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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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_영원한 것이 있다면 불심 자성 본성 뿐
단청장·사명암 감원 동원 스님

새 봄을 알리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춘이지만 유난히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다. 경기가 회복 중이라는 정부 인사의 발언과 달리 “건설업 체감경기 10개월 만에 최저”라는 류의 보도가 이어지는 것처럼, 봄은 왔는데 여전히 춥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동원 스님(전통무형문화재 단청장 제48호)을 만나러 양산 통도사 사명암을 향하던 그 날도 추웠다. 서울은 영하 9도 수은주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서울보다 남쪽인 양산은 얼음 없는 영상의 기온이었다.

서울에서 추위에 움츠린 몸을 펴게 돕던 외투가 양산에 이르니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했다.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도의 관점에서 보면 선악(善惡)ㆍ미추(美醜)ㆍ아타(我他)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좁은 땅덩어리라고 하지만 남북의 공기가 확연히 다른 것을 보면 세속의 삶은 구별이 없을 수 없다. 또, 구별을 해야 서로 다름을 알고 준비할 수 있으리라.

통도사에 이르니 “불보종찰(佛寶宗刹)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쓰인 글이 눈에 들어온다. “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인 통도사는 사찰을 창건한 자장 율사를 비롯해 구하ㆍ경봉 스님 등 셀 수 없이 많은 선지식이 머물던 곳이다.

본사만큼 빼어난 암자가 영취산 기슭과 골짜기에 자리한 것도 통도사의 자랑이다. 통도사에는 빼어난 풍광과 저마다의 불연(佛緣)을 간직한 13개 암자가 있다. 장독대와 들꽃이 유명한 서운암, 금와보살이 나툰 자장암, 재미있고 독특한 도깨비상이 눈길을 끄는 안양암을 비롯해 백련암 옥련암 수도암 서축암 금수암 반야암 극락암 비로암 백운암 그리고 사명암까지.

일주문에서 차를 달려 5분쯤 지났을까? 본사에서 왼편으로 1km를 달리니 이정표가 보인다. 왼쪽으로 서운암 백련암 옥련암과 함께 사명암 글씨가 보였고, 이내 사명암에 이르렀다.

조선 선조 6년(1573) 사명 대사가 주석하던 곳에 이기ㆍ신백 두 스님이 중창했다는 사명암의 첫인상은 “아름답다”는 상투적인 표현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도량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담백한 느낌이었다. 단청장인 동원 스님이 주석하는 곳이라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저 부질없는 나그네의 망상이었을 뿐. 그냥 여느 절과 같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하지만 동원 스님은 여느 스님과 달랐다. 인터뷰 내내 스님은 청산유수와 같은 선담(禪談)을 주저 없이 쏟아냈다. 그림 그리는 스님이라 조용할 줄 알았던 나그네의 선입견이 사명암의 여법한 단청에 이어 또 한번 깨어져 나갔다.

차 맛도 달랐다. 스모키 향 비슷한 내음이 찻잔 가득한 헛개나무차. 동원 스님은 “목이나 축이고 시작하자”며 바쁜 걸음으로 찾아온 나그네를 잠시 쉬게 했다.

“전생의 업인지 그냥 절이 좋았어요.”
스님은 자신이 출가를 하고, 40여 년을 한결 같이 붓을 들고 살아온 삶이 전생의 업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원 스님은 나이 열여섯에 모친에게서 여비를 받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일까?”하는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고민을 했던 청년은 그렇게 고향인 대전을 떠났다. 집을 나선 청년은 그 길로 구름과 물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삶을 살게 됐다.

청년은 내장산 백양산 무등산 유달산 등을 거쳐 제주도를 찾아 한라산에 올랐다. 그가 뭍에 올라 찾은 곳은 부산이었다. 영도다리에 오른 청년은 “경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터미널을 찾았다. 때마침 버스터미널에는 양산 통도사행 버스가 출발을 앞두고 있었고, 경주를 가는 길목이라는 생각에 청년은 통도사행 버스에 올랐다.

통도사에 도착한 청년은 이상했다. 처음 찾은 곳이었으나 전혀 낯설지 않았다. 통도사가 주는 푸근한 느낌에 청년은 묵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홍법 스님에게 묵어갈 방을 물었다.
홍법 스님은 청년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대전에서 왔습니다.”
“너 여기서 살면 좋겠다.”
청년에게는 스님의 그 말씀이 인생의 지남철 같았다. 다음날 경주로 떠나려 했지만 청년은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은 흘렀고 청년은 자연스레 스님이 됐다.
전생의 ‘업’이라 표현한 동원 스님의 말처럼 청년이 스님이 된 것은 필연이었다.
스님은 “자유, 경치 좋은 곳, 그림과 대금을 좋아한다”면서 “스님이 되고 나니 좋아하는 네 가지를 모두 하고 살게 돼고 또, 부처님 공부하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훤히 보여 다른 세상일은 싱거워졌다”고 말했다.

<금강경>의 “무릇 세상에 존재하는 상은 모두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는 것을 동원 스님은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하고 싶은 네 가지를 모두 하며 살 수 있게 한 출가자의 길이었기에 스님은 그 불은(佛恩)에 보답코자 새벽 예불만은 꼭 챙겨 왔다. 그 때마다 동원 스님은 참회와 발원과 깨달음을 부처님 전에 기도했다.
살아가면서 잘못 듣고 행함을 참회했고, 어떻게 살아야 안으로 마음을 잘 닦고 밖으로 좋은 인연을 지을지를 발원했다. 잠들면 어디로 가는지 깨고 나면 한량없는 망상을 그치고자 깨달음을 추구했다.


동원 스님은 대자유인이다. 불화를 그리는 짬짬이 산을 탔다. 출가 초기에는 15년을 운수납자의 본분에 충실(?)하게 설악산, 지리산을 펄펄 날아다니며 지내기도 했다. 봄ㆍ가을에는 그림을 그리고 여름이면 바닷가를 찾아 자연을 품에 안았다. 산을 타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렀다.

40년 넘게 들어온 붓은 이제 처음에 들었던 재미는 간 곳없고 오랜 벗처럼 그저 ‘업’이 됐다. 지금은 ‘업’이 돼버린 탱화를 그리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통도사의 매력에 흠뻑 젖어 갓 출가한 동원 스님은 도량 서까래에 칠해진 단청이 색동저고리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느 날 스님이 행자방의 관음도를 펜으로 그렸을 때, 대중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과 소질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스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 때 동원 스님의 솜씨를 알아본 홍법 스님이 은사 혜각 스님(1905~1998)을 소개했다.

은사스님은 선수행을 겸비한 철저한 율사였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살았던 은사스님은 상좌가 도량에서 라면만 끓여먹어도 쫓아낼 정도로 엄했다.

은사스님이 제주도 한 사찰에서 단청할 때 일이다. 누군가가 사온 간식에 얇게 썬 오징어 조각을 모르고 먹었던 혜각 스님은 사실을 알고 난 후 해우소에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스님은 돌도 부처님이라면 절하고, 나물도 고기라고 하면 토해내던 깊은 신심과 천진한 성품의 선지식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엄했던 혜각 스님이었지만 동원 스님에게만은 한없이 따뜻했다.
스님은 “밀양 금강대 토굴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3년을 살았을 때도 야단 한번 맞은 적 없었다”면서 “사명암도 은사스님이 ‘조용히 둘이 살아보자’고 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동원 스님은 은사스님 시봉을 수행 삼고, 붓을 죽비와 목탁 삼아 평생을 살아왔다.

스님은 “생각 생각이 모두 선으로 선 아닌 것이 없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나에게는 생각이 곧 화두요, 화두가 곧 생각이다”라고 강조했다.

“마음으로 생활하며, 선은 마음 닦는 것이라 일상생활과 선은 둘이 아니잖아요? 또, 영원한 것은 없어요. 다 허망합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불심 자성 본성 뿐이지요. 때문에 누구나 마음 닦는 것을 일 삼아 살아야 해요.”


동원 스님은 항상 바쁘다. 이 날도 스님은 화실에서 열축(탱화는 ‘폭’이 아닌 ‘축’으로 센다) 규모의 시왕탱을 그리고 있었다. 40년 넘게 단청과 탱화를 그려온 스님의 손길은 전국 사찰 곳곳 안닿은 곳이 없다. 캐나다 서광사, 청도 운문사, 대구 동화사 등 100여 사찰에 단청 불사를 하고 국내 최대 후불탱화로 손꼽히는 조계사 대웅전 탱화(750cm×450cm)를 그린 것도 동원 스님이다.

원력과 신심으로 올곧게 작업해 온 스님이기에 제방에서는 “고려불화에 준하는 세밀한 탱화를 조성하는 곳은 사명암 동원 스님 뿐”이라는 찬탄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나그네는 스님이 혹시 은사스님에게 남다른 필법이라도 전수받은 것은 아닐까 싶어 물었다.

“탱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발심하고 참회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경전을 대신하고 부처님 진리를 대신 한 것이 탱화에요. 탱화를 그리는 일은 부처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일은 신명을 다해야 하고, 신명이 들지 않으면 영험 없다는 것을 근래에 알게 됐습니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이어 스님은 “막상 세필(가는 붓)을 쓸 때는 숨도 크게 못쉰다”면서 “TV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볼 때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듯이 탱화 그리는 것 또한 같다”고 강조했다.
동산 스님은 “아미타탱화를 그리기 전에는 <아미타경>을 읽고, 아미타회상을 상상하며 불보살을 출현시킨다. 산에 대한 진리를 표현한 것이 산신탱화이고, 물에 대한 생명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 용왕탱화”라고 설명했다.

동원 스님은 요즘 ‘아미타 수행’에 매진 중이다.
한때 매일 4000배 이상 절하며 기도정진을 그치지 안았던 스님이었지만 하루는 꿈에 귀신들이 보였다. 스님은 “<지도론>에 ‘수좌는 귀신도 속여야 한다’는데 꿈에서라도 귀신을 못다뤄 어쩌나 싶었다. 꿈마다 귀신이 계속 따라 다니길래 ‘아미타불’을 부르니 귀신들도 합장하며 ‘아미타불’하고 지나갔다. 그 후로 ‘아미타불’ 정근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원 스님은 “기도를 하기 전 자기부터 바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도에 분별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근기따라 수행법이 다르듯 자기에게 맞는 기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덕이 없다면 관음기도를 해야겠지요. 덕은 자비를 뜻하니까요. 자기가 지혜가 부족하다 싶으면 문수행을 하고 문수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살아가는데 원망과 원결, 장애가 많다면 <지장경>을 독송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생각은 항상 많은데 실행이 따르지 못하는 분에게는 보현행과 보현보살 기도를 권합니다.”

스님은 “자기 업을 보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아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성, 돈, 기술 등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기의 업이라는 설명이다.


동원 스님은 “팔만사천 법문이 곧 마음”이라면서 “펼치자면 시방세계를 두루 덮고도 남고, 감추기로 하면 실오라기 만큼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부처님을 그리는 탱화는 경전을 그려내는 작업”이라면서 “문수보살은 지혜를, 지장보살은 대원을, 관음보살은 자비를 그리는 것이며, 부처님은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옛날에는 탱화를 ‘탱(幀)’이라고만 했지 탱화라고도 안했습니다. 예술작품으로 인식하면서 ‘탱화’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00년 전 탱화를 보면 등분이 안 맞아도 그림에 힘(기운)이 느껴집니다. 원력과 신심으로 조성했기 때문인 것을 근래에야 알게 됐습니다.”

스님은 “32상 80종호를 갖춘 부처님은 앞ㆍ뒤를 비롯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그린 탱화가 그런 부처님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중요무형문화재는 우리시대 한 분야의 최고 장인을 일컫는 칭호이다. 40년 넘게 탱화와 단청을 그리며 은사스님을 이어 일가를 이룬 동원 스님. 스님의 겸손은 영취산을 넘어가는 태양과 같았다.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처럼, 내일이면 다시 원력과 신심 가득한 붓을 쥐고 부처님을 사바세계에 나투게 할테지만.



동원 스님은 ...
1966년 입산 출가했다. 월하 스님을 법사로 혜각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고암 스님에게서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40년 넘는 세월을 붓을 들고 수행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2009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글=조동섭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 cetana@gmail.com
2010-02-11 오후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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