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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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찾아서_매일 되돌아보고 매일 처음처럼 사세요
남양주 불암사 회주 일면 스님

일면 스님은 바빴다. 조계종 군종교구장과 광동학원 이사장 소임을 내려놓았으니 요즘은 한가할 것이라는 나그네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조계사 인근에서 일면 스님을 자주 뵈었다는 기억에 그 날도 서울 근처, 적어도 스님이 주석하시는 남양주 불암사에서는 뵐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뿔싸! 스님은 멀리 계셨다. 나그네가 일면 스님을 찾았을 때 스님은 부산을 향하는 길이었다. 큰스님을 나그네의 얕은 중생심으로 헤아린 과보일 게다. 일면 스님과 통화를 마친 나그네는 부리나케 먼 길을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KTX는 참 빠르다. 천안을 지날 무렵 창밖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앞으로 사라졌다. 차들은 왜 나그네의 뒤가 아니라 앞으로 사라졌을까? 그렇다. 나그네는 역방향 좌석에 앉았다. 5% 요금할인을 받자고 앞이 아니라 뒤를 보고 앉은 것은 아니었다. 미리 여정을 챙기지 못하고 바삐 길을 나선 댓가였다.

문명이란 좋다. KTX가 아니었다면 나그네가 감히 일면 스님을 쫓아 부산을 내려갈 엄두나 냈을까? 또, 나그네의 가방 가득 담긴 핸드폰과 노트북, 티-로그인(휴대접속용 인터넷)이 없었다면 큰스님의 친견을 다음으로 기약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3시간. 그 시간만이라도 몸도 생각도 쉬었으면 좋았을텐데, 나그네는 그렇지 못했다. 밀린 일을 쌓아두고 길을 나선 이가 자신을 돌아보며 사색하기란 사치를 떠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그네는 KTX 열차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노트북의 화면을 들여다봤다. 간간이 피로한 눈을 쉰다는 핑계로 창밖의 차들이 앞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즐기면서. 문명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지만, 그 댓가로 ‘나’를 잃은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 인(人)은 사람이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문자란다. 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누가 그랬을지 따져보고 싶은 상황이 발생했다.

KTX 일반석의 팔걸이가 문제였다. 워드 작업을 하느라 노트북을 펼친 나그네에게는 활개치고 어깨를 펼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팔걸이에 팔을 걸쳐야 했다. 옆자리에 않아 신문을 보던 사내도 나그네와 같았다. 말없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집중해서 노트북을 두드리는데 툭 툭 건드리는 사내에게 짜증이 났다. 나그네가 극장 등에서 비슷한 경우를 겪었을 때를 보면 이런 경우에는 대개 팔걸이를 좌우가 아닌 상하로 나누어 쌍방이 말없이 눈치로 서로의 영역을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달랐다. 적당하게 상하를 나누어 양보할 만큼 해줬음에도 도발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일하는데, 한가로이 신문 보는 네가 좀 양보해라”라는 말을 사내에게 하지도 못했지만 할 필요도 없었다. 나그네와 사내, 둘 다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앉은 자리이기 때문에.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까? 노트북 배터리가 줄어있는 양으로 봐서는 긴 시간이었는데 나그네는 아직도 일 하나를 끝내지 못했다.
대구역에서 사내는 내렸다. 사내가 내리고 나니 옆 빈자리도 나그네 차지가 될 수 있었다.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놓을 수도 있었지만 놓지 않았다. 누군가 다시 와서 앉을 것 같아 빈자리를 빈대로 뒀다. 나그네는 그저 마음껏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돼 기뻤다.
사내가 사라지고 팔걸이도 차지했지만 나그네의 일은 좀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왜일까?

옛날에 한 나무꾼이 있었다. 불심도 깊었던 나무꾼은 오며 가며 <법화경>을 외우고 또 외웠다. 하지만 7권 중에 4권 이상은 외워지지 않았다. 나무꾼은 나무하느라 바쁘고, 장에 나가 나무를 파느라 시간이 없어 외워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무꾼은 스님이 되면 공부만 할 수 있겠다 싶어, 나머지 3권도 외우겠다며 출가했다. 하지만 나무꾼이었던 스님은 출가 후 20년이 되도록 <법화경>을 모두 외우지 못했다. 오히려 외우고 있던 4권 마저 모두 잊어 버렸다.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사내는 나그네가 일하는데 있어 마장이었다. 노트북을 펴고 일을 하겠다던 나그네의 초심은 사내와 실랑이를 하는 동안 일이 아니라 사내 탓, 팔걸이 탓으로 변해 있었다. 일을 하려는 의지가 중요했지 주변 탓을 하며 마음을 빼앗길 것은 못됐다. 팔꿈치로 가르침을 줬던 사내에게 감사하고 나니 노트북 위에 얹은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인다.

그런데 열차가 부산역에 도착했다. 이제는 환경이고 마음이고 무엇도 탓할 게 못된다.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물쩍 거리다 부산에 도착한 나그네는 노트북을 덮으며 “사람 몸 받고 태어나 사는 동안은 아무 탓도 말고 그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부산 금강사(주지 혜성)에서 만난 일면 스님은 나그네의 다짐을 평생 실천하며 살아온 선지식이다. 특히 스님은 그저 바른 뜻으로 열심히만 살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진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스님은 전날 경주에서 불교계 각 종단지도자 모임인 백상회에 참석했다. 이튿날 제주도를 찾기에 앞서 스님은 한일불교교류협회 한국측 여성부 신년회에 참석하기위해 부산을 찾아 도반인 주지스님을 만나고 있었다.)

한때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선을 하며 입적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군종교구장 시절에는 빗물이 새는 등 다 쓰러져 가는 군법당을 보고도 돈이 없어 안타까워 한 적도 있었다. 스님은 꺼져가는 한 생명으로부터 장기를 기증받아 새 삶을 얻었고, 대중의 도움을 받아 반듯한 군법당을 척 척 지어냈다. 생명나눔실천본부 역시 스님의 뜻으로 일궈낸 결과였다.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뤄낸 일면 스님의 뒤에는 은사인 명허 스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13세에 출가한 일면 스님은 가야산 해인사 선방수좌였던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일면 스님이 하루는 은사스님의 심부름으로 장을 보고 난 뒤였다. 일면 스님은 심부름으로 털신, 비누 등을 사고 100원이 남아 눈깔사탕을 사먹고 돌아왔다. 셈을 하던 은사스님이 “돈 100원이 맞지 않는다”며 묻자, 일면 스님은 “눈깔사탕을 사먹었다”고 말했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은사스님은 “너 같이 시은을 가벼이 여기는 놈은 중노릇할 자격이 없다. 절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일면 스님은 빌고 또 빌었다. 두어 시간 무릎 꿇고 앉아있었더니 은사스님이 “3000배를 하고 오라”며 “다시는 시은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말했다.

또 하루는 일면 스님이 수건과 내의 등을 세탁하면서 마지막으로 헹군 물을 버리는데 은사스님이 혼을 냈다. 일면 스님이 “빨래하고 남은 물 버리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반문했더니, 은사스님은 “예끼 이놈아. 놔뒀다가 걸레 빨 때 쓰면 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일면 스님이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군대를 전역한 뒤 만학도로 동국대를 졸업한 뒤에 다시 해인사를 찾아 공양주 소임을 자청했다. “시은을 중히 여기라”는 은사스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절에서 대학공부까지 시켜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일면 스님은 눈썹까지 밀고 공양주 소임을 살았다. 남 몰래 대중스님들 신발도 닦은 것을 비롯해 묵언 속에 기도 정진을 병행하며 보은을 통한 구도의 길을 걸었다.

스님은 “부처님 법을 널리 펼칠 큰 그릇이 되고 싶다”고 발원했다.


은사스님의 지도도 있었지만 일면 스님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은사스님이 “선방 가서 도인되거라”고 말하자, 일면 스님은 “스님, 저는 복지ㆍ행정의 도인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원 시절,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이 종단분규를 겪던 끝에 “조계종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고 일면 스님은 생각했다. “청담 스님 같은 도인도 행정에는 별 수가 없구나. 종단에는 참선 등 수행으로 도가 트인 큰스님은 많아도 행정의 도인은 없는 것 같다.”

1년에 16차례 입ㆍ퇴원을 할 정도로 간이 좋지 않았던 스님이 건강을 되찾은 것은 스님이 ‘선재’라 이름 붙인 한 뇌사자의 장기기증 덕분이었다. (장기기증자의 신상은 공여자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스님은 “간이식을 받은 그 날부터 새 삶을 살고 있다”며 “두 번 사는 인생에 몸을 아낄 마음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고 했던가. 스님이 삶의 끝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만난 새 세상은 깨달음의 세계에서의 그것과 같았다. 그 후 스님은 지금까지 복지ㆍ행정의 도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왔다.

군종교구장 시절 일면 스님은 총무원이 군종교구에 지원하는 금액의 10배인 25억을 화주했다. 분규 속에 무주공산이던 광동학원의 이사장을 맡아서는 180억원의 정부 보조금을 확보하는 등 광동고 등을 명문학교로 탈바꿈시켰다. 봉선사 주지 때는 사찰 재정을 공개해 신도들로부터 큰 호응을 끌어내고 사중 재정을 튼튼히 했다. 비좁은 사무실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생명나눔실천본부는 스님이 이사장이 된 후 10억원에 이르는 사무실을 얻었다. 또, 해인사 승가대학 동문회장 시절에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동문회사무실도 갖췄다.

특히 군종교구장 시절, 일면 스님이 실무자들에게 “형식ㆍ위치를 따지지 말고 찾아주는 곳,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다”고 말하고 실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님의 원력은 빗물이 흐르는 군막사에 자리한 군법당을 비롯해 개신교인이 사단장인 부대에까지 장엄한 군법당을 서게 했다.
일면 스님은 “바른 일, 해야 할 일을 사심 없이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졌다”며 “‘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을 시작하니 주위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 도와줬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는 리더십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주인공이고 싶어하고 주불(主佛)이 되고 싶어 하는 탓에 사심이 생기고, 그로 인해 일이 어그러진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때 총무원장감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던 스님이기에 나그네의 얄궂은 질문이 갔다. “스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과 지위는 없어도 남에게 덕망 받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그거야 덕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삶이지요.”
지극히 세속적인 질문에 출가자다운 답이었다.
이어 일면 스님은 “큰 불사를 하다 보니 큰 덕이 부족한 것 같다”며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알리는 것이 내게는 대작불사”라고 말했다.
“성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차별 없이 모두 만나 불교의 상식을 전할 능력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면 스님에게 더 큰 능력을 구하는 바람은 있었지만 환경 탓은 없었다. 스님은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리에 구애받지 말고 평소에도 자기 소신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느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는 품은 뜻을 감추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과는 상반된 말씀이었다.
일면 스님은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삶을 강조했다. “회광반조를 나는 ‘항상 나를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바른 뜻과 행동을 되새겨봅니다.”

이와 함께 스님이 강조하는 말은 ‘늘 처음처럼’이다.
“‘늘 처음처럼’ 살기 위해 발심해 출가할 당시를, 은사스님에게 꾸중 들으며 시봉하던 그 시절을, 해인사 공양주 소임 살던 그때를 생각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매 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암사 스님의 방에 걸려 있기도 한 이 말은 일면 스님이 ‘회광반조’와 함께 가슴에 품고 자신을 점검하는 경구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불교의 밑거름이 되고 (주불이 아닌) 후불탱화가 되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일면 스님은 달랐다. 지금까지의 치열했던 삶처럼 스님은 법문도 “~하라”는 가르침보다는 “~하겠다”는 말로 솔선하고 있었다.
마조 스님은 건강을 묻는 원주에게 “일면불(日面佛, 수명이 1800세)이기도 하고 월면불(月面佛, 수명이 하루 낮과 밤)이기도 하다”고 해 생사의 경계와 구별이 부질없음을 알렸다.

“(주불이 아닌) 후불탱화가 되겠다”는 일면 스님의 원력은 일면불(日面佛)이다.



일면 스님은 ...
1947년 경북 영해 출생. 1959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명허 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67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과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5선 종회의원과 조계종 제3대 교육원장, 남양주 봉선사 주지, 광동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송산노인복지회관 운영위원장을 맡아 불교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글=조동섭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 cetana@gmail.com
2010-02-11 오후 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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