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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과 25일, 여섯 시간에 걸쳐 야단법석 법주로 나선 도법 스님은 ‘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 수행론’을 주제로 법문했다.
도법 스님은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이분법적 실천론인 비중도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고 진단했다. 도법 스님은 “이론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법 스님은 이런 이분법적인 불교관이 연기ㆍ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본래부처와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자신의 온 존재를 다 바쳐 본래부처로 사는 것이 참 보살행이요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 하는 참 정진”이라며, ‘본래 부처’임을 믿고 부처행을 하며 살아가자고 당부했다.
다음은 법문과 토론의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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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고통에 찬 삶을 살아야 하는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 해답으로 초기경전에서는 ‘유아독존’, 대승경전에서는 ‘본래부처’, 선가에선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본래부처란 ①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 ② 가장 주체적인 존재임 ③ 제일 원만구족한 존재임 ④ 제일 고마운 존재이다.
왜 그럴까? 지금 여기 생명(본래부처)의 존재인 나와 그대는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지금 여기 나와 그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이다.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본래부처인 그대와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원만구족한 존재이다.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금 여기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이보다 더 거룩하고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은 매 순간순간을 신비, 기적, 불가사의 속에 살고 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신비, 기적, 불가사의이다. 매 순간 귀하고 고맙고 거룩한 존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어찌 날마다 뿌듯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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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하나들이 그대와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견문각지에 만나는 존재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래부처이므로 지극히 잘 모시고 섬겨야 하겠다. 너무나 본래부처 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스스로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이므로 마땅히 행주좌와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다.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 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절집에는 특별한 부처를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니는 무지한 중생을 비유해서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일반 사회에도 정신 없는 사람을 비유해서 “업은 아기 3년 찾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전해온다. 본래부처인데 어디에 가서 다시 부처를 찾을 것이며,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한갓 전도몽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본래부처임을 알고 ,믿고,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것이다.
그럼 부처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라고 했고 화엄불교에서는 ‘동체대비’라 했고, 선가에서는 ‘대무심(大無心)’이라고 했다. 본래부처인데 괜히 다시 부처를 구하고, 찾고, 이루려는 헛고생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자. 본래부처답게 사는 것을 화엄에서는 ‘보현행’이라 했고 선가에서는 ‘대무심행’이라 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초기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팔정도’이다. 내용을 단순화시켜보면 법의 정신에 맞게 마음 쓰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라는 것이다.
삼업(三業: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활동을 법과 교법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 당장 당신이 법에 맞게 마음을 쓰고, 법에 맞게 말을 하고, 법에 맞게 행동을 하고 사는 것이 팔정도요 초기불교의 기본수행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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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법’이라는 말과 본래부처, 팔정도 즉 본래부처와 삼업활동의 문제를 다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고요.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지금 여기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본래부처의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이다.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다. 본래부처답게 사유 음미하는 것이 바로 정사유요, 그대로 부처의 사유이다.
셋째는 정어(正語)이다. 본래부처 답게 말하는 것, 즉 여어(如語: 한결같은 말) 실어(實語: 사실을 밝힌 말) 불이어(不異語: 말 바꾸지 않음) 불광어(不誑語: 미친 말하지 않음)자로 사는 것이 바로 정어인데, 이 역시 그대로 부처의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다. 본래부처 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업이요, 그대로 부처의 행위이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다. 본래부처 답게 생활하는 것이 바로 정명이요, 그대로 부처의 생활이다.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다. 본래부처 답게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다. 그대로 부처의 정정진이다.
일곱째는 정념(正念)이다. 본래부처 답게 깨어있음, 정신차림, 알아차림이 바로 정념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념이다.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본래부처 답게 언제 어디에서나 흔들림 없이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정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더 단순화 시키면 한 마디로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괜찮다고 본다. “죽을 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않고, 지극정성을 다해 좋은 일을 실천한다. 그리고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그 마음을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 수행론이 천 가지 만 가지 같지만 실상은 어떤 불교 수행론도 칠불통게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삶이 행주좌와에 온전히 젖어들어 무르익을 경우, 그것을 완성된 깨달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본래부처가 있는 곳,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일까? 바로 현장이다. 본래부처가 행동하고 살아야 할 곳과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두 발을 딛고 있는 그 곳이요,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다. 따라서 현장이 도량이요, 만나는 사람사람이 본래부처이므로 매 순간, 매 상황마다 만나는 그 사람을 본래부처로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팔정도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현실의 삶이 저절로 하나의 길로 통일된다.
서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르다고 서로 우열을 다투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도 없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절한 처방이라면 그 이름이 초기불교면 어떻고 대승불교면 어떤가. 참선불교라고 특별대접하고 교학불교라고 푸대접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겠는가. 수행 따로, 일상의 삶 따로라면 그것이 선방에 있든 법당에 있든, 산중에 있든 도심에 있든 참된 불교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물어보고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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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토론자(우바이) : 꿀벌이 사라지면 (환경파괴의 결과로 인해) 인류가 망한다고 하셨다. 인류도 존속하려면 좋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자손을 나아야만 한다. 좋은 DNA를 가진 스님께서 환속해서 자식을 낳을 생각은 없는가.
도법 스님 : 물이나 곤충이나 짐승이나, 남자나 여자나, 출가자나 재가자나 세상이 돌아가려면 다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인드라망이라 하는데, 모두 다 같으면 안되고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이 몇을 낳아 잘 기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설법을 해서 그들이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한다면 수 만명을 낳아 키우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다양속의 조화, 이것이 인드라망이다.
토론자(우바새) :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도법 스님 : 70년대 초에 선방에서 10여 년 정진하다가 이런 저런 회의가 들었다. 그러다 80년 대 초에 <화엄경>을 만나 실상사에 화엄학림을 설치해 석달 동안 스님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러면서 온 세상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이로군, 생명의 활동이로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때부터 생명ㆍ평화의 관점에서 삶과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진보진영이 나아갈 방향을 잃고, 자본주의 역시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더 큰 부작용을 양산해 생명자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장익순, 박경리, 김지하 선생 등의 말씀을 접하고 더욱 용기를 얻어 생명평화 활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불교와 사회적 대안을 동시에 실현하는, 종단과 사회에 모두 도움이 되는 자리이타의 수행이라 생각한다.
도법 스님 : 야단법석은 발로(發露)참회의 심정으로 마련된 자리인데, 실상사 야단법석 후 여러 압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종단이나 총림, 선원 등에 대한 비판을 정직하게 할 수 없다면 불교 발전은 불가능 하다. 우리 허물을 만천하에 드러내 참회하지 않고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아픈 현실을 이해해 달라. 다음 야단법석에서는 좀 더 허심탄회한 대화속에서 갈등을 치유하면서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이 도출될 것이라 기대한다.
토론자(우바이) :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 모든 것을 접고 참여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불교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환희심이 났다.
김은규 원불교 교무 :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기에 개혁의 목소리가 나올 수록 긍정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계의 어떤 광명을 본 것 같다. 한국사회, 나아가 국제적으로 이런 법어의 마당이 열린다면 모든 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토론자(비구니) : 수행자는 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고민한다. 본래부처로서 생활이 안될 때,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
도법 스님 : 수행은 특수한 공간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선방에서 연습만 하다가 본 게임에 응용을 못 하면 되겠는가. 연습이 연습인 줄 모르고 거기에 매몰된다면 문제이다. 선방 수좌는 수좌다워야 한다. 수좌에게 자원봉사를 하라는 게 아니다. 진실 되게 수행하는 수좌와 열심히 포교하는 스님들은 서로 존중해야 한다. 수행에는 쉽고 편한 길이란 없다. 수행이 어렵더라도 맨날 안된다 하면 정말 안된다. 본래부처와 연기, 무아, 공에 대해 확신하고 팔정도에 따라 부처행을 하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
토론자(우바새) : 불교 수행풍토에 대한 비판은 자칫 선원이나 각처에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몽 스님 : 조선이 망한지 100년이 넘었는데 우리는 지금도 조선시대의 기복불교에 머물러 있거나, 중생을 외면하고 너무 편안하게 수행을 하고 있다. 21세기에 적합한 불교로 변화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데 야단법석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