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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눈에 덮였다. 산과 들, 집과 길이 눈을 덮어쓰고 사금파리에 반사되듯 차가운 겨울 햇살을 쬐고 있었다. 온기를 잃어버린 겨울 햇살을 비집으며 조심조심 달리는 차들이 ‘문명의 이기’라는 오만한 이름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중이었다.
광릉 가는 길, 제설차가 올 겨를이 없는 수목원 길은 설국(雪國)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통로 같았다. 수목원 초입에서 좌측으로 차를 돌리면 곧바로 나타나는 봉선사 주차장. 눈이 수북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에 닿으니 누군가 얌전하게 길을 쓸어두었다.
정갈하게 열린 길에 서니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이불을 뒤집어 쓴 부도와 탑비들, 연꽃유치원건물 그리고 고목들도 팔을 벌려 눈을 받아들고 있었다. 연꽃이 만발했던 못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눈만 덮여 있다. 그 속에 마른 연줄기와 달그락거리는 연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찻집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절 안으로 들어서는데 청풍루와 회랑채 사이의 좁은 문에서 스님 한 분이 나오셨다. 봉선사능엄학림 강사 정원(淨圓 64)스님이었다. 허리 숙여 합장 인사를 올렸다.
“저는 스님을 뵈러 왔는데 스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나는 내 방에 가는데, 눈길에 시간을 잘 맞춰오셨군요.”
스님의 방은 정갈했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속에 원전 경전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책상위에도 원전들이 펼쳐져 있는데 까만 글씨들이 종이에서 튀어 오르는 듯 했다.
“원래부터 경학을 하셨습니까?”
여쭙고 보니 우문(愚問)이다.
“원래부터가 어디 있나요? 그저 인연이 닿았을 뿐이지요. 어찌어찌 그렇게 되었어요.”
우문에 현답(賢答)이 벼락같이 떨어진다.
어느 날 정원 스님은 어느 노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토굴을 하나 짓는데 일을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서 바랑을 챙겨 노스님께 갔다. 이런저런 일을 도와드리고 이윽고 토굴이 다 지어졌다. 그리고 그 토굴에서 지내게 됐다. 노스님이 법당에 경전 한 질을 모셨는데 <화엄경>이었다. 구체적으로 ‘80화엄’이었다. 경전을 보는 순간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냥 읽었다.
“80화엄의 현담이 모두 8권인데 그걸 읽으면서 나 스스로 번역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솟았어요. 과연 내가 이걸 번역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조차 할 틈이 없이 읽고 번역하는 일을 시작해 버렸습니다. 경문을 적고 번역을 하고 주석이 필요한 부분은 각주를 만들어 달았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나더라고요. 그렇게 현담을 번역해 보았는데 각주가 1000여개나 달았더군요. 아차,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처소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뜻이 있는 곳엔 길도 있다. 스님은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봉선사에서 ‘본사(本寺)가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서 공부하느냐?’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봉선사 능엄학림에 학인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됐다. 속가 나이 55세 때다.
“그 연세에 학인으로 학림에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다시 우문이다.
“아니지. 내 스스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학림을 마치는 6년 동안 즐겁게 공부했어요. 결국 공부는 대중과 함께 해야 하는 겁니다.”
학인으로는 배우는데 매진하고 학감으로는 학감으로서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며 봉선사의 한 축을 지킨 정원 스님은 ‘대중과 함께 하는 공부’의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홀로 하는 공부는 진전도 느리고 자칫 나태해지기 쉽지만 대중이 함께 하면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태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강의를 준비하고 가서 학인들과 마주 앉아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모르는 것을 학인들이 알아 오기도 해요. 또 학인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하려면 내가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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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반 4명 연구반 5명. 9명의 학인이 수학 중인 능엄학림에서는 4교(전문반)와 <화엄경>(연구반)을 주로 공부한다. 정원 스님은 4교를 강의한다. 봉선사 능엄학림은 가르치고 배우는 도량이기도 하지만 경전에 대한 깊은 연구로 튼실한 결실을 내놓기도 한다. <대승기신론> <능엄경> <서장> <선요> <금강경오가해> <금강경간정기> 등의 사기(私記)를 완역하여 조계종교육원에서 출간했다.
사기란 경전을 연구하는 스님들이 경문이나 선대 연구자의 주석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따로 써 둔 메모다. 그래서 해서나 행서로 흘려 쓴 글씨의 판독이 어렵지만 경전 본래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18세기의 호남지방을 대표하던 강백 연담유일(1720~1799) 스님과 영남지방의 대강백 인악의(1746~1796) 스님의 것이 대표적인 사기다.
정원 스님은 요즘 <원각경>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보통 <원각경> 연구자들은 함허(1376~1433) 스님의 주석서를 보는데 정원 스님은 규봉종밀(780~841)스님의 주석서와 사기들을 함께 대조하면서 번역을 하고 있다. 책상에 펼쳐진 몇 권의 경서와 참고서적들이 <원각경>관련 자료들이었다.
“여러 자료들을 대조하고 내용을 곰곰이 살펴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리고 공부가 짧은 제가 다 할 수 없으니 수시로 조실 스님께 여쭈러 가야해요. 조실 스님께서 결론을 내려 주시면 명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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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봉선사가 교종본찰인 것은 월초 스님에서 운허 스님으로 운허 스님에서 월운 스님으로 내려오는 대강백들의 굳은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봉선사의 어른들이 아니면 오늘날 동국역경원의 성과도 없었을지 모른다. 교학발흥에 대한 선대(先代)의 유지를 일생토록 지켜 온 조실 월운 스님이 역경과 후학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갖지 않으셨다면 오늘날의 봉선사 능엄학림도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분의 선지식이 한 도량의 꽃을 피우고 한 종단의 향기를 드높게 하는 것이다.
“조실 스님께 여쭈면 해결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그 높고 넓은 공부를 후학들이 다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조실 스님께서도 늘 더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경원(經院)’을 설립해 평생 경전 연구에 매진하는 스님들이 배출되길 바라시는 겁니다.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졸업을 해야 하고 졸업하면 배운 것은 다 잊어버리고 현실에 얽매여 학문을 놓쳐버리는 것이 지금의 세태 아닙니까? 그러니 조계종에 일생을 아무 걱정 없이 경학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설하나는 있어야 하는 겁니다.”
경전 공부는 원전 보면서 외우고 반복해야 지혜 생겨
교종본찰 봉선사 경학 수행도량으로 발전할 것 확신
정원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교종본찰 봉선사의 위의가 그냥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스님, 현담을 번역하신 원고는 어찌하셨습니까?”
“그거? 학림에서 공부를 하면서 검토해 보니까 참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고 어설프기 작이 없는 것이어서 불살라 버렸어요.”
다시 우문을 여쭌 것은 분위기를 전화하기 위해서였다.
“출타도 별로 안하시고 공부만 하시면 건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해 요란 떨 일도 없어요. 아침에 잠이 깨면(3시) 누운 채로 두 발의 안쪽 면을 열심히 부닥칩니다. 팔굽혀 펴기를 200회 하고 아령 들기, 발바닥으로 봉 굴리기를 합니다. 식사 후에는 2000보 이상 포행을 해요. 이 정도면 건강을 지키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매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다말다 하면 성취할 수 없잖아요.”
경전을 공부를 하는데 있어 정원 스님이 강조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외우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반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혼자 보다는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원전을 공부해야 그 대의를 밝게 알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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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다가 중요하다 싶은 것은 따로 메모를 해서 외워야 합니다. 특히 경전공부에 있어서는 반드시 외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경의 방대한 내용들을 확연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줄기를 간추려서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주 나오는 문장들이나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구절들의 용례 등도 외워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하는데 속도가 붙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요.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갈수록 외우는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원 스님은 요즘 예불을 하기위해 법당으로 가는 동안 <원각경>의 대의를 간추려 적은 문장들을 암송한다. 외고 또 외우면서 그 행간 담긴 진리의 향기를 맡는 재미다. 어느 경전이든 한 번 봤다고 공부를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공부로 끝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공부다. 그래서 정원 스님은 자만하지 말고 본 경전을 또 보는 자세가 없이는 공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원전을 공부하는 것이 좋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미 누군가가 번역 해 둔 것에 의지해 공부하면 그 번역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원전을 보면서 그 듯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폭넓은 사고의 틀이 형성되고 거기서 ‘번쩍’하는 소식이 오기도 하는 것이다. 스스로 공부의 힘을 길러가는 것이다.
“서산 스님께서 ‘경야(敬也) 복야(伏也)’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공경진심(恭敬眞心)과 굴복무명(屈伏無明)인데, 참된 것을 공경하고 무명을 불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의 정신자세를 말하는 것이지요.”
외우고 반복하고 함께하는 공부 방법이 어찌 강원이나 학림의 스님들께만 해당하겠는가? 학교교육의위계가 무너진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에서도 전통 강원의 교습법(논강)과 집중력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님께서는 어떤 경전을 좋아 하십니까?”
마지막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결정적인 우문이다.
“특별히 좋아할 것이 없어요. 다 훌륭한 가르침이고 지혜의 말씀이니까요. 요즘 <원각경>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원각경>이 참 많이 와 닿습니다. <대승기신론>도 매우 권하고 싶은 가르침입니다. 거기서는 ‘4신’과 ‘5행’을 강조하는데 우선적으로 ‘근본을 믿으라(信根本)’고 하거든요. 일체법이 진여로 평등한 것을 믿지 않는다면 불교 공부를 할 수 없고 수행도 신행도 할 수 없습니다. 근본을 믿고 불법승 삼보를 믿으라는 가르침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시절입니다. 보조국사의 <진심직설>도 깊이 새겨 볼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경우 포행하면서 ‘제1 법회인유분’에서 ‘제5 여리실견분’까지를 반복해서 외웁니다.”
물질이 풍족해지고 교통과 통신 수단이 첨단으로 발달한 시절, 수행자들의 공부도 진화해 가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심(眞心)’과 ‘성심(誠心)’이라는 수행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변할수록 경문 한 글자, 한 단어, 한 대목을 두고 몇 날을 고민하는 학인의 정신이 더욱 빛나야 할 때이기도 하다. 학인의 정신이 진심과 성심을 벗어난다면 팔만대장경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요즘 조실 스님을 도와서 운허 큰스님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방대한 자료도 놀랍지만 모든 자료들에 스며 든 큰스님의 정성이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신도에게 주는 계첩 한 장에도 반듯한 글씨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신 큰스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보이니까요.”
새삼 교종본찰의 엄숙한 분위기가 주는 무언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는 정원 스님은 능엄학림에서 많은 강백들이 배출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정원 스님은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여 파주 고령산 도솔암으로 출가 했다.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 했으며 군대를 다녀 온 후 독학으로 경전을 연구했다. 포교 현장에서 청년법회를 이끌기도 하고 봉선사 총무국장 등 소임을 맡았다. 도솔암과 불암산 석천암에서 정진했다. 2002년 봉선사 능엄학림에 입학하여 과정을 마치고 학감을 거쳐 현재 강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