쓰고 살면 부처를 이룬다[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고 하셨지요. 일체의 명색(名色)이 끊어져 대무심지에 들면 똑같이 보고 듣고 감각하며 살지만 늘 여여해서 대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모든 법문이 마음 병 다스리는 약이라 했습니다. ‘나에게 마음이 없는 데, 무슨 약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물론, 최상승 근기에 맞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에서는 닦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업습(業習)을 지닌 중생의 입장에서는 수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1965년 고향인 함양 상연대에서 출가한 일오 스님은 당대의 숨은 도인이었던 월인 스님(1999년 입적)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고 행자시절부터 줄곧 참선에만 매진해 왔다. 은사스님을 따라 월명암, 백장암, 화엄사 탑전, 사천 구룡사 등에서 수행한 일오 스님은 75년 경 해인사 조사전에서 공부할 때 화두에 몰입할 수 있었고, 77년 현풍 도성암에서 화두가 순일한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롯한 마음자리 하나가 나타나자 수마와 혼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랫동안 좌선해도 피곤하지 않고 가뿐했으며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여러 선원에서 정진한 스님은 5년전 태안사 원각선원으로 와서 정진하던 중 영식(靈識)이 독로(獨露)한 경계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래부처’의 도리를 자각한 수행자는 현실적인 삶과 수행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까. 이에 대해 스님은 달마 스님의 법문에 자세한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능가선(<능가경>을 바탕으로 심법을 깨닫는 달마선을 말함), 조사선, 간화선을 비롯해 염불선, 위빠사나와 같은 방편들이 모두 본래청정심, 그 자리에 들기 위한 훌륭한 방편입니다. 달마 대사는 <이입사행론>에서 마음의 이치를 깨달은 후 네 가지로 실천수행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 과거의 업보임을 알고 인욕하는 보원행(報寃行), 좋고 나쁜 인연이 닥치더라도 모두 내가 짓고 받는 것임을 알아 마음에 동요가 없는 수연행(隨緣行), 밖으로 도를 찾아 헤매지 않고 본래 이 마음에 구족해 있음을 알고 닦는 무소구행(無所求行), 자성청정의 이법에 따라 적당한 6바라밀행을 닦는 칭법행(稱法行)이 그것입니다.”


선(禪)의 도리를 깨닫기 전이나 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지금 이대로 드러난 본래마음으로 머무는 바 없이 6바라밀을 닦는 데 수행의 핵심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300여년 전 문을 동리산문의 가풍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며 하산하는 길을 봄비가 축복하는 것만 같다. 빗소리가 마치, 마조 스님의 말씀처럼 들린다.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를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도 같다.”


일오(一悟) 스님

1943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65년 월인 스님을 은사로 함양 상연대에서 출가했다. 71년 화엄사에서 도광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73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77년 강진 만덕사, 92년 사천 구룡사에서 잠시 주지 소임을 살았지만 행자시절부터 줄곧 전국의 선방에서 안거에만 매진해 왔다. 부안 월명암 사성선원장을 맡은 후 5년전부터 곡성 태안사 원각선원장을 맡아 선풍 진작에 앞장서고 있다.

글ㆍ사진= 김성우(작가, 본지 논설위원) | buddhapia5@hanmail.net
2010-07-07 오후 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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