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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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스님 ‘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 법문 및 토론 요약
“일념, 즉 오온이 공함을 보아 해탈을 얻는다”



열강하는 월암 스님.

‘백양사 야단법석’ 3일째인 11월 23일 오후, 월암 스님(함양 벽송사 선원장)은 ‘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설법했다. 이 자리에서 월암 스님은, 최근 간화선이 부처님 수행법과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일부 초기불교 수행자들의 지적에 대해“간화선이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과 상좌부의 아비담마, 그리고 대승불교의 수증론과 동일한 지평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밝혔다.
월암 스님은 “대혜 선사가 주장하는 일대사인연이나 혜능 선사가 설하고 는 근본종지와 일념(一念)수행 역시 부처님께서 설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교설이 초기불교로부터 중국 선종에 이르기까지 기본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다만 초기불교는 생멸연기의 입장에서 부정적 언어(무상, 고, 무아, 부정)로 기술하고 있으며, 선종에서는 환멸연기적 입장에서 긍정적 언어(보리, 불성, 청정, 본래면목, 주인공)로 표현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연관시켜 간화선 수증의 방편에 대해 설법했다.
다음은 법문과 토론의 요지다.

법문을 경청하는 스님들.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 선사는 “오음(五陰), 육입(六入),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이십오유(二十五有), 무명업식(無明業識), 사량분별(思量計較) 하는 마음”, 즉 팔식(八識)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 그 곳, 즉 무명으로 인한 번뇌 망념에 휘말리지 않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화두참구의 요체를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대변되는 일체 번뇌망념(팔식 작용)을 놓아버린 그곳에서 화두 참구를 통해 번뇌가 바로 공성(空性)임을 요달해 번뇌가 그대로 보리인 진여불성의 중도를 깨닫게 하는 견성법(見性法)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돈오자성청정(頓悟自性淸淨)이란 자기 성품이 무명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본래적 진실성(淸淨)을 단박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의 사상적 연원은 혜능 선사의 선법에서 찾을 수 있다.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최후 유교(遺敎)설법을 통해 선종의 근본종지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면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설하고 있다. 혜능 선사가 설한 삼과법문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가리키며, 삼십육대법의 내용은 다름 아닌 중도를 수행하는 견성과 전법의 논리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과법문과 삼십육대법은 일념(一念)수행과 일념 해탈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념을 수행하면 자신이 곧 부처이다. 깨닫지 못한 즉 부처가 중생이요, 일념을 깨달은 즉 중생이 부처이다.”(돈황본 단경)

혜능 선사가 천명한 일념수행이란 중생과 제불의 차이를 단지 일념의 미오(迷悟)에 있다고 보고, 미와 오의 차이는 다만 일념지간에 있으므로 일찰나에 전미개오(轉迷開悟)할 것을 권장한다. 이 말은 중생의 일념은 무명에 오염되어 분별망념으로 생멸윤회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지만, 분별망념에 휘말려들지 않고 망념이 본래 공함을 여실히 깨달으면 본래심이 회복되어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념, 즉 오온이 공함을 보아 해탈을 성취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대혜 선사가 말한 보리열반, 진여불성이 번뇌망념 너머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듯이 혜능이 말한 자성 혹은 본성, 심성 또한 공, 무아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선종에서 말하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본래면목, 주인공 평상심, 즉심시불(卽心是佛), 무위진인(無位眞人) 등의 언구는 실체적 진아(眞我: 아트만)의 의미로 설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 무아, 중도를 나타내는 존재의 참모습을 선종용어로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혜해 선사는 정념(正念: Samma-sati)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보리열반은 본래 얻을 수 없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무념은 모두 일에 따른 방편에 의해 가짜로 그 이름을 붙인” 중도정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지관9사마타-위빠사나)겸수(止觀兼修)의 입장 또한 선종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전통과 간화선에 있어서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는 화두참구법과 동일 지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남방의 sati(혹은 위빠사나)수행을 통한 해탈열반과 화두 타파로 얻어지는 견성성불이 똑같이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함(切)이다. 일대사를 반드시 해결해야 되겠다는 발심이 전제되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의정이 끊어지지 않는 심리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틈이 없는 마음, 즉 무간단(無簡單)이 되어야 한다. 간단없는 의심을 이어가되 간절하고 철저하게 사무치는 의심이 일념만년(一念萬年)되게 하여야 깨달음의 단계로 향상할 수 있다.

법문에 집중하는 거사들.

간화선 수증의 일반적인 방편인 발심-출가-정견(연기적 中道正觀 확립)-참문(參問: 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물음)-결택(決擇: 선지식이 수행자의 수행기연과 이력을 관찰해 화두를 제시함)-참구(參究)-탁마(琢磨)-행각(行脚: 동중공부인 만행)-삼매(화두가 끊어짐 없이 늘 한결같은 상태)-거량(擧量: 수행의 진척상태를 점검하는 선문답)-점검(선지식의 지시)-인가(선지식으로부터 깨달음을 인정받는 것)의 과정을 거친 선사는 최종적으로 교화에 나서게 된다.
수행자가 견성성불하기 위하여 수행 정진하는 것과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은 결코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항상 화두를 참구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두 수레바퀴를 굴려 지혜와 자비가 함께 수행되어지는 비지쌍운(悲智雙運), 복혜쌍수(福慧雙修)의 가풍을 진작시켜야 한다. 수행 가운데서도 이러할진대 깨달음을 성취한 연후 육도중생을 널리 구제함은 대승보살의 비원일 것이다. <심우도>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난후 마지막으로 중생의 삶의 현장인 저자거리로 나아가(垂手入廛) 화광동진(和光同塵)할 것을 설하고 있다.
중국의 조사선과 달리 한국 선종의 종풍은 늘 선과 화엄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의 견성성불과 화엄의 보현행원이 결합해 선수행과 보현행원이 일치하는 선엄일치(禪嚴一致)의 가풍을 유지해 왔다. 선엄일치에서 주장된 심지법문이 바로 견성성불과 요익중생이다.

월암 스님.


질의 응답

토론자(거사) : 하나의 화두를 투과한 뒤에 계속 몇 개의 화두를 하나씩 타파해가는 것을바른 화두공부로 볼 수 있는가?
월암 스님 : 역대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작은 깨달음, 큰 깨달음이 여러번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 선사는 물론이요 보조 스님은 세 번의 깨달음을 체험했다고 하며, 일본의 백은 선사는 큰 깨달음을 8번, 작은 깨달음을 여러 번 체험했다고 한다. 육조 스님의 경우도 나뭇꾼 시절에 <금강경> 독송 소리를 듣고 한번 깨닫고, 오조홍인 대사에서 행자로 생활하면서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법문에서 활연대오 한다. 근기와 기연에 따라 크고 작은 여러 번의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향봉 스님 : 확철대오의 경우는 하나를 통하면 전체를 통하는 ‘일통 만통’이 돼야 한다. 일본의 선종은 ‘사다리 선’이라고 해서, 의리선 냄새를 풍기는 게 사실이다. 하나의 화두를 타파해 넘어야 할 화두가 있다면 증오(證悟)가 아니다. 증오인 경우는 ‘일통 일체통’이 돼야 할 것이다.

토론자(우바새) :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암 스님 : 고려시대의 선적을 보면 거의 보조 스님 일색이다. 경허, 만공, 용성, 한암 스님도 보조 스님의 견해를 따랐다. 다만, 서산 스님이 법통 문제에 있어서 연원을 태고보우 스님으로 이은 바 있지만, 성철 스님 때까지 보조 스님이 한국 선사상의 주류를 형성한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철 스님이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고 ‘돈오돈수설’을 제기한 것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많은 부분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나, 성철 스님의 주장 역시 비판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보조 스님이 돈오점수설을 말한 것은 독단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규봉종밀, 영명연수 선사 등의 전통적 입장을 따른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돈현관’, ‘점현관’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돈점이론은 불교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돈점이론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수기설법으로 봐야 한다. 육조 스님이 단경에서 “법에는 돈점이 없으며, 중생의 근기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을 뿐이다”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토론자(우바새) : 불교TV와 인터넷, 선어록을 통해 선사스님들의 법문을 보고 들으며 불교를 공부하다가 지난 3월부터 이상한 경계가 왔다. 그 이후 한 선원에서 교육을 받고 참선하는데, 다시 한번 큰 경계가 왔다. 그때 굉장히 환희심이 나고 상상도 못한 밝은 세상을 경험했다. 박장대소 하면서 스님으로부터 점검과 법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이뭣고?’ 화두가 안들려, 다시 ‘마삼근(麻三斤: 삼이 세 근)’ 화두를 들었는데, 좌선한 지 3시간만에 화두에 걸렸다. 13시간 동안 화두를 들며 몸부림 쳤는데 지쳐서 잠이 들었지만, 계속 ‘마삼근’을 들고 있었다. 이 화두도 곧 들리지 않아, 이번에는 전강 선사의 녹음테이프를 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앞이빨에 털이 났다)’화두를 들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새벽에 두 시간 정도 화두를 드는데, 험하고 뾰족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나타났다. 이런 경계를 어떻게 봐야 하나.
향봉 스님 : 거사님은 자기 최면에 빠져있다. 수행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참선이 아니다. 공부의 초입단계에서는 다양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이는 혜(慧)가 맑아지는 것으로 보면 되고 절대 집착해선 안된다.

토론자(비구) : 임제 스님을 황벽 스님에게 인도해 깨닫게 한 목주 스님처럼 구참수좌들이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수좌와 조실스님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시스템만 살아있어도 간화선이 좀더 활기를 띠지 않을까 한다.
월암 스님 : 눈밝은 종사가 부족해 거량과 점검, 인가제도가 사라진다면 시스템으로라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지견이 나고 견처가 생긴 분이 부족하다면 쳬적인 교육시스템으로라도 간화선 수행체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자(우바이) : 중생은 무명(無明)에 의해서 12연기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명 이전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월암 스님 : 무명이 본래 없는데, 무명 이전 이후가 있겠는가? 일체 유위법이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다. 망념이 본래 망념이 아니다(분별망념에 휘말려들지 않고 망념이 본래 공함을 여실히 깨달으면 본래심이 회복되어 부처를 이루게 된다) 구지 질문에 대답하라 한다면 무명 이전이나 이후가 광명, 지혜, 부처이다.

김성우 기자 | buddhapia5@buddhapia.com
2009-11-24 오후 3:41:00
 
한마디
인향 잘 배우고 갑니다. 관세음보살()()()
(2010-03-20 오전 10: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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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어찌 본인이 가보지 않은길을 논하십니까? 아미타경만 숙독하여 그 의미만 알아도 현 승려들이 논하는 깨달음은 허구임을 증명하더이다 . 스스로 업장을 두텁게 하지 마십시요.
(2009-11-26 오전 11: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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