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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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은해사 한주 금용 스님
“자기 위치 바로 아는 것이 자기발전의 시작”

서울 시내에서는 몰랐다. 안개가 심한지. 나그네는 그저 날이 밝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고속도로를 달렸다. 해가 떴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날이 어둑하다. 그제야 귓전으로 흘려듣던 라디오에서 “안개가 짙다”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구름과 달랐다. 땅바닥에 붙어서인지 안개는 산을 넘지 못했다. 터널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안개가 자욱할 때도 있었고, 전혀 없을 때도 있었다. 터널을 두고 안개가 있고 없음에 따라 명암이 엇갈렸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나뉘는 듯 했다. 희비도 교차했다. 안개가 걷힐라치면 나그네의 발 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안개가 뿌옇게 덮어 한치 앞도 안보일라 치면 손목부터 온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교토 기요미즈테라(淸水寺)의 한 법당 지하에는 임사체험을 하는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한줄기 빛도 없는 암흑 속을 벽면의 난간을 잡고 걷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난간을 잡은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귓가에는 염불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실은 난간을 잡고 따라가는 것이지만) 그 곳에는 ‘옴’자가 쓰인 큰 구슬이 밝게 빛나고 있다.

누군가 나그네에게 사람이 죽고 나면 그렇다고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영가는 업과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고.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가장 끝까지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어둠을 헤매는 영가에게 독경·법문은 한 줄기 광명이다. 간간이 커브 길에 깜박이는 점멸등과 네비게이션이 보여주는 지도가 안개 속을 헤매는 나그네에게는 그 빛을 대신했다. 내 위치를 다른 차에 알리기 위해 안개등과 비상등도 켰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유훈으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하라”고 말씀하셨다. 안개 속을 달리는 나그네에게도 해당된 말씀인 것을 보면 부처님 말씀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영천 은해사에 도착한 나그네는 한주(閑主) 금용 스님을 만났다. 한주는 아무 소임이 없는 소임이다. 어른스님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한가한 소임이다. 스님은 20여 년을 은해사에서 ‘한가롭게’ 살고 있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자란 금용 스님은 지리산 화엄사에서 출가했다. 어릴 적 “절에 가면 공부 할 수 있다”던 말이 생각나 무작정 길을 나섰다. 곡성에서 구례까지 걸어서 찾아 간 화엄사에서 대처승이었던 정혜 스님을 은사로 스님이 됐다.

당시는 1950~1960년대 비구·대처 싸움이 한창이던 때였다. 스님이 출가한 때는 정화가 막 끝나고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기 직전이었다. 금용 스님의 은사스님은 대처승이었으나 비구 종단에 합류했던 화동파(和同派)였다.

젊은 시절 스님은 간화선 수행에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전국 선방을 돌며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금용 스님이 오대산 상원사 문경 봉암사 양산 통도사 부산 선암사 등에서 화두에 매달리며 보낸 시간은 이미 살아왔던 시간보다 길었다. 특히 스님이 양산 통도사 극락암과 부산 선암사에서 살 때에는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경봉·석암 스님을 모시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스님, 경봉·석암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실 때 일화는 없으셨습니까?”

“없어. 우리 같은 사람은 그때뿐이지. (지난 일을) 되새김하지는 못해.”


나그네는 금용 스님의 대답이 야속하지 않았다. 눈 푸른 납자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발 내딛기 위해 치열하게 수행한 것을 단지 세속인의 이야기꺼리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무례이기도 했다.

금용 스님은 1964~1967년 군대를 다녀왔다. 영천 부관학교에서 행정교육을 받고 의무단 본부사령실에서 복무했던 스님은 군경력이 일생의 ‘업(業)’을 좌우한 경험을 했다.

전역 후 어느 날, 난데없는 총무원의 부름에 스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조계종 종정이던 고암 스님을 모셨던 스님은 1970~1980년대 견지동 일대를 풍미했던 도사였다. 스님은 당시 조계종 재무부장을 비롯해 규정부장, 한 때 불교신문 주간도 맡았다.

“스님, 수좌였던 스님이 행정승으로 살자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불러서 가보니 할 일이 많더라고. 내 공부도 좋지만 출가자로서 총무원을 바꾸는 것이 우선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했지.”

스님은 “비구·대처의 싸움으로 불교계가 어수선한 동안 이미 사회에는 개신교·천주교 사상이 들어와 있었다. (참선) 공부만큼이나 종교적 문제와 불교 자체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오던 차에 현실로 나가 도대체 어떤 것이 문제이고, 답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공심(公心)으로 뛰어든 사판승 생활 동안 스님은 조계종단의 변혁기에 큰일들을 해냈다. 수좌답게 매사를 적극적으로 처리해냈다.
1970년대 조계종이 조계사와 개운사로 나뉘어 싸울 때 었을 때 선봉에 섰던 것도 스님이었다. 금용 스님은 1980년대 신군부가 불교계를 짓밟은 10·27법난을 몸소 체험했다.

스님 표현을 빌자면 “불교계 나쁜 놈 43번째”가 금용 스님이었다. 군부에 온갖 고초를 받고 죽을 고비도 넘겼던 스님은 “남 탓 할 것 없다. 불교계의 근원적인 갈등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말했다.

“‘싸우지 말고 비구는 수행을, 대처는 교화를 하며 합리적으로 살자’던 백양사 송만암 스님의 제안대로 됐다면 좋았을 텐데, 당시 젊은 비구스님들이 만암 스님 말을 듣지 않았지. 당시 비구들은 ‘불법(佛法)에 대처승 없다’고 주장했는데 부처님 법에 대처승이 왜 없어? 부처님 당시 부처님 법력에 귀의했던 바라문이 지금의 대처승이고, 나한이 비구인데.”

민감한 사안에도 걸림 없는 금용 스님의 주장을 들으니 스님의 살아온 세월이 얼추 짐작됐다. 모난 돌은 정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었던 때 종단을 ‘개혁’한다고 또 다시 대중의 맨 앞에 섰다가 ‘졌다’. 열심히(?) 살았던 부작용으로 스님은 한 때 구치소에서 영어의 삶을 살기도 했다. (스님은 1984년 총무원 청사 침입을 주도했던 행동대장이었다.) 4개월 수감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금용 스님은 그 길로 처음 출가했던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 영원사에서 6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법화경>을 만났다.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읽는 것 모두가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오고 그때 시작한 <법화경> 공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 글자를 본 것은 30여 년이지만 뜻에 들어간 것은 15년쯤 밖에 안돼. 그때부터 다시 번역을 시작했고. 번역본을 습작만 두어 번 했는데 계속 교정·보완 중이야.”

스님이 지리산을 떠나 영천 은해사로 왔을 때 마침 은해사에는 승가대학원이 생겨 무비 스님이 <법화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스님은 무비 스님의 강의를 청강하며 자신의 <법화경> 공부를 점검했다.
<법화경>을 공부하는 동안은 스님이 참선해 온 정진력으로 경전을 꿰뚫는 시간이었다.

“<법화경>은 부처님 사상의 핵심이 담긴 수행경전이야. 흔히 만법귀일론이 법화경의 요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됐어.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일귀하처(一歸何處)’까지 이어져야 그것이 진정한 <법화경>의 요체야. 무엇보다 <법화경>은 아뇩보리, 원만각(圓滿覺)을 얻는 것이 목표이지.”


원만각? 생소한 단어이다. 나그네는 원만각이 무엇인지 궁금해 물었다.

금용 스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한자로 무상정등정각이라 번역하는데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쉬운 말로 고쳐 번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보살, 열반, 삼매 등 한자어 그대로 쓰는 것도 좋지만 불교가 대중화되려면 용어부터 쉽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금용 스님이 만든 신조어가 무위자진(無爲自盡, 열반), 불법최면(佛法催眠, 삼매), 도사(導士, 보살) 등이다.
“열반은 쉽게 말하면 죽음의 세계를 살아서 느끼는 것인데, 함이 없는 즉, 죽을 것 없는 죽음. 이것이 열반 아니겠어? 또, 자기 최면은 자기 삼매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 중생을 삼매에 들게 하니 불법최면이지. 보살은 지도자적 인물을 뜻하는 것이고.”

스님은 “진리는 모두 하나로 통한다”며 “참선 간경 염불 등 수행법이 모두 <법화경> 안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풀이하면 성문은 유위학(有爲學)이고 연각은 무위학(無爲學)이지. 성문과 연각까지는 참선 등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방편 수행을 하는 것이고, 부처님 본뜻을 훈습하는 것이 보살이야.”

스님은 “옛날 사람은 식견이 부족했지만 업장이 순박해 지혜의 눈을 쉽게 떴다. 그래서 견성한 선지식이 많았다”면서 “현대인은 승속을 막론하고 세상에 대한 인지 정도가 연각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용 스님은 “조사스님들을 비롯해, 상대성이론을 주장한 아인슈타인, 무위사상을 설파한 노자·장자, 공산주의를 만든 막스, 공자, 예수 등이 바로 연각”이라고 말했다.

“적벽에서 바람을 불게 해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는 제갈공명도 연각이야. 제갈공명이 바람을 불게 한 것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을 수리로 해석한 것 뿐이거든. 연각이 되면 수리에 밝아져.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결국 과거를 계산해 통계를 얻는 작업이고.”

스님은 “제갈공명보다 더 계산을 잘했던 연각이 무위도로 천하를 다스렸던 강태공이다. 그가 병법과 정치에 능했던 것은 무위의 극치”이라면서 “출가자 가운데에는 제대로 수행도 안해 본 채 연각 수준의 깨달음을 갖고 자신이 최고인줄 아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금용 스님은 “출가자들이 수행 정도를 착각하는 근본 원인은 자신의 수준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고 “재가의 인격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자기 수준을 몰라 방황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사람들이 자기 수준을 모르는 것을 ‘업장이 두텁기 때문’으로 봤다. 아는 것이 많이 쌓이다 보니 결국 병이 되고, 아는 것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금용 스님은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며 “불교도 마찬가지”라 강조했다.


“<법화경>을 지혜의 창고라고 하는데, 그 지혜가 현실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고민해봤어. 내가 총무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진 문제가 △불교사상의 정립 △남북통일 △환경문제 등인데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거의 다 풀렸지.”

산중에서 아이티 지진 참사 소식을 들으셨는지 스님은 지진을 예로 들었다.

“지진이 일어나면 5000~5만명이 죽거나 다치는데 어떻게 하면 인명 피해를 줄일까? 이 방법이 지혜 아니겠어? 내가 지리산에 있을 때 TV에서 일본 고베 지진을 봤는데 지진도 충분히 미리 알 수 있어.”

금용 스님은 보살이었다. 중생이 아프면 함께 아픈. 스님의 입에서 “고베 지진…” 말이 나오는 순간 눈가에 이슬도 함께 맺혔다.

스님이 (지혜로써) 제안한 지진 피해 예방법은 의외로 쉬운 방법이었다.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마다 시추공을 뚫고 일정간격으로 감지기를 설치하자는 것. 지중부에서 시작되는 지진이 지표까지 전달되려면 수시간이 걸리니 미리 감지하면 사람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용 스님은 “남북 평화통일은 <반야심경>의 실천으로 가능하다”고도 귀띔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니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집착할 것 없이 서로의 장점만 수용하면 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그 실천이 쉽지 않은 이유를 스님은 미국 등 강대국의 견제 때문이라 진단했다. “한국 위정자들이 강대국에 기대 배부른 돼지가 되려하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지키려면 방어 개념의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스님은 “고구려는 무(武)에 치중해 강했지만 멸망했고, 조선은 문(文)에 치중해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면서 “한국의 미래는 문무를 중도적 지혜로 수용한 교육과 사회운영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나그네는 궁금했다. “스님, 좋은 뜻을 펼칠 생각을 왜 안하시나요?”

“경전에 부처님이 ‘누실될까 염려된다’고 설한 부분이 있어. 이 경구를 한 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누실’은 쉬운 말로 ‘설치다 피본다’는 말이라고 하더군. 연각이었던 예수가 초지의 낮은 깨달음을 갖고 설치다가 피 봤쟎아? 하하하”

금용 스님의 지난 삶을 돌이켜 봤을 때 진심은 아닌 듯 했다. 나그네가 조금 더 물었다. 스님이 말했다.

“제바달다 탓에 재출가한 부처님은 10년간 원만각 수행을 하셨지. 설법을 해도 대중이 알아듣지를 못하니 부처님도 ‘빨리 죽어버릴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고. 중생들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데 괜히 말해봐야 소용 없쟎아? 수행·정진하다 인연되면 뭔가 이루는 것이고, 아님 내생으로 미룰 생각이야.”

나그네는 30년 재야생활을 통해 세상을 달관한 선지식에게서 모난 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왔다.


금용 스님은…
전남 곡성에서 출생했다. 1959년 구례 화엄사에서 정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그 후 일타 스님 밑으로 건당했다.
오대산 상원사 문경 봉암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 부산 선암사 범어사 등에서 안거했고, 총무원 규정·재무·교무부장과 불교신문 주간, 제8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일타 스님과의 인연 이후 줄곧 은해사에 주석하고 있다.
글=조동섭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cetana@gmail.com
2010-03-06 오전 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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