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신행 > 법문·교리
인문학적 건강론, ‘건강은 체계다’
배영순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특강




주제 : 인문학적 건강론 - ‘건강은 체계다’
일시 : 2010년 1월 5일 저녁 7시
장소 : 서울 장충동 우리함께회관 만해NGO센터
강사 : 배영순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문화일보에 ‘방하차서 건강이야기’ 연재)



배영순 교수

여기 건강을 의학적 차원을 넘어 인문학적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 건강이라면 몸부터 생각한다. 몸을 사리고, 조심하고 아낀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 서로 가지려고 혈안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챙기는 사람들이 되려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삶과 무관한 건강의 추구는 건강관 자체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배영순 교수는 이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질병의 인과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여불교재가연대(공동대표 김동건)가 경인년 첫 리더스 포럼에서 배영순 교수를 초청, 진정한 건강이란 무엇인가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몸이 아픈가 사람이 아픈가


보통 사람들은 내가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몸이 아파서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내 생활이나 삶은 이상이 없는데 몸만 아프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플 때는 이미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아플 수밖에 없는 인과가 있고 그 원인력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잘못 썼든 마음을 잘못 썼든 그 결과로 아픈 것입니다. 건강함도 내 탓이고 아픈 것도 내 탓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보지 않고 몸만 보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입니다. 사람의 성향이나 습관, 마음상태 등을 보지 않고 몸만 보기 때문에 근본적 치유방법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병의 인과를 무시하고 들어가는데 어떻게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올바른 처방이 나오겠습니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반성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행했을지언정 그것을 반성하고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반성작용이 있는 인간은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픈만큼 성숙해 진다


몸이 아프고 병이 들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것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몸이 보내는 성스러운 신호입니다. 문제는 몸이 아프고 병들었을 때, 질병의 인과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치유하면서 인간인 성숙해집니다. ‘아픈만큼 성숙해 진다’는 것, 그냥 하는 이야기는 아니죠.
가령 소화불량의 경우 소화제를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 하지만 정작 ‘소화불량’의 원인은 묻지 않습니다. 사실 위장장애가 생기고 소화불량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로는 다양합니다. ‘소화능력’이라는 것, 그것이 단순한 음식물의 소화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소화능력, 사회적 관계의 소화능력, 일의 소화능력, 새로운 것의 소화능력 이런 것들이 원활하지 않을 때 위장 기능이 저하되고 위장장애 현상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위장기능이 저하되면 인간관계 자체도 저하 됩니다. ‘신경성 위장병’이란 것이 그런 것의 일부입니다. 인간과계에서 편협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리기 거부하는 사람들은 비위(脾胃)가 약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음식도 지나치게 가려서 먹지만 인간관계에서도 지나치게 예민하고 사람을 많이 가리죠. 반면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인간관계에 충실하고 두루 원만한 사람들은 비위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위장이 나쁘고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균형을 먼저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소화에 편한 음식만 찾고 위장에 좋은 것만 찾는다면, 점점 더 예민해 지고 ‘고질병’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과음 과식으로 인해 소화불량이 오는 것, 과음 과식을 하게 되는 생활상, 정신적 요인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 약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약물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생력, 자기 치유력은 줄어듭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근본적 원인은 은폐되고 정신과 육체를 더욱 분열시키죠. 약에 의존하면 할수록 몸이 말해주는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세계와도 단절됩니다. 무얼 잘못해서 병에 걸렸는지를 묻지 않고, 병이 들고 낫는 인과를 무시하는 겁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리더스클럽 회원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 인과를 수용할 때 치유력이 작동


병이 드는 경로가 있으면 나을 수 있는 경로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의 인과를 외면한 채 병이 낫길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간혹 기도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병을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에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애절하게 기도를 시작하는데 기도를 하다보면,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죽일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제서야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살아야할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깨닫고 살려달라는 구원의 기도에서 ‘참회의 기도’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때 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것이죠. 스스로 자신을 병들게 만든 원인과 병이 걸리는 인과를 직시하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순간을 참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비로소 병이 낫는 것이죠. 요컨대 병의 인과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자생력과 자기치유력이 작동하면서 병으로부터 회복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처럼 인과를 수용할 수 있을 때, 자생력과 치유력은 작동합니다.
또, 해체적인 건강관은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기치유력을 제거하면서 병원에 의지하게 만들고 종속시킵니다. 예를 들어 사교육은 스스로 사고하고 공부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주는 것이지만 사실 자생력을 무너뜨리고 사교육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병을 가져왔습니다. 병원도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 건강은 신체ㆍ정신ㆍ사회적 안녕의 상태


건강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 ‘몸에 탈이 없이 튼튼한 것 또는 그런 상태를 일컫는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또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말하는 건강개념은 단순히 질병이나 결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인체의 세포 수는 수십 조에 이르고 그 종류만도 수백만 가지입니다. 그리고 12경락 365혈, 오장육부가 정상적으로 상호작용 할 때 건강한 것입니다. 인체는 고도의 유기체적 질서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육체적 건강만을 놓고 본다면 오장육부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때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오장육부가 상호 연관적 체계로 작동하고 있을 때, 유기체적인 통일을 이룰 때 건강한 것입니다. 체계가 무너지면 인체는 병들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건강은 체계입니다. 체계를 떠나서 건강을 말할 수 없어요. 체계로부터 일탈할 때, ‘탈이 나는 것’입니다. 안녕(well-being)은 체계 속에 있을 때 성립됩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음식을 찾아 먹으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습니다. 즉 삶의 방식에 달린 것입니다.
교단에 서는 사람들의 경우, 아침에 운동을 하고, 영양식을 하고 보약을 먹고 그렇게 자기 몸 관리에 철저하면서도 수업준비는 게을리 하고 학생들 가르치는데는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들이 과연 건강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열심히 예습하고 또 교단에 서면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는 사람들, 그렇게 몸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건강할까요? 정말 건강한 사람들, 건강해야할 사람들은 후자입니다. 몸을 잊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몸 걱정을 않고 살 사람들입니다. 정말 건강한 사람들은 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잘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관계속에서 몸을 연소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 병을 고친다


정말 아파본 사람들은 결국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관계지형을 일그러지게 한 자신의 욕심에 대한 반성을 의미합니다. 그때 관계적 합리성이 회복되면서 자기 치유력이 작동한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옛말에 진정한 의사는 약으로서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려서 병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고쳐서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의 순도는 관계적 합리성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가져갈수록 그만큼 욕심을 부리는 정도가 심하며 관계는 꼬일 것입니다.
반면, 관계설정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일수록 그리고 상호 등가적일수록 마음의 순도는 높아집니다. 마음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다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말하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관계적 합리성 속에서 ‘나’라는 것이 완전 연소될 수 있을 때 무아(無我)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보편적 상호연관의 질서체계속에 녹아들어 갔을 때 마음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얼룩진 관계들로부터 그리고 아집(我執)의 중력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흔히 ‘성질’을 고쳐라, ‘심뽀를 바로 하라’는 소리도 이 말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관념적 유희가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명확한 자기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병든 생활방식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선주 기자 | zoo211@buddhapia.com
2010-01-12 오전 11:27: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