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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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언행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수행
[선지식을 찾아서] 밀양 무이정사 거부 스님
첫째는 수행의 과제에 충실함이요
둘째는 자기의 일에 충실함이요
셋째는 묵언을 통해 감정을 조절함이요



십수년 전 전통강원(현 승가대학)에서 학인스님들이 배운다는 경전이 궁금해 한문과 한글을 대조해가며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치문> <서장> <도서> <절요> <선요>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기신론> <화엄경>등을 번역하고 주석을 단 경전의 표지에는 한결같이 ‘강사 거부(巨芙) 역주(譯註)’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 방대한 강원 교재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스님이 어떤 분일까.

청명인 4월 5일 식목일 이른 아침, 경남 밀양 무이정사를 찾았다. 거부 스님께 일 배를 올리니, 스님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사명대사 춘계 향사(享祀) 이야기부터 꺼내신다.

“올해는 사명대사 입적 400주기를 맞이하는 뜻 깊은 해로 호국성지 표충사에서는 4월 17일 오전 10시 제533회 ‘호국대성 사명성사 춘계향사’를 봉행합니다. 임란병화(壬亂兵火 1592년)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신 3대 성사(서산ㆍ사명ㆍ기허 대사)의 호국충혼을 추모하고 선양하는 불사이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거부 스님이 사명대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까지 수덕사 강주를 맡았던 거부 스님은 건강이 악화돼 물 좋고 공기 맑은 밀양 표충사에서 휴양 겸 수행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창고 문을 열어보니 목판이 넘어져 있는데, 목판의 간지에는 ‘사명당 문집’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1612년도에 판각된 목판이니 무려 400여 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 대학생 두 명과 함께 목판을 소금물로 씻어 살펴보니 하나도 분실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의 어록이 잇달아 출간되자, 세간의 일부 석학들이 “사명대사는 수도자이기보다는 전쟁을 지휘한 장군이어서 서산대사의 법맥이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이에 거부 스님은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집>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사해와 자세히 연구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허집>에는 서산대사가 애제자인 사명대사를 아끼는 시가 몇 수나 들어있었다. 송광사판 <선귀귀감>에는 사명대사가 발문을 썼을 정도로 사제지간의 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특히 선암사판 <불조원류>에는 서산대사가 편기언양 선사보다 빠른 상수(上首)제자 즉, 수제자로 확실히 기록되어 있었다.

아울러 세간에서는 사명대사가 살생을 많이 한 장군이어서 과연 법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이 남긴 일화는 생사를 초월한 도인이 아니고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 거부 스님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중 울산 서생포에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만났을 때의 문답이다.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
“없다. 보물은 일본에 있다.”
“무슨 소리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그대 머리를 보배로 보고 있으니, 이는 일본에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적장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 담대한 할(喝)을 날릴 정도의 부동심(不動心)을 지닌 사명대사를 추모하는 표충비(表忠碑)가 세워진 것은 1742년. 그 이후 비석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니, 세인들은 이것이 사명대사의 도력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명대사에 대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는 거부 스님은 세간에 잘못 알려진 관련 기록을 정정하기도 했다. 그 첫째는, 12세부터 17세까지 다양한 출가년도가 이설로 회자되는 사명대사의 법랍 문제. 스님은 사명 대사의 제자인 해안 스님이 기록한 행장 등을 검토한 결과 사명대사는 15세에 출가해서 67세에 입적했으며 법랍이 53세 3개월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현재 학계에서 쓰고 있는 ‘사명당(泗溟堂)’의 ‘콧물 사(泗)’는 ‘넉 사(四)’자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역대 조사 가운데 서산 대사를 특히 존경한다는 거부 스님은 수행법 역시 서산 대사의 선교양종존(禪敎兩宗尊)의 가르침을 따른다. 거부 스님은 학인들을 가르칠 때도 철저히 선교겸수의 전통을 따랐다. 낮에 경전을 공부하고 울력을 하더라도 새벽이나 밤에는 반드시 일정 시간의 좌선을 하도록 가르쳤다. 아울러 스님은 성철 스님이 강조한 ‘단박 깨침’ 즉 돈오(頓悟)보다는 차츰 공부해서 깨닫는 점오(漸悟)를 강조한다. 하루아침에 확철대오한 육조 혜능 선사와 같은 대근기가 아니라면 돈오는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차근차근 성실하게 공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선가귀감>에 ‘고지학불자(古之學佛者)는 비불지언(非佛之言)이면 불언(不言)하고 비불지행(非佛之行)이면 불행야(不行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언행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고, 늘 부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부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온 거부 스님의 평상시 수행은 어떠할까. 경전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독송하는 일이 본업인 스님은 틈틈이 좌선하며 ‘이뭣고?’ 화두를 드는 이외에 포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고 하신다.

“범어사에서 강사 생활을 할 때는 이틀에 한 번 금정산 정상을 등산했습니다. 수덕사에서 강주소임을 볼 때는 덕숭산을 매일 2시간씩 올랐지요. 표충사 한주로 살 때나 여기 무이정사에 머물 때는 제약산(해발 1180m)의 사자평 갈대밭까지 매일 낮 2~3시간 정도 포행을 합니다.”



포행 중에는 <금강경>을 외우거나 주력을 한다. 수행자가 할 일 없이 등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부 스님은 포행 중에 대중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히 강원에서 학인들을 가르칠 때는 대중이 모두 편안하게 공부해서 인천의 사표가 되길 발원하곤 했다. 오랫동안 <금강경>을 독경하면서 느낀 경험담을 여쭈니, 이런 말씀을 하신다.

“재가자들이 수행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수행의 경계는 스승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경계를 느끼거나 심중에 변화가 생겼을 때 자랑삼아 공개하면 더 이상 진보하기 어렵습니다. 수행자에게는 꼭 필요한 3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수행의 과제에 충실함이요, 자기 일에 충실함이요, 묵언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거부 스님은 <금강경>을 공부할 때는 오가해(五家解)를 반드시 봐야 한다며, 재가자들이 동성상응(同聲相應)하고 동기상구(同氣相求)하는 도리 즉,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구하는 도리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낸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다시 돌아오듯이, 사회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뱉은 만큼 자업자득이 되어 돌아오니,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의식을 갖고 더불어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야보 선사는 ‘물 맑으면 구슬 빛이 나고, 구름 걷히면 달이 더욱 밝다’[水澄珠瑩 雲散月明]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먼저 즐겁고 깨끗해야 남에게 자비와 봉사와 같은 광명을 비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의 핵심을 나타낸 게송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유명한 금강경 4구게 등이 있지만 스님은 의외로 말할 수 없다며 대신 이런 말씀을 하신다.

“경전에는 부처님 명호만 불러도 지대한 공덕이 있다고 설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부처님 말씀과 행동을 따라서 실천하는 공덕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거부 스님은 15년 여간 강원 교재를 직접 번역하고 주를 달아 책을 발간한 후 이를 전국 강원에 법보시하는 불사를 쉬지 않고 해왔다. 당시에는 탄허 스님이 토를 단 한문 경전이 주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강원마다 교재가 다르고 책도 없어서 학인들이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인들의 애로사항을 직접 보고 교재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이어지자 스님은 강사료를 모아 강원 교재를 일일이 만들어 법보시하는 보살행을 남몰래 해왔다. 강의하기도 바쁜 시간을 쪼개 방대한 경전을 번역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출판 비용을 직접 마련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사중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몇몇 신도들의 보시와 자비를 들여 출간한 책들의 무려 70%나 법보시를 해왔다니 스님의 원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거부 스님이 강의와 번역, 책 법보시 등을 한결 같이 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어사 강원에서 공부할 당시 남몰래 법당에서 올린 서원 때문이라 한다. 스님은 강원에 입학하자마자, 삼천배를 하며 남몰래 서원을 하게 된다.

“그날 밤 일불제자(一佛弟子)의 이념으로 도제양성(徒弟養成)을 서원하고 평생 공찰의 주지소임을 맡지 않는 등 명예를 쫒지 않고 상좌를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스님은 그날 밤 서원한 자신과의 약속을 한 시도 어긴 적이 없다. 절 주지를 맡을 기회도 있었고, 은사로 모시려는 후학들이 적지 않았지만 스님은 한사코 사양하고 강백(講伯)으로서의 외길만을 걷고 있다.

1996년 수덕사에 처음으로 강원을 개설할 때의 일이다. 1995년 강원을 개설해 달라는 수덕사의 요청이 있었지만, 인연 없는 곳이라 여겨 가지 않았다가 은사 도광 스님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사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받은 거부 스님은 故 법장 스님이 주지로 재임하던 시절인 96년 2월부터 수덕사 학인스님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하고 7월 1일 강원 개원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고전 번역자가 없어서 큰 일입니다. 번역도 포교라는 사명감으로 남이 손을 대기 힘든 경전과 어록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현재 송광사판 <선가귀감>과 <경허집>을 번역 중인 거부 스님은 서산대사의 <도가귀감>과 <유가귀감>도 번역할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하실 말씀을 부탁드리자, 거부 스님은 앞에서 한 이야기가 전부라며 부처님 닮아가는 삶을 살자고 거듭 당부한다.
“자연은 가식이 없어서, 농부가 키운 대로 보답을 해요. 자연과 더불어 욕심 내지 않고 사는 것이 부처님 언행을 따르는 수행입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 됩시다.”

거부 스님은
1944년 대구의 명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홀어머니의 입적으로 삶의 무상(無常)을 느낀 후 도광(道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법명은 거부(巨芙), 강호(講號)는 무이(無二). 뛰어난 한학 실력을 지닌 스님은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고 94년까지 범어사 강원의 강사를 맡았다. 96년 수덕사 승가대학을 개원한 스님은 <치문>부터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주해(註解)를 달아 승가대학 교재로 완간했다. 1986년 은사스님이 유언으로 남긴 일차 종단정화일지를 탈고해 <한국불교승단정화사>를 발간했으며, 2005년 <사명대사어록>을 번역 출간했다. 스님은 이듬해 <사명대사 난중어록>을, 2009년 말 <서산대사어록>을 번역 출간해 불교계와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현재 밀양 무이정사에서 역경과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글ㆍ사진= 김성우(작가ㆍ본지 논설위원) | buddhapia5@hanmail.net
2010-06-05 오후 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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