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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간다. 같은 시간을 흘려보내지만 사람마다 희비는 다르다. 자식이 태어나 저절로 큰 웃음이 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부모를 잃어 눈물을 훔친다.
나그네가 떠나기 전 서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갛게 개어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달려 도착했던 진주에서의 용무를 마치고 늦은 오후에서야 남해를 돌기 시작했던 나그네. 먹구름 가득한 하늘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눈길을 헤치며 한밤중에야 도착한 변산반도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튿날, 날이 바뀌고 하늘은 개었지만 전날까지 내린 눈으로 여전히 세상은 온통 하얗다. 나그네는 호남 3대 명지로 꼽히는 봉래산 월명암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밤새 제설된 덕분에 월명암 입구인 남여치까지 수월하게 차를 몰 수 있었다. 남여치부터 월명암까지는 40분 거리. 그나마 인근 실상사지 등 다른 등산로와 비교하면 가장 가까운 거리의 출발지가 남여치이다. 하지만 눈이 내린 터라 얼마나 더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나그네는 등산용 스틱과 아이젠을 차고, 짐을 주섬주섬 챙겨 겨울 산행을 시작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 사이로 고맙게도 사람이 하나 지날 만큼 길이 보였다. 누군가 산을 오르면서 지나간 자리였다. 가파른 언덕에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다 잠시지만 평지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숨쉬기도 몸도 편안해졌다.
“사람 사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월명암에 이르는 길일뿐인데 길의 높낮이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나그네의 마음이 간사했다. 설산을 오르는 동안 나뭇가지가 휘도록 듬성듬성 얹어진 눈덩이며, 가지 끝마다 맺힌 눈꽃이며 눈이 시리도록 볼 수 있었다. 길을 걸은 지 1시간 여가 지났다. 맞은편에서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 월명암은 얼마나 더 가야하나요?” 나그네가 물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저 고개를 돌면 바로에요.” 꼴딱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고개를 넘었지만 월명암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 속았다!” 하지만 나그네가 스님을 원망할 것은 없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은 그 스님의 기준에 따른 표현이었을 뿐, 같은 거리임에도 월명암을 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착하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것은 나그네의 탓 아니던가?
조금 더 능선을 따라 돌아 월명암에 발을 내딛었다. 도량은 온통 눈으로 장엄돼 있었다. 법당에 들어 삼배를 올리고 주지 천곡 스님을 찾았다. “공양부터 하자”는 스님의 말에 산에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잊고 있었던 허기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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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나 찾아온 나그네에게 군상을 내면서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미소마저 띄던 공양주 보살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늘 웃으며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보시(和顔布施)’라 하지 않았던가?
공양을 마치고 나와 대웅전 뒤편 사성선원(四聖禪院)에 오르는 길에서 만난 종각의 종에는 시가 한 수 적혀 있었다.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目無所見無分別)
귀에 소리 없는 소식 들으니 시비가 끊인다.(耳聽無聲絶是非)
사량, 분별,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分別是非都放下)
단지 마음의 부처를 보면서 귀의를 하소.(但看心佛自歸依)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 거사의 게송이었다. 월명암은 불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긴다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이다. 네 성인과 여덟 현인, 열두 법사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동해 낙산사 일출과 비견되는 운해가 어우러진 월명 일출과 낙조로 변산반도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월명암을 부설 거사는 신라 신문왕 12년(692)에 창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의병근거지로 활용되다 전소되고 한국전쟁 직전에는 방화로 소실되며 민족의 아픔을 같이 했다. 1954년 재건됐으나 노후화된 것을 1999년 주지로 부임한 천곡 스님이 상수도시설 및 석축, 범종불사에 이어 사성선원 불사까지 원만하게 회향시켰다.
원효, 의상과 7세기 신라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인 부설 거사는 본래 스님이었다. 선묘의 사랑을 영주 부석사의 신장으로 승화시킨 의상은 청정비구의 삶을 살았고, 원효는 요석 공주와 잠시 살면서 아들 설총을 낳고 다시 승려생활로 돌아갔지만, 부설은 달랐다.
도반인 영조ㆍ영희 스님과 수행하던 부설은 만경 부근을 지나다 묘화 여인의 간곡한 청혼을 받았다. 묘화는 부처님 곁에 피어 있는 연꽃 한 송이를 꺾은 죄로 벙어리가 돼 이승으로 추방된 절세미인. 20년 동안 입을 열지 않던 묘화가 부설을 보더니, 부설 스님과 자기는 삼생에 걸친 인연이 있는 천생배필이라며 결혼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를 무시하고 떠나려는 부설에게 묘화는 칼을 들고 “불도를 닦아 중생을 구제하려 하는 분이 제 한목숨 구하지 못한다면 장차 큰 뜻을 편다 해도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하며 죽기로써 매달렸다. 묘화와의 인연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은 부설은 두 도반에게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부설 거사는 묘화와 결혼해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남매를 낳고 살면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설이 사는 마을 하늘엔 언제나 하얀 눈이 흩날렸다 해서 두능리를 부설촌(浮雪村)이라 부르게 됐다. 부설 거사의 법명도 여기에서 유래 됐다.
어느 날,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영조ㆍ영희 스님이 부설 거사를 찾아왔다.
“우리는 목표한 공부를 마치고 왔네만 자네는 여자에게 빠져 낙오자가 됐으니 참 딱한 일이네.” 부설은 “세 개의 병에 물을 담아오너라. 서로의 공부가 얼마나 익었는지를 시험해 보리라” 하고는 들보 위에 병을 매달아 놓고 각기 병 하나씩을 치게 했다.
영조ㆍ영희 스님이 친 병은 깨지면서 병 속의 물이 쏟아졌다. 부설 거사가 내리친 병은 깨졌지만 물은 병 모양을 한 채 그대로 공중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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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년 부설 거사 내외는 남매를 데리고 지난날 공부하였던 변산으로 들어가 월명암 근처에 부설암을 지었다. 묘화 부인을 위해서는 묘적암을 세웠다. 아들 등운(登雲)을 위해서는 월명암 뒤편의 등운사를, 딸 월명(月明)을 위해서는 지금의 월명암(月明庵) 자리에 월명암을 창건했다. 이름처럼 무명 속의 중생에게 길을 비춰주는 달빛인 곳, 봉래산 월명암이다.
월명암 사성선원은 부설 거사를 비롯해 묘화 부인과 등운, 월명 남매 온가족이 도통해 네 성인이 됐다는 돼서 유래했다. 가족이 함께 도통한 것은 부설 거사 일가가 유일하지 않을까?
월명암에 도착한 후에도 사성선원에 발을 들이기는 산길을 걸어온 만큼이나 오래 걸리는 듯했다. 더욱이 안거중이라 나그네의 행동은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다실에 들어서 어디 앉을지를 고민하는 나그네에게 대중스님들이 저마다 이구동성 말을 건넸다. “거, 윗목도 아랫목도 없응께. 아무데나 앉으소.”
그래서 앉은 자리가 방 한가운데였다. 방문이 열리고 노스님 한분이 걸어 들어왔다. 미수(米壽)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 도륜 스님이었다.
삼배를 올린 후에도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다시 머뭇거리는 나그네에게 스님은 “자기가 앉고 싶고, 앉아서 편하면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말했다.
도륜 스님의 말에 나그네는 용기를 내어 스님을 마주하는 한 편으로 엉덩이를 잠시 걸쳤지만 영 불편한 것이 제 자리가 아닌 듯 했다. 무엇보다 절절 끓는 온돌에 엉덩이가 뜨거워 스님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큰스님, 선방으로 가십시다.” 한 스님의 말에 도륜 스님을 비롯해 대중스님 모두 그러자고 동의했다. 자리를 옮겼다. 안거중인 선방에 들어와 앉았다는 경험만큼이나 엉덩이가 뜨겁지 않아 살 것 같았다.
사성선원에는 일곱 스님이 안거 중이다. 선원 용상방에는 선덕인 도륜 스님을 비롯해 대원 스님(前 내장사 주지)이 입승을, 지안 스님(前 실상사 주지)이 원주를, 각일ㆍ정허ㆍ성락 스님 등이 한주로 적혀 있다. 안거중인 대중이 대부분 전ㆍ현직 주지로 중진스님들이었다. 사판승인 스님들이 이판을 벌인 까닭은 무엇일까?
나그네가 도륜 스님에게 물으려던 찰나, 대원 스님이 말을 꺼냈다. “그동안 소임살이에 정진을 등한시 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어 후학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행인이 되고자 모인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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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륜 스님은 “내 나이가 많지만 내게는 아직도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다”며 “세월이 갈수록 남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 혼자서는 공부가 안되다 보니 같이 해보자고 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 설명했다.
50여 년 수행의 길을 걸어온 노장으로서는 참으로 겸손한 말이었다. 스님의 젊은 시절도 열정으로 가득 찼었다. 진실로 사는 방법을 고민하던 때였다. 천하가 내 것 인양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그 때 우연히 절을 찾았던 도륜 스님은 청화 스님에게 “부처님께 참배 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을 인연으로 수행자가 됐다.
부처님 전에 처음 절을 올린 그날 밤부터 수일간 청화 스님은 아직 출가전인 도륜 스님에게 불교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설명했다. 도륜 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위대한 성인인 부처님을 본받고 싶어 수행을 했고, “내가 완성되고 충분하면 그곳이 평온하다”는 생각에 무소유를 실천하는 탁발의 길을 걸었다. 스님이 대중생활을 하지 못하고 탁발에 나선 것은 말을 더듬던 습관 탓도 있었다. 나그네가 만난 스님은 오랜 수행 끝에 말을 더듬지 않았다.
당시 청화 스님이 자기 공부가 되기 전이라 해서 상좌를 두지 않았던 까닭에 스님은 탁발만 계속하다가 은사인 청우 스님을 만나 정식으로 스님이 됐다.
도륜 스님은 “인간이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주관”이라며 “행복의 전제조건인 자기완성을 완벽히 이룬 존재가 부처”라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하나가 전체인 것을 알고, 전체가 하나되는 길만 알면 생명의 본질을 꿰뚫고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오직 지금에 충실하며 꾸준히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말했다.
“33조사의 모든 말씀은 조사가 믿음을 바탕으로 직접 체험한 견성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머리로, 말로만 아는 해오(解悟, 알음알이)의 단계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이 깨달음이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유한된 것은 상대에 머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 그것만이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거꾸로 믿음은 곧 절대인 것이 됩니다.”
도륜 스님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려면 인생의 목표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이 말하는 절대적인 인생의 목표란 성불이다.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가요? 돈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 모두 부질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역사를 살펴보세요. 돈과 명예 등 세속적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유한한 겁니다. 상대적이에요. 변치 않는 길을 생각하고 그 길을 걷고자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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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를 권유하는 도륜 스님에게 나그네는 흔쾌히 대답할 수 없었다. 처자식 핑계와 함께 “그저 사는 것이 괴롭다”는 뻔한 말을 하는 나그네에게 스님은 “오온이 모두 공해야 일체 고액을 넘어선다”는 법문을 설했다.
“오온이 ‘나’라는 착각에 빠져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스님 법문의 요지다. 오온을 두고 잠시 법거량과 같은 문답이 오갔다.
스님은 “부처님을 아무리 대상으로 의지해도 내가 성불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며 “내 밖에 대상을 두지 말고 자기 자신(法身)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하나, 둘씩 깨달은 사람들이 늘어갈 때 세상이 맑아지고 밝아진다는 것이 도륜 스님의 지론이다.
“촛불처럼 자기를 태워 세상을 비추는,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실로 전체를 아우르는 삶을 살았을 때 참다운 자기를 발견하게 돼요. 이렇게 이타행으로 사는 사람, 자기 완성된 사람이 모두 모인 곳 그곳이 불국토입니다.”
스님은 ‘꾸준함’도 강조했다. “대학이 4년 과정이죠? 대학을 나왔다고 하려면 졸업장을 받아야 하는데, 이 졸업장을 받는 것은 순간입니다. 공부도 똑같아요.”
또, 도륜 스님은 “인천의 스승이 되려면 스님들은 밀ㆍ현교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행이 본래 하나이기도 하지만 참선, 진언, 간경, 주력, 염불 등 무엇이라 할 것 없이 모두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스님은 “오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현상에 치우쳐 판단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 하나만 믿고 따라가자”고 당부했다.
“일렁이는 파도의 끝이 ‘나’인줄 착각하지만 내 본마음은 흰 거품 이는 성난 파도가 아니라 큰 바다입니다.”
진아(眞我)와 본성 찾기를 강조한 스님은 2010년 새해를 맞은 불자들에게 “인생의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살자”고 당부했다. “길을 나설 때 갈 곳을 정하고 가면 언제라도 그 목적지에 다다르지만, 목적 없이 가다보면 중간에 아무 곳에서나 주저앉게 됩니다. 나는 비록 촌부이지만 우리 민족의 저력을 믿습니다. ‘참나’를 찾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월명암을 내려오는 길, ‘흩날리는 눈(浮雪)’이 대밭을 덮었다. 바람에 댓잎이 부대끼는 소리에서 나그네는 부설 거사의 ‘팔죽시(八竹詩)’를 들었다.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此竹彼竹化去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風打之竹浪打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粥粥飯飯生此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是是非非看彼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賓客接待家勢竹)
시장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세월대로(市井賣買歲月竹)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萬事不如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然然然世過然竹)
#도륜 스님은 법명은 도륜(道輪), 성암(誠菴), 법호는 백은(栢隱)이다. 1927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해 30대에 청화 스님을 만나 불연(佛緣)을 맺었다. 은사인 청우 스님을 모시고 대흥사 총무ㆍ재무를 지내면서 대흥사 불사를 견인했다. 강진 무위사와 보성 천봉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현재 보성 봉갑사 회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