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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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는 자기 이익 쫓아 일희일비하면 안 돼
동국대 정각원장 법타 스님

포교는 생명이며 존재가치
출가자의 화합법칙 ‘육화경’에 화합 비결 다 있어
수행은 개인 일이나 목적은 포교 밑거름 되기

조계종립 동국대가 최근 약학대를 유치했다. 동국대 교문 입구와 교정 곳곳에는 약학대 유치를 자축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로스쿨 유치에 탈락했을 때의 가라앉았던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종단도 대학도 “동국대의 약학대 유치는 상생과 화합의 결과”라며 자축하는 분위기가 한창인 때, 로스쿨에 탈락했던 때를 생각하는 것은 주책일까?

3월 어느 날, 나그네는 동국대를 찾았다. 동국대가 로스쿨 선정에서 탈락됐을 때, 동국대의 로스쿨 선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던,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목청 높였던 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역안배에 의해 로스쿨 선정에서 탈락됐던 동국대를 위해 맨 앞에서 목소리 높였던 이가 조계종 로스쿨 대책위원장이었던 법타 스님이다. 남다른 동국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스님은 2009년 3월부터 동국대 정각원장을 맡고 있다.

나그네가 정각원 사무실을 찾았을 때 법타 스님은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정각원 법당. 혹시나 했던 짐작은 역시나 였다. 다수의 동국대 구성원처럼 스님도 하루의 시작을 정각원 법당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스님은 “처음 정각원장에 부임했을 때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학교는 신정아 사건으로 위신이 추락한데다 로스쿨 탈락까지 겹치며 패배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교계에서는 내게 ‘본사 주지도 여러 번 지낸 중진스님이 무엇하러 동국대 정각원장을 하느냐’고 비아냥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이번 약학대 선정은 제33대 집행부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종단ㆍ학교가 한마음으로 소통과 화합을 이룬 결과”라고 강조했다.

오래 전 나그네가 한 선지식에게 얻은 지식이 있다. 사람마다 강조하고 내세우는 부분이 그 사람의 단점ㆍ문제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인 경우 더 그렇다는 것. 청렴을 강조했던 이가 비리와 청탁 건에 연루되는 사건 등이 그 예이다. 그래서인지 종단에서는 종단 출자 기여도를 배제한 동국대 이사후보 선출건 등 조금씩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물었다. “스님, 화합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합은 소탐대실하지 않고 역지사지하는 것입니다. 하심하면 됩니다. (자기가) 죽을 일 아니면 손해 좀 보면 어떻습니까? 불자라면 속물처럼 자기 이익 쫓아 일희일비하면 안됩니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맞으면 부처도 부러워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하하”

법타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 스님은 ‘그렇지 아니한 것이 크게 보면 그렇고, 뜻이 없는 것 같은데 크게 보면 뜻이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와 시시비비를 떠나 비전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육화경(六和敬)을 설명했다. 육화경은 출가자가 수행 생활을 함에 있어 화합을 이루기 위한 여섯가지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로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지목할 정도로 승가에서의 화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화공주(身和共住)는 몸으로 화합하는 공동체 의식을 말합니다. 가족이 한지붕 아래에서 한솥 밥 먹고 살 맞대고 살면 화합의 길이 쉽게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구화무쟁(口和無諍)은 언어와 의사표시를 순화해 입으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로 입을 화합하면 다툼이 없어지쟎아요?”

이어 법타 스님은 “뜻을 합쳐 행동을 함께 하는 의화동사(意和同事), 계율과 법질서에 따르는 계화동수(戒和同修), 서로 다른 견해를 인정할 줄 아는 견화동해(見和同解), 이익을 균등히 배분하는 이화동균(利和同均)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면 화합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불자)의 경쟁상대는 이웃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계 내부에서 서로 이권 등을 놓고 다툼해서야 되겠습니까?”

스님은 충북의 유교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다. 어려서 부터 몸이 약했던 법타 스님을 위해 어머니와 할머니는 부처님 오신 날이면 등을 밝혔다. 스님은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불교서적을 처음 접했다. 책으로 만나는 불교는 지금까지 그저 절에 등 켜고, 스님이 탁발 다니는 것이 불교의 전부라 여겼던 법타 스님에는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 날, 친구와 청주 수도원(現 신용화사)을 찾았다. 도량을 기웃거리는데 법당에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또래의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러던 중 법타 스님은 한 학생에게 “어떻게 하면 스님 말씀(그때 스님은 ‘법문’이라는 단어도 몰랐다)을 들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스님의 불교학생회 생활이 시작됐다. 미친 듯이 활동했다. 법타 스님이 중학교 3학년일 때, 속리산 법주사로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수련회를 갔다. 오지 말라는 것을 스님은 ‘깡’ 하나로 찾아갔다.

“선배들이 어리니까 오지 말라고 합디다. 도통하면 그만이지, 도통하는데 무슨 나이가 중요한가 싶어서 혼자서 법주사를 찾아갔습니다.”

20여 일 수련회를 지내면서 법타 스님은 절이 좋아졌다.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님은 후일 은사가 된 추담 스님에게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추담 스님은 껄껄 웃으시며 “중노릇 하면 좋지만 무식하면 안된다. 고교 졸업장을 가져와라”라고 말했다.

법타 스님은 집으로 돌아왔다. 청주상고에 진학해서도 불교학생회 활동은 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했다. 교회 장로가 교장이었던 학교였지만 스님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돌며 불교학생회에 학생을 모집했다. 특히 바르게 사는 사람이 스님이라는 생각에 출가 전 사회부터 바르게 하겠다 마음 먹고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다.

거칠 것 없이 대범했던 고교생 법타 스님도 얌전한 때가 있었다. 스님은 추담 스님이 청주 시내에 나오셨다는 소식만 들으면 달려가 시봉했다.

법타 스님은 “은사스님만 뵈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이 된 것은 금생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고 회상했다.

고교 졸업식 날이 왔다. 스님은 오래전 추담 스님과의 약속대로 출가했다. 은사스님을 옆에서 시봉하니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때 추담 스님이 갑자기 속초 신흥사로 가게 됐다. 은사스님은 법타 스님에게 따라오지 말고 동국대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은사스님과의 이별이 싫어 법타 스님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은사스님의 말씀대로 공부해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출가 전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스님은 출가해서도 두각을 보여 백상원(동국대 학인스님들 기숙사)을 주름 잡았다.

대학 시절, 군입대했던 법타 스님은 월남도 다녀왔다. 남들은 6개월 순환근무 하는 곳을 스님은 자청해 2년을 있었다. 그 곳에서도 스님은 부지런히 움직여 호국백마사를 세웠다.

스님은 “바르게 살자”는 말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당시 태고종 스님들이 머물던 내장사를 성진 스님과 함께 ‘정화’한 것도 바른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1974년이었습니다. 일타 스님에게 건당한 후 출가하게 해 준 종단의 은혜를 갚자는 생각에 내장사 정화를 했습니다.”

내장사를 시작으로 호남과 인연을 맺은 스님은 광주 원효사 주지 등을 지냈다. 그곳에서 스님은 광주사태를 목격했다. 사람들을 군화가 짓밟는 광경에 참을 수 없었던 스님은 당시 불교계 대표로 상무대 사령관과 면담하기도 했다.

‘열심히’ 살던 스님은 서의현 스님 총무원장 시절 더이상 사판 세계에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도미(渡美)했다. 스님은 콜로라도 덴버대학, LA 남가주 대학, 미조리 센루이즈 클레이튼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94년 종단 사태 때 법타 스님은 당시 서의현 스님 측이 관장하던 영천 은해사를 정리했다. 은해사 주지 시절에는 현대 한국 불교 최초로 은해사 승가대학을 설립했다.

“오늘날 전국 승가대 교수 90% 이상이 은해사 출신인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열심히’ 살았던 스님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YS정부 시절 찾아온 신공안 정국 때 법타 스님은 국가보안법의 고무ㆍ찬양 위반으로 긴급체포 됐다.

“그 때 국립선방(교도소)에서 105일간 기도 잘하고 나왔습니다. 하하하”

스님은 웃으며 말했지만 국립선방 안거의 후유증은 컸다.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는 대법원에 계류돼 DJ 정권 때까지 6년간 법타 스님의 발목을 좼다.

1998년 종단 개혁 때도 스님은 징계를 받았다. 그 때마다 스님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정진했다. 정진(?) 후에는 종단이 소홀했던 부분을 챙기며 재기(?)에 성공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은해사 주지 때 불교계ㆍ지역단체 등을 모아 사회정의운동, 통일운동 등을 시작했습니다. 토지와 임야가 대부분인 종단 재산을 활용하기 위해 수림장(樹林葬)을 교계 최초로 시행한 것도 은해사입니다.”

법타 스님은 “수행은 개인의 일이지만 수행의 목적은 포교의 밑거름이 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성불에 그치면 자기만의 일이 되지만 깨달은 만큼 포교를 해야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님은 동국대 정각원장을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 했다. 50년 출가자 생활의 회향을 모교에서 하고 싶었다는 것.
“<금강경>에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지 않습니까? 한시적 삶을 살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법타 스님은 “정각원은 국내 유일의 궁궐법당”이라고 말했다. 정각원은 경희궁 숭정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기에 한민족 말살정책을 펼쳤던 일본은 경희궁은 헐어서 학교를 세우고, 창덕궁은 동물원으로, 경복궁은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때 헐려 동국대에 다시 세워진 건물이 정각원이다.

스님은 “포교는 생명이며, 존재가치이며, 이유”라고 말했다. “포교를 위해서는 용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미국 유학시절, 지도교수로부터 북한불교를 연구해 보라는 말에 낯뜨거웠던 스님은 이후 북한에 주목했다. 북한 주민도 우리 동포, 이웃이었다.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했을 때 한국여권 소지자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던 인물이 스님이었다.

법타 스님은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만들고 평양과 사리원에 국수공장을 세웠다.
“60톤 밀가루를 보내면 77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MB정부 들어 밀가루를 보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비록 밀가루 국수지만 배고픈 사람들에게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스님은 “불교가 바로 서려면 대중에 다가가야 하고, 그러려면 포교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공을 바겐세일하던 시대는 갔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초하루ㆍ보름 재 올리고 등 켜던 시대는 갔습니다. 음력생활이 아니라 주5일 체제에 맞춰 불교 신행생활도 변화해야 합니다.”

법타 스님의 마인드를 따라 정각원도 변했다. 매주 월요일 법회에는 오영교 총장을 비롯해 교직원 다수가 참여 중이다. 스님이 시작한 수요일 대학생 법회를 비롯해 토요법회 등 정각원은 동국대 구성원의 신행생활 공간다운 역할을 하고 있다.
“실천하지 않는 깨달음은 무의미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 아닙니까?”

나그네가 법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인연을 따라 많은 사람이 스님을 만나고 갔다.


법타 스님은 ...
1965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추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학사·석사를 마쳤다. 1969년 월남전 참전. 미국에서 ‘20세기 근세 북한불교에 관한 연구’로 종교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총무원 총무부장, 불교신문 부사장, 대구불교방송 사장, 소요산 자재암, 광주 원효사, 은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결성한 스님은 남북교류 사업에 앞장서 왔다. 2004년 만해대상을 수상했다.
글=조동섭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cetana@gmail.com
2010-04-08 오후 4:09:00
 
한마디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몸소 실천이 더욱 중요합니다. 법문으로 그치지 말고 부디 항상 그런자세와 실천을 해야 하겠지요. 사부대중 모두가 말로만 입으로만 성불하지 맙시다.
(2010-05-03 오전 10: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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