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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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빛고을아카데미 제6강 청화스님
세상 감쌀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사세요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세상이 많이 어둡고 답답합니다. 특히 저는 서울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더욱 더 농도 짙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빛고을 광주에서 눈부신 빛을 좀 충전하려고 왔습니다. 광주라고 하는 곳은 스쳐가기만 해도 빛이 충전되고 또 다녀가기만 하더라도 뼛속 깊이 광주가 가지고 있는 빛이 스며들어서 사람을 밝게 해주고 건전하게 해주고 그리고 깨워주기도 합니다.

오늘 법문 주제는 ‘시심(詩心)으로 세상을 깨우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심으로 세상의 잠을 어떻게 깨웁니까? 요즘 세상의 잠은 철근을 몇 근 넣고, 거기에다 콘크리트를 깊게 부어서 콘크리트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쇠망치로 두들겨도 까딱 않는데, 시심으로 어떻게 그것을 깨울 수가 있습니까? 오늘은 특히 시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보우(普愚,1301~1382) 스님 시를 한 편 살펴보겠습니다.

눈이 맑으니 보이는 산이 희고
옷이 깨끗하니 마시는 물이 달더라
안심이라고 하는 건 다만 이런 것
어찌 다시 북조 관문에 참여하랴.

이 시에는 아주 편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편안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산을 보게 되면 희게 보이고, 또 물을 마시게 되면 그 물이 달더라. 왜 그렇게 됐는가? 산을 바라보는 눈이 맑기 때문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하다고 하는 마음의 토대는 청정한 것입니다. 이른바 맑고 맑아서 욕망에 대한 껄떡거림이 완전히 정지되었고, 그리고 깨끗하고 깨끗해서 일체 근심, 걱정, 번뇌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산이 희게 보인다고 하는 것은 눈이 하얗게 쌓인 그런 설산이 아닙니다. 희게 보인다고 하는 산은 순수한 마음으로 보는 산을 말합니다. 아주 오롯한 순수한 마음, 그 상태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안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와 같이 사물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고, 일체 환상이나 망념이라는 것을 덮어쓰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편안한 마음은 근심, 걱정, 번뇌가 없으므로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김광섭(金珖燮, 1906~1977)이라는 시인은 ‘마음’이라고 하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이 시에는 불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 시를 보게 되면 이 시는 마음의 속성을 고요한 물결로 상징했습니다. 사실 물결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요한 물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의해서 이미 마음이 물결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마음의 속성인데 거기에 바람이 불면 어떻습니까? 물결이 더 강해지겠지요. 그래서 마음이 산란해질 것이고, 또 직접 와서 바람이 부딪치는 그것에만 고요한 물결이라고 상징한 마음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녜요.

여기에서 보여준 마음은 세 가지 악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내 마음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어요. 돌을 던지는 것은 나를 미워하고, 어떤 공격을 하고, 그래서 어렵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내 마음이라고 하는 호수에다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가는 사람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손해와 피해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 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나를 유혹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악조건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서 자칫하게 되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고를 저지를지도 모르고, 내가 서야할 방향을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불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존형의 인간들입니다. 지나치게 어떤 관계, 무엇에 의존하고 그러면서 어떤 자기 주체성이라든가, 자아의 강력한 의지라든가, 이런 것이 약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흔들리고, 뒤집히고, 깨지고, 상처입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의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1885~1930) 라고 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인간의 마음’이란 주제로 시를 썼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탐험할 엄두도 못 내는
또 하나의 우주

이상한 잿빛의 거리가
맥박 치는 인간의 마음을
우리의 창백한 지성으로부터 멀리한다.

먼저 간 사람들은 육지에 아직 닿지 않았다.
콩고나 아마존보다 더 어두운
충만과 욕구와 슬픔의 강이 흐르는
내부의 신비를 남자도 여자도 아는 이가 없다.


이 시에는 알 수 없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를 이 시는 두 가지로 말해놓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우주처럼 광활해서 도저히 탐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했지만 총체적인 집합된 기술이라는 것이 겨우 달나라에 가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달이라고 하는 것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보면 아주 미세한 하나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주와 마찬가지로 너무 광활해서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과 지성 사이에 알 수 없는 잿빛의 거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잿빛의 거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지성 사이의 거리를 자꾸 넓혀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원초적인 신비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 선생의 문집을 보게 되면 그 분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하는 한 글자 속에 있으니,
굳이 고생스럽게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

이 시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만사와 흥망을 좌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사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오늘 법회 장소에도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항상 이런 양립된 그런 상황 속에서 결정은 누가 합니까? 옆에 사람이 그렇게 하라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정한 것입니다. ‘내가’ 라는 주체가 뭐냐? 마음인 거예요. 내 마음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하고 선택할 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예컨대 어떤 것을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함에 있어서 욕망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지혜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게 되면 그것은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시집을 보게 되면 ‘진달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를 읽게 되면 바로 넓은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 보기 역겨워 가는 사람은 나를 인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욕적으로 보고 버리고 가는 사람입니다. 역겹다고 떠나는데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산에 가서 연분홍 진달래꽃 한 아름 따다가 그 사람 가는 길에 뿌려줘요.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나서 눈물은 왜 흘리지 않는지 압니까? 떠나는 사람 맘 약해질까 봐서. 그러니까 눈물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얼마나 넓은 마음입니까? 그러면 이런 사람은 왜 이렇게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느냐?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는 마음이라면 절대 그렇게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넓은 마음을 갖고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만해 스님 잘 아시죠?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 스님 시집에는 ‘나룻배와 행인’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 시에서는 깊은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나룻배로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나룻배는 행인들이 소똥을 밟고 온 발이든, 진흙이 묻은 흙발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옅으나 깊으나 급한 여울이나 일단 한 번 태웠다 하면 끝까지 저 쪽 피안에 건네다 주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투철한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룻배라고 하는 마음은 일체 보상을 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에서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갑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원망도 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전적인 헌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직 저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헌신이 바로 마음 중에서도 깊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행인과 나룻배에서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서정주(徐廷柱,1915~2000) 시인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다 안끼어 드는 소리…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이야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산(山)도 산(山)도 청산(靑山)도 안끼어 드는 소리.

좋지요. 이 괜찮다는 말은 이른바 인간의 흉허물을 다 초월한 사람의 마음, 어떤 성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체 분별이나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성자 같은 품안이기 때문에 까투리 새끼건, 메추라기 새끼건, 낯이 붉은 처녀아이들이건, 다 깃들이어 오면 다 품어줍니다. 그리고 우는 사람이나 웃는 사람, 수그린 사람이거나 새파랗게 언 사람이든 다 똑같이 평등하게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괜찮다’하며 이렇게 등을 다독여 주면서 희망과 위로도 주고, 또 힘도 충전해주고 그렇습니다. 이 가슴이 얼마나 크냐하면 깃들어 오는 모든 생명을 다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거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 시인 중에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라고 하는 시인은 개신교 신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 반해서 ‘광휘 속의 부처(Buddha in der glorie)’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바로 그 눈부신 빛 한가운데 있는 부처님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중심 속의 중심, 핵심 중의 핵심.
굳게 닫힌 채 달콤해져 가는 편도,
하늘의 모든 별들까지도 그대의 과육(果肉)에
인사를 드리노라. 보거라, 그대!
아무것도 그대에게 매달린 것이 없음을.
그대 과피(果皮)는 무한 속에 묻혀있고
거기서 과즙은 진하게 짜여지네.
밖에서는 광채까지 번쩍이며 그대를 비춰주네.
저 위에서는 온갖 태양들이
가득 가득 빛을 뿜으며 돌고 있으니
그대 내부에서는 태양들을 뛰어넘는 일쯤 시작된 모양이네.

이 시속에는 둥그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둥그런 마음은 어디서 볼 수 있느냐면 “보라. 그대 아무것도 그대에게 매달린 것이 없음을. 그대의 과피는 무한 속에 묻혀있고 거기서 과즙은 진하게 짜여지네”라는 대목입니다. 릴케라는 시인은 싯다르타가 6년 수행을 통해 성불한 내용을 하나의 과일로 이 시 속에서 형상화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일의 크기가 얼마냐? 무한속에 묻혀 있어요. 무한히 큰 과일에서 진하게 짜여진 과즙이 있습니다. 이 과즙이 무엇이냐? 과즙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결실인 까닭에 거기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혜와 자비인 것입니다.
자비는 합성어입니다. ‘자(慈)’라고 하는 것은 기쁨을 주는 사랑, 그리고 ‘비(悲)’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제거해주는 사랑. 그래서 기쁨을 주는 사랑과 고통을 제거해 주는 사랑,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자비가 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완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비라고 하는 것은 어떤 흠결이 없어서 둥근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시를 통해서 편안한 마음, 불안한 마음, 알 수 없는 마음, 흥망을 좌우하는 마음, 넓은 마음, 기쁜 마음, 거룩한 마음, 둥근 마음. 이렇게 여덟 가지 마음을 시 속에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여덟 가지 밖에 없느냐? 아니죠. 불교에서는 팔만사천 번뇌를 이야기합니다마는, 가짓수로 한다면 팔만사천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죠.

이러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마음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불안한 마음을 많이 쓰거나, 알 수 없는 마음을 많이 쓰거나 그런 것입니다. 자기의 업이나 생활환경, 습관에 따라서 자꾸 옹졸한 마음, 인색한 마음, 좁은 마음 이런 것을 쓰는 것입니다. 보다 월등히 훌륭하고 좋으며 가치 있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사람 가슴에는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인생은 마음먹기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괴롭다, 슬프다 그런 것들은 그렇게 우리가 느낄 뿐이지 실체가 없습니다. 슬프다고 했을 때 어떤 모습입니까? 단지 느낌뿐입니다. 또 기쁨, 행복, 고통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원리를 알고 산다면 마음을 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씀에 따라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도 훨씬 유연함을 얻을 수 있고, 여러 가지 많은 조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고 그런 속에서 나름대로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마음을 크게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이 법문 듣는 이후로 좁은 마음을 버리고 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감쌀 수 있는 세상을 감쌀 수 있는 이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리=양행선 광주 전남지사장 |
2009-12-07 오후 1:38:00
 
한마디
포교가다죽어님 혼자 보기 아까운 좋은 글이네요. 근데 청화 스님이 잘 하는 노래? 한 곡 불러주고 할 일 다 한 거 마냥 하지 마시고 포교원장이라도 맡아서 직원들 싹 갈아치우고 신도시 포교 좀 합시다. 아니면 법륜 스님이라도 좀 밀어 주시던지요.....
(2009-12-22 오후 1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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