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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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니 좋아하는 게 뭐냐? 이게 있어야 해

지지난주가 설이었다. 설이라는 말 속엔 설레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다. 한 해의 많은 날 가운데 첫날, 그날은 나름의 목표를 떠올리고는 이룰 것이라는 기대, 이루기 위한 다짐,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다. 핏줄의 팔딱거림이 있어서 좋다. 그래서 서로 축하해주는 언사가 어색하지 않다.
와서는 이내 가버리는 세월에 마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을 시작한 것이 어제인데, 벌써 훌쩍 두 달 가까이 지났다. 최소한 한국사회에서의 시간은 어떤 압축기술에 지배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도 쏜살같단 말인가. 그나마 설이 양력의 2월 중간쯤에 있는 것이 위안이 된다. 시작이 삐끗했어도 다시 추스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2월은 짧다. 아침 바람이 차가웁고, 햇살은 눈부시어 상쾌하다. 종림스님을 만나기 위해 고려대장경연구소로 가는 동안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서울 안암동 보타사에 딸린 5층짜리 건물의 한층을 얻어 쓰고 있다. 방문을 두드렸을 때 스님은 TV를 보고 있었다. 김석철씨의 건축 특강. 책상 위에는 <생각의 탄생>이 엎어져 있었다. 다탁 위에는 구겨진 과자 봉지와 서로 다른 디자인의 컵이 다섯 개 놓여 있었다.
“그래 왔나. 허리 수술하고 입식으로 싹 바꿨다. 앉으래이. 뭐 마실래?”
기자를 맞이하는 인사와 당신의 근황을 앞뒤 없이 삽시간에 풀어놓았다.
“중문과 답사팀 따라서 중국에 갔다가 엊그제 왔다.”

이번에도 뜬금없다. 10여 년 전부터 연세대 중문과 이규갑 교수가 모임을 짜 1년에 한 차례 중국을 답사하는데, 거기에 함께 다녀왔다는 얘기다. 답사팀은 매년 ‘한자’ ‘지필묵’ ‘집’ 등의 주제를 정해 10일쯤의 일정으로 다녀온다고 한다. 이번에는 ‘소수민족’을 주제로 중국 남서부의 구이저우(貴州)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규갑 교수는 임동석 건국대 교수, 강혜근 충남대 교수, 김병기 공주대 교수 등과 함께 93년부터 대장경 전산화의 이체자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준 오랜 인연이다.

허리가 아파 지난해 12월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림스님은 그새 동해와 서해를 건너 1월에는 일본, 2월에는 중국을 다녀왔다. 아픈 허리를 끙끙대면서도 미뤄놓을 수 없는 일들이 첩첩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40년 넘도록 매달려온 고려대장경 전산화!
일본을 다녀온 이유는, 남선사에 소장된 초조대장경 1800여 권의 디지털화 마치고 보고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6년간의 작업이었다. 이로써 초조대장경과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의 비교연구가 훨씬 수월해졌다. 경전의 집합과 분류, 초조에서 재조로 이어지는 과정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됐다.


전산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오래 된 것의 현재화, 그래서 지금 또는 미래의 쓸모에 값하는 것일까.
“문화재는 지난 문화 활동의 산물이다. 이런 물질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인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가게 하는 것이 문화재가 가진 가치다. 문화재를 보존하는 취지는 그것이 문화의 종(種)이라는 데 있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종으로 작용할 때 살아 있는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종림잡설-망량의 노래>에서 따옴)
그는 18년째 대장경 전산화 일을 하고 있다. “자아의 벽을 깨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전산화란 정보가 오히려 자아의 성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어떤 괴물을 만들어 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불교운동의 지향점을 찾고, 불교라는 이름에 걸맞는 방법론이 분명 경전 속에 있을 텐데, 그것을 찾아내보자는 막연함 혹은 뚝심이 그를 대장경 속에 빠지게 했다. 전산화는 대장경을 널리, 잘 보게 하는 수단이다. 결국 그가 가르키는 것은 대장경 속의 지혜이다.
종림스님에게 대장경 전산화는 그의 또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시작은 심심하고 싱겁기 그지없었다. 무슨 인과 연이 엉겨붙었던 것일까.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불교를 새롭게 해보자는 논의가 많았다. 그런데 그 무렵엔 쳐다볼만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빌빌거리고 있었다. 일본에 가 있는 도반들이 오라고 불렀다. 일본에 1년쯤 있었는데, 국제미아들이었다. 7, 8명이 강가에 모여 신세 한탄으로 시간을 보냈다. 무슨 인연이있는지 일본의 대장경 전산화하는 일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또 강가에 모였는데, 그날 얘기 끝에,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나, 해보자, 좋다, 하자, 그리고는 ”종림이 니가 해라“로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일사천리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대장경 전산화 불사가 시작했다.
돌아와서 해인사에 방 하나 얻어서 고려대장경연구소라는 간판을 걸었다. 93년이었다. 그런데 일이 엄청 커져버렸다.
“내가 이런 일 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 헐렁하게 살아야 종림다운데,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순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다. 목적 또는 목표를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 그를 출가로 이끈 요인이다. 누구나 그러했듯 그도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유토피아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이며,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유토피아 사상이 지닌 전체주의 성향은 으레 독재체제나 닫힌 사회를 낳고 만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사회의 구조와 질서 또는 정치제도의 변혁으로 인간과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역사에 비추어보건대, 정치적 이상만을 남긴 채 인간 존재를 구원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다.”(망량의 노래)

한때 초탈에도 매료되었지만, 안식처가 아니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자족을 추구하는 만큼이나 사회윤리의 실천이 불가피한 존재다. 이런 바탕 위에서 초탈의 철학은 이상과 실천의 괴리로 말미암아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가했다. 불교에서 길을 찾으려는 뜻이었다. 71년, 애초의 출가 사찰은 월정사였다. 그런데 그에게 맞는 공부를 하는 데가 아니어서 해인사로 갔다. 총무원장을 지냈던 지관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된 것도 어찌어찌하다가 그리 됐다. 아직 계 받을 기간이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종근이란 스님이 “같이 계 받자” 해서 도반 따라 느닷없이 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어느덧 39년이 흘렀다.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을 뒤지며 자신과 사회와의 괴리를 줄이려 했다. 출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잡았다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줄줄 빠져나가버렸다. 끝내 연기(緣起)의 이치가 그가 도달한 지점이다.
“세상에 다 맞는 게 어딨고, 다 틀린 게 어딨나? 없다. 서로의 장점을 이어주는 끈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선종, 대승불교, 원시불교가 있는데, 어느 것을 밀어내고 어느 것을 세울 거냐. 그러지 말고 각각의 장점을 들춰내어 이어줘야 하지 않나. 그 끈이 있을 거다. 그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연기로 풀어내면 나올 것도 같은데…. 내 생각이다.”
이향소참(異向小參)이란 참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모임을 즐겼던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내 주위에 한문, 서지학, 철학, 불교학 하는 별놈들 다 있다. 모여서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자고 해서 좋다고 했다. 이향은 이류중생(異類衆生)이란 말에서 따온 것인데, 동류만을 이해할 게 아니고 다른 류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소참은 작은 모임이란 말이고. 무슨 조직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얘기하고 듣자는 것이었다.”
매월 한 번 모임을 열었는데, <다윈의 식탁>의 저자, 원자력 연구자, 검사 등등의 사람들도 불러서 얘기를 나눴다. 2년을 이어왔던 모임이 얼마 전 중단됐다. 맞춤한 모임방을 제공했던 달마사가 큰 공사에 들어갔고, 마땅한 모임방을 찾는 게 또 일이 되어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종림스님은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TV와 인문, 물리, 생물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책을 즐겨 본다. 어느 글에서 “꿈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도사나 될 걸 그랬나?” 그랬듯 여전히 초탈을 꿈꾸면서 에너지를 충전한다. 만화와 TV는 그만의 에너지 충전법인데, 이것 말고 또 있다. 여행이다. 1년이면 열 번쯤 외국을 다녀온다. 대부분 대장경 전산화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업무 때문이다. 이런 여행 말고 때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으면 슬쩍 빠져나온다.
“니가 좋아하는 게 뭐냐? 이게 있어야 한다. 이건 실패가 없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자기를 위안해야 한다. 일상만 따라가지 말아라. 니가 좋아하는 게 기회가 되기도 한다.”
슬쩍 빠져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의 변명 같기도 한 그의 여행론 혹은 충전론이다.

내친 김에 몇 군데 추천해달라고 청했다. 돈황, 샹그릴라, 카라크롬, 에어즈 락(Ayers Rock), 수미산 등의 지명을 기억해내더니, 수미산과 에어즈 락은 한번 가볼만 한 곳이라고 말했다. 에어즈 락은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 불끈 솟은 바위 덩어리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남쪽으로 335km 떨어져 있다. 높이가 348m에 둘레가 9.4km에 이른다. 단일 암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호주의 원주민인 애버리진들이 신성시하는 곳이다. 종림스님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고 했다.

수미산은 티베트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서부 고원지대에 솟아 있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곳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티베트 민속종교, 자이나교도들도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다. 자이나교도들은 이 산을 순례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고 한다. “6000m가 넘는 바위투성이의 험준한 고산이지만, 이 산을 중심으로 7, 8000m에 이르는 만년설을 덮어쓴 고봉들이 둘러서 있어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얀 연꽃 봉우리의 한가운데 안겨 있다는 느낌, 괜찮아.”

종림스님은 대장경연구소가 오래도록 있었던 이태원에 가끔 가고, 가고 싶어 한다. 공짜로 만화책을 빌려줬던 만화방, 공짜 목욕탕, 공짜 식당이 그대로 있다.
“이태원은 우리 사는 거랑 딱 맞아. 거기엔 시간 개념이 없다. 밤낮이 없다. 온갖 나라의 사람들이 오가는 국제 거리다. 큰 길을 가운데 놓고 위에는 부자들의 성이고, 아래는 골목길에서 화투치는 풍경이 있고. 이질적인 것이 한데 어우러진 데다.”
60까지만 한다고 했는데, 올해 예순일곱이다. 대장경 전산화의 마무리 아직 멀다. “후원자들에게 고맙고. 내년이면 나는 끝이다. 책보고 좋아하는 것 할기다.”


종림스님은 작년에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진화론에도 재미를 붙였다. 프로이트 얘기로 이어졌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유일신적인 사고가 어디서 나왔을까, 이게 그의 생각거리였다. 그도 유태인이어서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쫓겨나 영국에서 활동했는데, 유태인을 모두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유태인이 어떻게 했길래 미음을 받는가, 말년에 이 의문을 푸는 글을 남겼다. 아마 <모세와 유일신앙>일거야. ‘유일’이 어떻게 보편화될 수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도 재미있게 봤다.”

<대칭성 인류학>은 나카자와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하나로 밖에서 본 불교라고 부제를 붙일 수 있는 책인데, 신화를 통해 불교와 세계를 보는 시각이 흥미롭다.
“내년에 대장경 일 그만 두고, 책 보고 가끔 글도 써볼기다. 생각대로 될지는 나도 모른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공(空)의 입장에서 세상을 쳐다보는 일이다.”

종림스님은
1944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72년 지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도서관장, 월간 <해인> 편집장, 일본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대흥사 선원장, 세계전자불전협의회 공동의장, 2006 한국불교학결집대회 회장을 역임했다. 92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설립해 대장경을 디지털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종림잡설-망량의 노래>가 있다.
글=정성운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woon1653@hanmail.net
2010-02-26 오후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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