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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백양사 야단법석의 네 번째 법주로 나선 (사)동사섭 이사장 용타 스님은 ‘동사섭을 통한 깨달음의 길’이란 주제로 설법에 나섰다.
용타 스님은 “동사섭이라는 수련과정에서 다루어지는 궁극의 깨달음인 돈망(頓忘)은 필자가 소속한 불교 문중의 주행법(主行法)인 염불선(念佛禪)과 같다”고 밝혔다. 용타 스님은 “이번 야단법석 세미나(연구 집회)에서는 동사섭이라는, 30여년 역사 속에서 궁극의 과정으로 구축된 돈망 내지 돈망파지(頓忘把持: 염불선의 다른 이름)를 드러내기로 하겠다”며, 동사섭수행의 구체적인 방편을 소개했다.
다음은 이날 법문의 요지와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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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보리수하에서 연기의 이치를 깨달으시고 두 가지 큰 결론을 얻으셨다. 자아라는 실체가 본래 없음을 인식하시고 자아에 집착함으로써 빚어졌던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를 해탈하신 것이 그 하나요,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면서 얽혀져 있는 한 유기적인 한 존재임을 깨달으심으로써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구현하신 것이 다른 하나라는 것이다. 석존의 해탈과 동체대비가 바로 연기의 이치를 파악하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인의 한 의식과정이라는 것, 사색을 통해서 연기(緣起)의 이치를 파악하셨다는 것 등을 거듭 강조한다. 사색, 그것은 사유요, 이 사색을 보다 바람직하게 잘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이다.
보리수하에서 석존은 정사유(正思惟)를 통해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무아(無我)라는 결론을 얻음으로써 자아(自我)의 노병사 불안(老病死不安)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녹야원에서 제자들에게 연기의 이치를 설법하심으로 해서 제자들이 연기의 이치를 이해하여 자아(自我)의 공성(空性, 無我性)을 파지함으로써 석존과 같이 노병사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해탈을 하게 된 것이다.
동사섭수련에서 말하는 ‘돈망(頓忘)’이란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전제한 ‘옴나’이다. ‘옴나’ 개념은 ‘깨어있음'' 정도로 수긍한다면 좋겠다. 즉 그냥 깨어 있는 것이요, 깨어있되 아공(我空)이요 법공(法空)이니 안팎으로 마음을 두지 않고 깨어있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심리 과정 정도로 이해해도 좋다. 지금, 여기 그냥 존재하되(그냥 깨어 있되) 일체에 걸림이 없음이요, 살되 걸림 없이 사는 것이다. 안팎으로 걸림이 없으면서 그냥 이대로 깨어있되, 이대로 깨어있는 의식 상태가 무한으로, 구경(究竟)으로 수긍되는 심리과정을 의미한다.
세인이 말하는 세계란 자기 주관성에 의해 현전하는(나타나는) 표상물(表象物)이다. 그 표상물을 실체시(實體視)하고, 이를 ‘분별-시비-집착’하면서 고통과 싸움을 빚어낸다. 자기 주관성(필타)으로 세계를 현전시켜놓고 시비집착하면서 고통과 전쟁을 빚으며 살아야겠는가, 아니면 주관성이 끼지 않는 세계를 만나면서 극락과 평화를 살아야겠는가?
돈망이란 바로 주관성이 끼지 않는 의식과 세계를 의미한다. 이 때 ‘세계’라는 말의 개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자, 그러면 돈망이라는 의식 차원을 향해 나아가보자. 아래의 접근법들은 동사섭수련의 고급과정에서 돈망명상을 안내할 때 쓰는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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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중국 선불교의 거장,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으로부터 법(法)의 인가를 받고 남하하고 있었다. 홍인의 제자이자 혜능의 사형인 혜명 스님께서 남하하고 있는 혜능을 붙들고 법을 청한다. 혜능 대사는 “선(善)도 악(惡)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귀하의 본래면목(본마음)은 무엇인가(不思善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혜명 스님은 깨닫는다. 어떠한가? 이 글을 접하시는 분이 혜명스님이시다. 선도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것이 있는가? 준비된 자는 이 질문 하나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할 수 있다.
#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 바라보기(槪念以前)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보는 것이 더 제대로일까,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는 것이 더 제대로일까? 물론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는 세상이 더 제대로 일 것임은 당연하다. 지금 바로 인위(人爲)의 개념놀음이 없는 상태로 바라보라. 천하가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이리라. 어떤가 이때 당신의 의식은 어떤 상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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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존재함
아공(我空)인지라 안으로 집착할 것이 없고, 법공(法空)인지라 밖으로 집착할 것이 없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이다. 안팎으로 잡히는 것, 분별시비할 바, 집착할 바 없으니 무장무애(無障無礙)한 순수의식(깨어있는 의식을 느낌)이 한계 없는 무한 우주에 두루 한다.
자, 어떠한가? 이것을 일러 돈망이라고 한다. 수긍되는 바가 있는가?
# 내려놓음(放下)
손을 본다. 이 때 나의 마음은 손이다. 손을 치운다. 손이 사라진 자리에 허공이 드러난다.
이 때 내 마음은 허공이다. 허공을 치워본다. 이 때 오직 ‘그것’만이 의식된다.
‘그것’은 순수한 의식이요, 진정 스스로의 마음(自性)이요, 세상 자체이다. ‘그것’을 표기함에 ‘옴’, ‘순수의식’, ‘자성’ 등이다. 그런데, 많은 세상 사람은 이렇게 명료하게 안내해 주어도 ‘그것’을 잡지 못한다. 또 잡았다 해도 이 좋은 ‘그것’은 견지 되기가 어렵다. 과거에 ‘그것’아닌 상태로 살아온 삶의 습관성 때문이다. 이 습관성을 업장이라고 한다. 이 업장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이 좋은 도구이다.
‘그것’은 아공법공의 경호를 받음으로써 무장무애한 무한으로 열려 체험된다. 이때의 <그것>은 돈망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옴’은 돈망과 질적으로 동일하나 큰 득력을 하지 못한 차원에서는 양적인 차이에 있어 돈망을 따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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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 만트라로 정혜균지
돈망을 파지한 분은 그 돈망이 삶의 기초가 되고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돈망을 파지했다고는 하나 과거에 무수히 개념화를 비롯해서 분별-시비-집착 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습관이 우리의 의식에 대단한 에너지로 깊이 뿌리하고 있을 터이다. 얼음이 물인 줄은 알지만 아직 물로 잘 쓰지는 못하니 열을 가하여 액화하여야 하듯 비돈망의 의식으로 굳어져 있는 우리의 딱딱한 의식을 부드러운 돈망 의식으로 보다 온전히 길들이기 위한 작업을 해야 한다. 그 길은 돈망을 반복 반추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 권장하는 마지막 길이 ‘무한 만트라’이다. 모든 규정성을 넘어선 것,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했던가. 그 돈망의, 그 무한의 다른 이름 하나로, 성스러운 다른 이름 하나로 ‘아미타불’이라하면 어떨까? 만트라는 주문(呪文)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식으로 염(念)하는 것이다. 돈망이라는 의식차원을 깨달은 자가 그 의식 차원을 관(觀)하면서 염(念)의 차원에서 ‘아미타불’ 만트라를 외면서 염념상속(念念相續)한다면, 염과 관이 상응하면서 정혜균지(定慧均持)의 무한의 의식 경지가 깊어진다고 상상할 때 어떤 공덕이 있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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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응답
토론자(비구니) : 동사섭수행에서 마스터의 점검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용타 스님 : 화두선처럼 선문답식의 납득 안되는 문답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알아듣기 쉬운 문답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경함하고 있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까?” “그러한 체험이 좋습니까?” “얼마자 좋습니까?” “절대로 좋습니까?” “왜 절대로 좋습니까?” 이런 식으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질문을 던지면 점검을 합니다.
토론자(우바이) : 여기 목숨을 걸고 탈북한 분이 있지만 불교는 기독교인에 비해 관심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도 신부님, 목사님은 회의에 참석했지만 스님은 본 적이 없다. 불교가 대중화되어 생활속에 녹아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용타 스님 : 미국 미네소타주 삼보사 주지로 있을 때 미국에 유학 온 신도 분 아들이 공항애 마중나온 교회 사람들의 친절한 환영에 감격해서 기독교인이 된 것을 본 적이 있다. 불교도 그들처럼 포교에 적극성을 가지면 좋겠다. 세사에는 많은 문제가 있기에, 불교도 다양한 측면에서 커버할 수 있는 종교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법정 스님과 도법 스님 처럼세상을 향해 바른 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한국불교의 답답한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도법 스님 : 한국불교는 백지 위에 깨달음이니, 부처니, 참선이니 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깨달음병, 부처병에 걸려 굶주리는 이웃을 쳐자도비도 않는 것은 아닌가. 간디는 “배고픈 이에게는 밥이 하느님이다”라고 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보고 밥을 주듯이, 삶의 현장속에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가?
용타 스님 : 상아탑 속에 머물지 않고 현장 속에서 걱정과 호소는 더욱 활구적(活句的)으로 다가온다. 법륜 스님 처럼 배고픈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보살행은 감동적인 보살행이다. 고통의 현장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체가 깨달음의 길이라는 데 동감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손이 갈 때도, ‘응무소주’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때가 깨달음의 실천이 아닐까.
토론자(비구) : 무루(無漏)의 법을 추구하되, 유루(有漏)의 세간을 떠나서는 안된다. 무루의 수행이 무르익으면 유루의 세간을 감싸안아야 한다. 하지만 무루의 법을 한결 같이 추구하기도 어렵고, 무루의 공부를 하면서 중새에게 다가가는 것도 어려운 것 같다.
용타 스님 : 무루의 법이라도 정말 제대로 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고서 삶의 현장을 외면한다면 문제다. 무루의 길이든, 유루의 길이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분법적인 흑백논리 보다는 저마다의 입장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과감히 길을 바꾸는 결단도 필요하다. 산간에서 참으로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들도 나와야 하고, 사회참여를 열심히 해서 보살행을 닦는 분들도 나와야 한다. 어느 쪽이든 상(相)놀음 하지 않고 머무는 바 없이 정진한다면 모두 깨달음의 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