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여래의 사자를 만나다 4
일시: 11월 17일
장소: 광주동구KT문화센터
강사: 지홍 스님(서울 불광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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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저는 서울 불광사에 있는 지홍입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해야 될 이야기 주제는 ‘아름다운 불광공동체’입니다. 불광(佛光)을 여러분들은 잘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잠실에 불광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좀 특별한 절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불광 창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좀 말씀을 드리고 불광운동을 전개하는 과정과 불광의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라고 하는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불광은 1974년도에 ‘불광회’라는 명칭으로 창립이 됩니다.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70년대라고 하면 6.25 한국전쟁의 폐해를 겪고 이승만 독재와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와 군부독재, 그리고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격랑의 한 복판에서 민초들이 방황과 분노와 좌절을 겪은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러한 격랑을 겪은 시대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의 측면에서 보면 54년도부터 시작되어 10여년을 끌던 종단정화의 광풍이 지나간 후, 정화의 정착과 교단정치 안정이 기대되는 그러한 시기가 70년대입니다. 이 정화가 어느 정도 끝나고 조계종의 체계가 세워지면서 종단 정치가 안정이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중앙 종단은 권력과 각 사찰의 이권을 둘러싼 분규와 소송이 끊어지지 않아 교단의 혼란과 위신이 사회적으로 날로 추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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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불교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500년간의 배불정책 하에 불교가 탄압을 받고, 구한말 이후 1970년대까지도 계속적으로 서구 외세에 의해서 전통문화나 전통종교가 계속적으로 우리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종교들은 외세의 힘을 입어서 정치, 교육, 복지 그리고 신앙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몸살을 앓는 시기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당시의 신앙형태는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무속화가 되어가면서, 절에 가면 스님들이 점이나 사주관상을 보고, 또 굿을 하는 것이 일반 사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불교가 수행을 하고,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사회적 역할을 통해서 사회를 정화시키고 선도하며 우리 사회의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 종교적 역할을 하는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기복적이고 무속화 되어 불교 전체가 대중화 되지 못하고 개인화 되고 있었습니다. 또 사찰이 시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산 속에 위치해 있어서 대중과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종교들은 6.25 전쟁이후부터 피폐된 사회에서 사회복지와 교육을 통해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그 부분에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투자를 하였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런 고민을 할 때 우리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저의 은사스님이신 광덕 스님께서 불광을 창립하셨습니다. 광덕 스님께서는 그 당시 불교 상황과 사회현상을 보고 “불교가 이렇게 가다가는 이 사회에서 존재 자체가 없어지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불교가 없어지면 우리 민족 문화나 전통문화 이런 것들이 전부 서구화 되고 기독교화 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후 종단 정치에 손을 떼고 불광회를 창립합니다. 불광회, 즉 불광법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월간 <불광>을 창간해 문서포교로 출발 했습니다. 월간 <불광>을 통해서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의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습니다. 당시 창간한 월간 <불광>이 이번 달로 421호가 되었습니다. 창간을 해서 전국의 불자들에게 배포를 했는데, 제일 많이 배포한 곳이 군부대입니다. 군부대, 교도소 등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그런 곳에 월간 <불광>을 많이 보냈습니다. 군인들이 그 당시 가장 불교와 접할 수 있는 쉬운 통로가 월간 <불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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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광을 창간하게 되면서 창간사에 ‘순수불교 선언’을 하게 됩니다. 당시 불교가 피폐해지고 불교 본래의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불교가 계속적으로 이권 다툼을 하는등 나락으로 빠져갈 때, 불교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가 망한다고 하는 그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순수불교운동’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순수불교운동은 무엇이냐 하면 본래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가르쳤던 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본래의 가르침은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다 본래 부처다”라는 것입니다.
은사스님은 1974년 9월에 월간 <불광>을 창간하고, 같은 해 10월에 불광법회를 창립합니다. 목요일에 직장인들이 퇴근 후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모여서 법회를 보게 됩니다. 매주 목요일 보게 되니까 정기적인 법회가 되는 것이죠. 그 때 당시 조계사, 봉은사 같은 큰 사찰도 주간 정기법회를 보지 않고 음력으로 재일법회나 보는 상태였습니다. 주간법회는 물론이고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야간법회를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월간 <불광>을 창간하고, 그 구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법회를 보는데 처음에는 20~30명 모여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주, 2주, 3주 그렇게 지나다 보니 20~30명, 100명, 200명, 300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수백 명이 계속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할 때 드디어 조직화를 시작합니다.
지역별로 조직화를 하는데 서울시 각 구의 각 동별로 ‘법등’이라는 조직을 했습니다. 한 법등에 15명 이상이 모여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종로구라고 하면, 종로구 각 동에 15명 이상이 모여서 법등을 조직합니다. 구 별로 법등을 묶어 세운 것이 ‘구 법회’라고 합니다.
이때의 법등 활동 내용은 매월 한 달에 한 번씩 자체 법회를 가정법회 형태로 하는 것입니다. 법우들이 가정을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스님들이 나가서 모임을 주관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법등 가족끼리의 유대와 애경사를 서로 돕는 일부터 시작해서 같이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순례 및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법등별로 한 달에 한 번씩 법회를 하고, 이 법등들이 모여 구법회를 형성하고, 구법회가 모여 불광법회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법등을 약 250개 정도 조직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불자가 조직되니까 여러 가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정기적으로 법회를 보는 것, 정기적으로 조직활동을 하는 것, 정기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 그리고 불교의식을 현대화 대중화 사회화 하는 것 등을 목표로 해서 법등 활동들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일 먼저 불교 의식의 한글화를 시작했습니다. 천수경, 반야심경, 축원문, 불공의식, 제사의식을 전부 다 한글로 번역해서 법회 진행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불교의식은 한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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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대각사라고 하는 공간이 좁아졌습니다. 공간이 협소해지니 새로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현재 불광사 창건을 위한 불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법등에서 전부 모연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법등 가족 전체가 모연문을 들고 시장에 나가서 귤이나 다양한 것들을 팔아 이익금으로 불사에 동참을 하게 됩니다. 당시 모연 방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으로 했어요. 가장 어렵게 했던 것이 시장에 가서 탁발을 한 것입니다. 스님들이 탁발을 한 것이 아니라 법등 신도들이 가서 탁발을 했어요. 그래서 저녁에 퇴근하고 나와서 시장에 나가 탁발을 하게 되는데 많이 모여야 몇 만원 했습니다. 그런 돈들을 다 모아서 지금의 잠실에 땅을 사고 불광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 불광사를 짓게 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보통 사찰 창건을 하는 과정을 보면 어떤 독지가가 돈을 대고 사찰을 창건하든지, 아니면 어느 사찰이 말사 형식 또는 포교당 형식으로 사찰을 창건 한다든지, 또 어떤 스님이 오랫동안 역량을 모아서 그것을 기반해서 사찰을 창건하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사찰 창건의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불광사는 그렇게 창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들이 자신들의 수행과 불교활동을 할 수 있는 근본도량이 필요해서 자발적으로 나섰고, 그리고 본인들이 그것을 다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절을 짓게 되면 신도들이 사찰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후 정기적인 법회를 정착시킵니다. 불광법회는 한국불교에 있어서 도심 포교의 큰 역할을 하나 둘씩 해나가게 되었습니다. 불광법회가 성공적으로 운영이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많은 스님들이 서울을 비롯한 도심에서 포교당을 하나씩 하나씩 짓게 됩니다. 첫 번째 사례가 구룡사이고 이어서 강남포교원, 여의도포교원, 능인선원, 한마음선원, 은평포교원 등이 설립되어집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불광사를 벤치마킹(Benchmarking)을 하기 위해서 불광사를 방문 했습니다. 하도 많이 오니 저희들이 안내하고, 자료를 만들어서 서비스를 제공하느라고 거의 실무자 한 사람은 그 쪽에 배치하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지금 서울의 유명 사찰을 보면 신도 조직이 저희 불광사 법등 조직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수행조직, 교육조직, 봉사조직, 또는 합창단과 지역, 계층 조직이 각 사찰의 특수성에 맞게 다양화해서 그것을 묶어서 신도회가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볼 때 불광사가 70년대 도심포교당 운영의 첫 출발의 문을 열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규모라든지 여러 측면에서 후발 사찰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이제 다시 70년대의 초발심으로 돌아가 미래의 포교를 새로운 방식으로 열어갈 수 있는 다양한 포교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것은 호법 활동에 대해서입니다. 호법(護法)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법을 보호한다는 뜻이죠? 경전에 호법행이라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불법을 지킨다는 것은 소극적인 일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불법을 우리 생활 속에 응용을 해서 실행한다는 것이 호법활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호법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교육, 복지, 문화, 의료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법법회를 하게 되는데 호법회원이 되면 일정 금액을 정해놓고 매월 일정액의 호법 봉납금을 냅니다. 현재 4,000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데, 평균 1만원이상씩 내고 있습니다. 호법 봉납금을 모아서 한 첫 번째 사업이 교육사업입니다. 제일 먼저 설립한 것이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을 설립했고, 그 다음에 교육원을 설립했습니다. 교육원을 통해 일반 신도들을 교육하고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나아가 지역 주민들이 그 공간을 빌려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사회에 오픈 되어 있는 그러한 교육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복지사업도 같이 하는데, 현재 12월 17일 개원식을 앞두고 준비를 하고 있는 구립 노인 요양원을 위탁 받았습니다.
이런 호법사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발원금은 사찰 경상비에는 쓰지 않습니다. 이 돈은 묶어 놓았다가 특수한 목적 사업을 위해서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불광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출판사업입니다. 월간 <불광>과 불광출판사를 통해 많은 불서를 보급하였습니다. 또 불광사보로 <공감플러스>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찰에서 사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공감플러스>는 불광사가 위치해 있는 그 지역의 문화, 나아가 그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담아서 함께 배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지의 역할과 사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불광이 미래에 어떤 전망을 가지고 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한국 불교의 현실은 인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계신다 하더라도 많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부처님 법을 전달하고, 또는 대중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스님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을 했다가도 누가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스님도 없고 일반 재가자와 실무자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중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대승불교인데 그동안 스님들에게 중생들과 함께 하는 그러한 교육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전부 다 산 속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서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이런 소승적 입장에서 수행하는 정서가 지금 만연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오픈 하고, 자기 자신을 투여해서 대중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러한 의식과 책임성을 가지고 일하고자 하는 스님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한국불교에는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습니다. 일을 하려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정이 필요한데 재정이 없습니다. 산속에는 엄청난 불사를 하고 있지만, 사실 대중 곁에는 별로 없습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출가자의 사회ㆍ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현재 불교가 굉장히 심각하게 위기적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교세 확장에 불교는 이제 비교의 대상에서 이탈되었습니다. 경쟁의 대상에서 이탈되었다는 것이죠.
광화문 광장에 가면 돌에 근대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쭉 새겨놓았습니다. 천주교나 기독교는 여러 가지 기록이 많지만, 한국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에 대한 내용은 한 줄도 없습니다. 이제는 정부에서나 그런 단체에서도 불교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숨결과 함께 해 왔던 불교가 여기에서 이렇게 이탈되고, 경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역사적으로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새롭게 원력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법의 원력이라고 봅니다. 저는 앞으로 전법의 원력으로 사이버 포교 등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렇게 자리를 꽉 메우고 법회를 보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전법의 원력을 세워서 함께 위기를 헤쳐나갔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