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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백양사 야단법석’ 나흘째, 향봉 스님은 ‘조사어록을 통한 깨달음의 길-임제록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법문했다.
향봉 스님은 좌선지상주의의 간화선 수행풍토는 문제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향봉 스님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무리들은 조작심의 수행자일 뿐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선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게 임제 선사의 가르침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향봉 스님은 “요즘 선방에 참선 수행자는 많으나 법거량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열린 선지식을 쉽게 만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스님은 “조사어록을 뚫는 지혜의 안목은 간절심으로 시작해 간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며 “오로지 간절심 하나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통일된다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선지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향봉 스님의 법문과 질의응답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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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비해 선어록은 어떠한가? 논리와 분석을 배격한다.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다. 이원론을 버리면서도 일원론에 머물지 않는다. 연기의 법칙인 존재론적 상의성과 연관성마저 훌훌 벗어버린다. 선어록에 있어 사고나 설명은 죽은 송장에다 채찍질을 하는 경우처럼 의미를 잃고 만다.
어떤 학자는 조사어록을 설명할 때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라 표현했지만, 어록에 담긴 정신은 형이상학 쪽 보다는 형이하학 쪽에서 오히려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어록에는 두변이 없다.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아닌 것이다. <법화경>의 한 구절처럼 일체만물이 본래 고요하고 텅 비어 있는 것으로 관조하되 텅 빈 것에 머물지도 않는다. 텅 빈 가운데 충만이 있고 충만 가운데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선불교의 거목인 임제 스님은 수행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해 참사람에 이르는, 깨달음의 길을 일러주고 있다. 첫째는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두는 경우, 둘째는 객체를 버리고 주체를 남겨두는 경우, 셋째는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경우, 넷째는 주체와 객체를 다 남겨두는 경우다.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아집과 편견에 의해 나(我)라고 하는 주관적 생각들이 걷혀야만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만 보이는 대상에 따라 마음의 작용이 쉬임이 없으나, 존재론적인 근원의 움직임을 깨달아 산을 보아도 산일 수만은 없고 물을 보아도 물일 수 만은 없는 것을 말함이다.
셋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에 대한 조화를 이루는 눈을 뜨게 되지만, 상대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보는 나와 보이는 사물이 참나를 이뤄 걸림과 막힘이 없는 대자유의 참사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산은 산인 그대로, 물은 물인 그대로 차별이 없는 참사람의 열린 지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곧 마음을 바로보아 부처를 이루는 선(禪)의 생명이자 어록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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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스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선사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 떠난 자리를 뒤돌아 온다. 치열한 정신력의 간절심으로 한 바퀴를 돌아나와 버릴 객체도 머물 주체도 없는, 상대가 적멸한 절대의 무념처(無念處)에 이르게 되면 객체는 객체 그대로, 주체는 주체 그대로 ‘평상심이 도(道)’가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진리 아님이 없으며 옷 입고 밥 먹으며 졸리울 때 자고 목마를 때 물을 먹는 무위진인이 되는 것이다. 사바예토가 당생극락(當生極樂)이 되어, 임제 스님이 즐겨 쓰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임제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열린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집착과 분별심에서 벗어나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에 힘써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간절심으로 정진하되 주체와 객체의 두변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해야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중략)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면 부모를 죽이고 그가 친척이면 친척마저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최상의 해탈인 대자유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막힘과 걸림이 없는, 차별 없는 무위진인이 되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만을 죽이면 안된다. 나 까지도 내 몸뚱이 마저도, 차별심과 집착심마저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 던져 송두리째 태울 수 있는 그런 간절심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지름길과 열쇠마저도 버려야만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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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록> <선문염송> <조당집> <벽암록>등의 조사어록에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 널려있다. 깨달음의 문을 여는 수천 개의 열쇠가 박혀있다. 다만 우리가 지름길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열쇠의 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의 병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어록에는 말과 글의 한계를 벗어던진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격외도리(格外道理)로 춤추고 있다. 조사어록에 널려있는 지혜의 말씀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비수가 되고 화살이 되어 환한 빛줄기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조사어록의 바다에서 생선 한 마리 건지지 못하는 것은 닫혀있는 마음 탓도 있겠지만 속어(俗語)와 고어(古語)에 대한 무지도 채찍을 맞아야 할 허물임을 밝혀 둔다.
조사어록을 뚫는 지혜의 안목은 간절심으로 시작해 간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절심 하나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통일된다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선지식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진리는 드러나 있다. 문은 활짝 열려있다. 개문즉장안(開門卽長安: 문 열면 서울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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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응답
토론자(우바새) : 선방에 있는 2200여 수좌들이 정말 잘못 수행하고 있는가? 재가자로서 존경심이 떨어져 마음이 불편하다. 수좌들의 문제점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는가.
향봉 스님 : 100여 개가 넘는 선원에 5가지 병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짜여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에 길들여지는 병, 법거량을 두려워하는 병, 안거 횟수에 따라 서열과 소임이 정해지는 병, 선원장 이상의 소임을 맡을 경우 한 곳에 주저앉는 병, 문중 위주로 조실ㆍ방장이 정해지는 병이 그것이다. 선문답이나 지도점검이 없는 안일한 체제에서는 도인이 나오기 어렵다. 하루 속히 개선이 돼야 참 선지식이 출현할 것이다.
토론자(비구니) : 법주스님 말씀처럼 자기 공부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선방의 분위기인 것 같다. 활발발한 문답이 늘 아쉬웠다. 스님은 어떤 수행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향봉 스님 : 마흔 살까지 불교신문이나 총무원 소임을 보고 책도 많이 썼지만, 아버님이 입적을 계기로 생사문제가 화두로 다가왔다. 내장사에서 아버님 49재를 모시는데, 팔순의 어머님이 “49재를 지내면 아버지가 오시느냐?”“49재를 지내면 영혼이 왕생극락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진공(眞空)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너무나 캄캄해 꽉 막힌 화두가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러한 의문을 품고 인도에서 수행할 때,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뼈 마디마디가 박살나듯 고통스러웠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극한상황에서도 일종의 오기가 나서 ‘영혼은 있는가, 없는가?’‘왜 내게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가?’하는 일종의 ‘자연 화두’가 자리잡혔다. 인도에서 1년 정도를 지났을 때 정다운 스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포켓용 달력에 쓰여진 ‘조주 무(無)자’화두에 대한 글귀를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심을 느끼며 종교적 체험을 했다. 선어록과 일체 만사를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 나는 인도, 티벳, 네팔, 중국에서 15년간 만행을 하고, 5년전 익산 사자암으로 와서 조용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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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우바새) : ‘조주 무자’는 어느 방향에 존재하는가?
향봉 스님 : 거사님! 거사님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토론자(사미) : (거사님! 거사님! 하고 부른 후 박카스 병을 질문자인 거사에게 살며시 던지는 거량을 함)
향봉 스님 : 거사님은 무아(無我)의 참뜻을 아는가?
토론자(우바새) : 모른다.
향봉 스님 : 모르면서 선문답을 흉내 내는 것은 앵무새나 마찬가지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향봉의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런 대답에 “흐르는 물이 안개 되어 비바람을 몰고 간다”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고인들의 말귀나 흉내 내는 것은 자기도 속이도 대중도 속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