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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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스님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 법문과 토론 요지



법문하는 고우 스님.

11월 21일, ‘깨달음의 길을 찾는백양사 야단법석’의 첫 번째 법주로 나선 고우 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은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에 대해 설법했다.
고우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구지 한 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라 할 수 있다”며 “연기된 자성(自性)으로서의 공을 깊이 이해하기만 해도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법문했다. 스님은 “누구나 ‘본래 부처’로서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며 살면 나와 남이 모두 즐겁고 편안하게 된다”며 수행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실천수행을 당부했다.
다음은 법문 과 토론의 요지.


법회에 앞서 고우 스님께 합장하는 인도에서 온 학승들.

불교라는 깨달음의 길을 가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운문 선사는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다”라고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속상하거나 즐거워하는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행복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나라와 나라, 집단과 집단, 가족과 직장의 구성원간, 개인과 개인간, 또한 스스로의 갈등으로 한 시도 편할 날이 없기에 어떻게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禪)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면 못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다. 모든 분별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가필라국의 왕자 자리를 버리고 2600년이나 이어져온 승가공동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스갯 소리로 부처님이 장사를 정말 잘했다고 말하곤 한다. 왕자로 한 평생을 살았다면 가필라국 국민은 행복했겠지만, 지금처럼 부처님의 거룩한 이름이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깨달음의 문을 열어준 것은 정말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깨달음의 가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하지만 깨달음은 생활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생활을 떠나서 불교를 말하는 것은 것은 ‘토끼뿔’(토끼의 뿔은 상상으로만 존재하기에 얻을 수 없다)을 구하는 것과 같다. 생활 하는 마음과 불교를 공부하는 마음이 따로 있지 않다. 깨달음에 대한 설법을 듣고 생각이 바뀌어서, 바뀐 생각으로 살아가다 보면 삶이 아주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깨달음은 무엇인가. 무엇을 깨달았길래 행복을 느꼈을까. 나는 선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전통적인 선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조사선의 대종장인 마조 선사에게 대주 스님이 찾아갔다.
마조 선사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여기까지 무엇하러 왔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불법이 어찌 나한테 있겠는가? 그대는 왜 자기 집에 있는 보배를 돌보지 않고 밖에서 찾고 있는가?”
대주 스님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껌벅이다가 되물었다.
“제게 보배가 있다니요? 무슨 뜻인지….”
마조 선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게 묻고 있는 그대가 바로 보배일세. 그대 배 안에 모든 보배가 가득 갖추어져 있어 평생을 써도 바닥이 나지 않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밖에서 찾아다니는가?”
이 말에 대주 선사는 크게 깨달았다.

이러한 문답이 바로 선의 전통이다. 그런데, 대주 스님이 깨달은 보물창고는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누구나 갖고 있다는 소식이 더욱 놀라운 이야기다. 누구나 본래부터 보물창고가 있다는 것은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말한다. 깨닫고 안 깨닫고와 상관 없이 모두 ‘본래 부처’이건만 보기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있지만, 그 많은 경전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대주 선사와 같은 선사들은 그 어렵고 복잡한 경전의 가르침을 한 순간에 ‘순간 깨침’(頓悟)을 통해 체득한 것이다. 선의 전통을 순간깨침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선에만 있는 전통은 아니었다.

고우 스님.

부처님 당시도 순간깨침을 한 분이 많다.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도 2~3주만에 깨달았다. 부처님 당시 순간깨침을 한 분이 적지 않음을 원시불교를 전공한 분들도 인정하고 있다. 선이 어떻게 보면 부처님 당시의 순간깨침 하는 전통을 이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요즘은 순간깨침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런 길이 존재하였기에 가라는 것이다. 화두 참선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이다. 최선은 조사스님들이 수행자가 묻는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으라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순간깨침이 흔하지 않다고 해서 그 전통마저 부정하면 안된다.

그러면, 깨달음을 교(敎)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팔만대장경이 포장은 방대해도 내용, 즉 깨달음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다.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존재의 원리를 이야기한 공(空)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선에서는 ‘공’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할 수 없어서 하는 이야기다. 물론 이름을 부정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경>은 공을 자성(自性)이라 표현했다. 자성이 있다고 보면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을 연상할 수 있는데, <열반경>의 자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표현했다. 자성 역시, 중도 연기된 것으로 공(空)과 다름 아니다.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공(空)에 대한 이해만 제대로 해도 삶이 달라진다. 지혜가 100% 완성되어 도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50% 이해하면 생각이 50% 바뀌게 되고, 10% 이해하면 10% 바뀌게 된다. 생각이 바뀐 만큼 삶에 대한 태도 역시 달라진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의 핵심이 ‘공’을 알게 되고 깊이 이해하게 되면 어떤 변화가 올까.
첫째, 공을 이해하면 남과 비교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일상속에서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 나 역시 출가 전에는 그랬다. 나를 남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나를 학대하니 폐결핵이란 몹쓸병에 걸려서, 절에 병을 고치기 위해 들어왔다가 출가까지 하게 된 것이다. 공을 해 비교하지 않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를 초월할 수 있다.

둘때, 공을 알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된다. 나도 공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비로소 ‘중놀음’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됐다. 전에는 소극적이고 위축돼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당당해졌다. 부처님은 똥 푸는 사람에게도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부처님은 고관대작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면 그 사람이 천민이라고 했다. 비록 똥을 푸고 있어도 아무도 안 하려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남을 돕고 생계를 잇고 있으니 고관대작이 되어 남을 괴롭히는 사람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가치와 의미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셋째, 공을 알면 언제 어디서나 주인으로 살 수 있다. 백양사 방장스님이셨던 서옹 스님이 강조한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그것이다.

법문을 듣는 사부대중.

넷째, 공을 알게 되면 그 무엇과도 소통이 된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갈등지수가 제일 높다. 갈등으로 인해 소비되는 돈이 년간 약 70조에 달한다고 하니 4대강 사업비의 3배 이상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사회갈등으로 인해 소모되는 것이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소통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일방 소통’일 뿐이고, 불교의 소통은 ‘쌍방 소통’이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했다. 산은 물이 될 수 없고 물은 산이 될 수 없지만, ‘공’이란 본질을 보게 되면 산과 물이 소통 된다. 현상만 갖고는 절대 소통이 안된다. ‘공’이라는 존재원리에서는 산하고 물이 둘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발견한 ‘공’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증명이 되어가고 있다. 올 봄에 스위스 국경지방에서 우리 돈으로 10조원을 들여 큰 실험을 했다. 지하 100미터에서 길이가 27킬로미터나 되는 터널에서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하겠다고 실험을 했다. 지금 실험은 연기가 된 상태이지만, 이 실험은 아직 물질이 되지 않은 소립자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라 한다. ‘신의 입자’라고 명명된 이 소립자로부터 우주가 생성됐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물질이 되기 전 단계의 아주 작은 소립자가 물질화 하고, 물질이 되는 것 끼리 상호 연기하면서 다른 물질을 만들어감으로써 우주가 생성됐다는 가설이다. 불교는 과학이 발달하면 할 수록 가르침이 하나하나 증명 되고 있다.

오온(五蘊)이 공한 것을 믿고 이해하면 내가 있다는 집착을 안할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살아가는 삶과 반대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공에 대해 이해하면 지혜가 나와서 각계 각분야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서로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이다. 나부터 그런 삶을 살아가면 행복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 길로 간다고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다. 나와 남이 모두 자유롭고 행복해지고 덕스럽고 당당해지는 길이다. 이것이 누구나 본래부터 가진 ‘본래 부처’의 길, 깨달음의 길이다.

경청하는 사부대중.



질의 응답


토론자(비구니) : 초기불교의 전통과 선의 전통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고우 스님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선의 전통이 다르다면 안된다. 보자기의 포장만 다를 뿐 내용물은 똑같다. 대부분은 수행은 참구해서 점진적으로 깨달아가는 방법이라면, 선은 순간깨침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선 마저 돈오(頓悟)의 전통을 잃어버리면 점수(漸修)의 방법만 남을 것이다. <아함경>에 보면 금방 결혼한 새댁이 부처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순간깨침의 전통이 원시불교에도 있었는데, 선이 돈오의 전통을 어렵게나마 귀하게 이어온 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에, 선사가 “정전백수자(뜰앞의 잣나무)”라는 답을 하는 것은 말길과 생각의 길을 끊어주는 선사의 독특한 지도법이다. 깨달음은 주객(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자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철칙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란 주객이 무너진 자리를 상징한다.

토론자(우바새) : “오온이 모두 공하다(五蘊 皆空)”고 하는 <반야심경> 법문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린다.
고우 스님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연기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이 세상 어떤 물건이든 독립된 물체가 없다. 지, 수, 화, 풍으로 구성된 물질이든 60조의 세포로 구성된 몸이든 모두 연기(緣起)로 이뤄진 것이다. 나무, 흙, 돌로 구성된 집을 해체하면 집은 사라지듯이, 집은 본래 공한 것이다.

향봉 스님 : 팔만대장경을 공으로 요약하고, 오온이 공한 것을 다시 연기된 자성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 공은 동시에 무아(無我)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수시로 변화하는 오온은 공한 것이기에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이 끊어지면 편안해진다. ‘무아’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공통되는 가르침이다.
고우 스님 : 상응부 경전에 보면, 오온개공을 설명하면서 “색(色)도 무아요, 수상행식도 무아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반야심경>은 초기불교의 무아 사상을 잘 계승하고 있다.

토론자(우바새) : 모든 것이 공이니까 차별을 버리고 소통해서 ‘수처작주’의 삶을 살라 하셨다. 그러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데,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고우 스님 : 공을 진실로 깊이 이해하면 일체를 평등하게 보기에 차별심이 사라진다. 공을 이해하면 돈과 명예와 같은 외적인 추구를 그치게 되고, 더 이상 밖으로 얻을 게 없으며 인격을 닦는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하고 손님을 ‘본래 부처’로 모시면 저절로 장사가 잘 된다. 손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서비스를 잘 하면 손님도 즐겁고 돈도 많이 벌게 되는 것이다. 내면의 가치를 알고 외적인 가치를 추구하면 조화가 된다. 반대로 내면의 가치를 모르고 외적인 가치만 추구하면 위험하다.

도법 스님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사건과 용산 참사가 벌어졌을 때, 불교계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만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용산 참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불교가 불평등한 관점으로 사회현상을 보는 것은 아닌가.
고우 스님 : 불교계가 사회적인 인기에 영합해서 그렇게 반응했다면 그것은 밖으로 추구한 것으로 반성할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도 외적인 추구와 함께 공과 평상심(平常心)과 같은 내면의 가치를 알고 실천할 수 있었다면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글 김성우 기자ㆍ사진 박재완 기자 |
2009-11-24 오전 8:08:00
 
한마디
불자 노무현전대통령은 스스로 개죽음한 것이다. 더 말할 것이 없다. 용산참사도 떼법논리로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2009-12-04 오후 7: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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