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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시절은 이미 3월 중순이건만 ‘폭설’이 산야를 뒤덮었고 길도 끊어버렸다. 부득이 선지식을 뵙기로 한 날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루 늦게 달려갔다. 삼각산은 하얀 눈을 덮고 있었지만 지리산은 그렇지 않았다. 더러 응달 계곡에 잔설이 흩날리고 있을 뿐 웅혼한 산맥은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은 나라 안에서 소문난 매화나무가 많은 곳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기개가 서린 남명매와 하즙 선생의 원정매, 통정공 회백과 회중 형제의 손길을 600년이 넘도록 지키고 있는 정당매가 대표적이다. 산청에 접어드니 길가에 서 있는 매화나무들은 이미 실눈을 뜬 몽우리를 보여주었다. 향기도 코끝을 건드리는 듯했다.
선지식은 매화다. 찬 공기를 안으로 들이마시고 온갖 세파를 속살로 섭수시키며 우주의 진리를 응결한 선지식은 이른 봄의 매화처럼 은은하고 감미로운 법향을 세상에 내뿜기 때문이다. 청결한 코를 가진 사람은 그 법향에 감읍하고 삶의 지침을 진리의 세계로 향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선지식의 처소를 찾아갔다.
높은 산 옆에는 낮은 산이 있고 낮은 산 둘레에 마을이 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집과 집을 이어주는 크고 작은 길들이 손금처럼 펼쳐지고 그 구석구석을 내비게이션이 안내한다. 선지식은 가급적 깊은 곳에 정좌하려 하지만 매화 향기 같은 법향을 그리워하는 중생들은 용케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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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암성원(覺庵性元 83) 스님은 산비탈 감나무 과수원 언저리에 새로 지은 절집에서 원고를 쓰고 있었다. 집필삼매에 빠진 스님의 귀한 시간을 침범했다.
“3년 전에 책이라고는 처음으로 만들어 본 <수행, 날개를 달다>(현대불교)에서 다 못한 말들이 있고 보완해야 할 것도 있어서 새로 원고를 다듬고 있어요.”
<수행 날개를 달다>는 <능엄경>에 바탕한 수행법을 안내하는 책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원 스님은 이 책의 편집후기에서 “오늘 내가 한사코 이 글을 남기고자 함은 이 길을 몰라 방황하는 납자들을 위함이고, 후일에 다시 이 사바에 돌아와서 이 수행요서를 젊어서 빨리 접해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다음 생의 공부를 위해 금생에 한 권의 책을 묶었다는 토로는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가를 절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이 대목이 여러 인터넷 카페에 게시되어 있다.
-어떤 내용을 보완하시는 겁니까?
<능엄경>을 반야의 관점에서 풀이한 것이 많아 경의 근본을 편협하게 해버린 것이 안타까워요. <달마보전>과 소능선사의 <진수어록> 등을 낱낱이 참고해 ‘능엄선’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갖지 않은 사람이 수행을 잘하여 도를 이룬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일체가 공(空)하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모르고 공으로 이해해 버리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보다 근원적으로 따져보고 명확한 길을 밝혀야 합니다. 내가 깨우쳐 부처를 이루었다면 그대로 보여주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옛 스승들의 말씀을 들어 증거를 해야지요. 이러한 가르침이 전해 오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이걸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감사할 일입니다.
-수행의 궁극이 깨달음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수행에 대한 방법론과 정신자세 등은 사람마다 이해하는 차원이 다르고 접근하는 방법도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체가 공하다는 이미 내려진 ‘결론’에 미리 도취되기보다 어떻게 수행하여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화두선이 보여준 모순들이 다 이런데서 온 것입니다. 반야의 강성함에 얽매여 각각의 경전이 가지고 있는 종지를 뭉개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궁극이라고 말하는 진성(眞性, 본래의 마음)을 어떻게 영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의 몸과 진성이 본래는 둘이 아니지만, 중생은 업식과 습기로 인해 진성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자,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수정이 되어 열 달 동안 태(胎) 속에 있던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 그 정수리가 말랑말랑 합니다. 자세히 보면 계속 달싹달싹 하거든요. 그리 우주의 기운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성한 기운 즉 진성이 영입되는 것이 길지 않고 자라면서 머리가 굳어지고 분별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막혀버리거든요. <능엄경> 제7권에 나오는 대력벽우가 바로 이 정수리를 통해 들어오는 진리의 상징인 것을 알면 이해가 쉬워요. 경에 나오는 대력벽우의 똥이 바로 정수리를 통해 들어 온 진리가 몸으로 들어와 뱃속에 우글우글 떨어지고 온 몸을 뚫고 다는 것이거든요. <법화경> ‘신해품’에 나오는 ‘궁자의 비유’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결별한 아들이 50년 만에 아버지에게 왔는데 아들은 아버지인 줄 모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알아보고 맞아들이지만 아들은 놀라 도망가잖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차츰차츰 아들을 가까이 오게 하는 방편을 씁니다. 그래서 결국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게 됩니다.
우리가 진성을 영입하는 것도 이 비유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진성을 받아들여 우리의 습기(習氣)를 하나하나 지워내는 것, 그 차츰차츰의 과정이 수행인데 거기에 어긋남이 있으면 수행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수행은 몸을 바르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너도나도 마음이라고 말 하지만 몸을 통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유식학에서 7식과 8식 등을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의 일체화를 부정하고 마음만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정확한 수행의 방법이 무엇이냐 했을 때, 나는 <능엄경>의 수행법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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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은 어려운 경전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그 풀이의 오류가 많다보니까 어려운 공부로 인식된 것이지요. 이 경전을 줄여서 ‘수능엄’이라 하잖아요. ‘수능(首楞)’이란 일체를 다 성취함이고 ‘엄(嚴)’이란 견고함이니 일체를 성취하고도 견고함을 얻어야 수능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막연하겠지만 실제 경전을 공부해보면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합니다. 수행법과 그 대의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보통 공부를 하는데 있어, 그 성취의 근본이 잡히려면 13년이 걸립니다. 처음 입태(入胎 아기를 배는 것)의 과정이 열 달이나 1년이라 칩니다.
이 단계에서는 수행의 기초다지기가 되어 단전에 핵이 형성되는 정도가 됩니다. 다음 3년쯤은 유포(乳抱) 즉 젖을 먹여 기르는 단계인데 그 핵이 단전에서 명치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우주의 문을 열고 로케트가 발사될 수 있는 ‘발사대’를 형성한다고 보면 됩니다. 다음 9년쯤 정진이 필요한데 달마대사의 경우를 보면 ‘면벽’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로케트가 찰라찰라 발사되어 우주 삼라만상을 두로 보고 느끼고 관찰하여 저장합니다. 우주적 진리가 하나의 자리로 응결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자리, 바로 마음이라는 자리에 저장하는데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은 바로 중생심으로 일으키고 저장해 둔 업식들을 지우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워지고 지워져서 고요하고 텅 빈자리, 그 자리가 바로 진성의 자리이며 내 몸과 진성이 둘이 아니게 부합한 자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실제 수행을 하지 않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능엄경>의 수행은 바로 이런 수행의 길을 바르게 보여주고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요즘 컴퓨터 다들 쓰는데, 그 도리를 나도 알고 싶어서 컴퓨터 공부하는 책을 사다 봤습니다. 입력하고 지우는 과정이 꼭 들어맞는 것이 흥미로워요.
-무엇보다 어떤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고 철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지요. 지금의 수행풍토는 형식적이고 관습화된 경향이 많아요. 내 생각으로는, 종단에서 아주 철저하게 수행을 하는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봐요. 평생 틀고 앉아 있어도 결론을 못 내는 수행이라면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부끄러울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 승단과 불교계는 수행과 사회화에 대한 관계를 매우 막연히 설정하고 쉽게 접근하고 있어요. 복지사업이나 구호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은 불교의 사회화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행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좀 달리 봐야 하거든요. 수행의 자리는 언제나 서슬 푸른 수행이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일은 또 거기에 부합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옳은 불교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홍수가 나서 집과 짐승과 사람이 마구 떠내려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길에 나와 그걸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헤엄을 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두 사람 다 물귀신에게 잡혀 가요. 헤엄 칠 줄 모르는 사람은 물에 뛰어들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떠내려가는 사람을 그냥 구경만 할 수도 없어요. 수행이 철저해야 하는 것, 수행을 통해 궁극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언제라도 물에 뛰어들 수 있기 위함입니다.
자기 몸 하나도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 중생을 구제한다고 홍수 속으로 뛰어들면 그 보다 어리석은 일이 있나요. 오늘날 수행의 현장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다는 게 대다수의 이야기이고 보면 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종단의 선거제도가 승가규범을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불교의 대중화 사회화 노력과 불교본연의 수행전통 계승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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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러해 전부터 동서양과 승속을 막론하고 수행열기가 대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수행의 방법론이 중요한 이슈로 대두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잘 모르니까 그렇지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와중에 문제제기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대혜종고 선사 이후로 화두선에 길들여진 집안에서 ‘이게 아니다’라고 떨치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조계종의 종정을 오래 지내신 성철 스님은 평생 화두선을 했다는데 그 문도들은 3천배와 능엄신주 기도에 매진하고 있거든요. 그게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국선의 중흥조 경허선사도 생사가 둘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하나여서 몸의 아픔과 마음의 아픔이 하나로 계합하는지 체험하려고 물동이 이고 지나가는 처녀에게 입맞춤을 한 것 아닙니까?
일본의 경우 <능엄경>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위경(僞經)이라며 배제하고 있는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능엄경>을 진경으로 인정하면 일본의 불교가 다 비불교가 되어버리니까요. 우리나라의 어느 학자도 <능엄경>을 위경으로 분류한 것을 보았는데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동안거와 하안거가 결제되면, 제방의 선원에서는 공부열기가 뜨겁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이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근래 들어 그야말로 활활발발한 오도송이 터져 나온 적이 있나요? 관습화되고 제도화 규율화된 수행풍토에 젖어서 결제와 해제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년 전에 비해 얼굴의 검버섯이 사라지고 허리가 오히려 더 꼿꼿해진 성원 스님의 모습을 보며 ‘비결’이 있으시냐고 여쭈었다. 스님은 빙긋이 웃을 뿐 답이 없다. ‘대력벽우의 소식을 네가 알겠느냐’는 것 같아 뜨끔했다. 스님은 산수화가 그려진 커다란 화선지를 하나 내 놓으셨다. 복사된 그림 상단에 단정한 글씨로 시 한편이 적혀 있었다. 성원 스님의 자작시였다.
세월이여 흘러가다오. 나는 여기 산과 들에서 살아가는 운수객. 청송(靑松)으로 해를 가리고 청계수 흐르는 곳에 구름 잡아 천막치고 달님 불러 고운 밤을 밝히나니 표주박에 옥수 떠 마시고 팔베개 누운 곳에 초향(草香)이 잠겨드는 향연(香煙)속에 잠이 들지요. 산중의 살림살이 이와 같은데 임금님의 손짓도 반갑지 않고 염왕(閻王)도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삶인데 내 어찌 세상일을 탐하랴. 이곳은 근심 걱정이 없는 곳 삶도 죽음도 비켜 가는 곳 달이 물 속을 걸어가듯 강물이 달을 든 듯 나는 언제나 안녕 안녕.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나니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번쩍 눈을 뜨겠지.
성원 스님은
1958년 불국사 석굴암으로 출가하여 다음해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대종사의 문하로 입실했다. 1961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은 뒤 30여 년 동안 각종 종무소임을 맡았다. 소임을 맡은 가운데 <금강경> 10년 독송의 발원을 성취했고 일종식과 장좌불와의 관음100일기도 성취, 1000일 간의 <반야심경> 사경과 <금강경> <법화경> 사경 등을 원만 회향 했다. 1988년 이후 제방 선원과 토굴 등지에서 수행에 전념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