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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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스님 '대승경전을 통한 깨달음의 길' 법문과 토론 요약



시몽 스님.

11월 21일, 백양사 야단법석이 문을 연 날. 고우 스님의 법문에 이어 백양사 주지 시몽 스님이 ‘대승경전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주제로 설법에 나섰다.
시몽 스님은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체 상대적인 것이 끊어진 ‘절대현재’의 자리”라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동시에 남을 구원하는 진리, 자기 자신이 깨닫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을 다 깨닫게 하는 진리가 참으로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설했다.
다음은 시몽 스님의 법문 과 토론 요지.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내 것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마음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보시하는 마음은 저 사람과 나, 마침내는 우주와 내가 한 몸이라는 대자대비심이 본래부터 있기 때문이다.

보살의 수행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시에 힘써야 한다. 보살의 수행은 보시가 근본이기 때문이다. 보시를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른 보살행은 저절로 수반되는 일이다. 보시의 근본이 되는 것은 남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인데, 진실로 남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자신의 수행을 쌓아야 한다. 자신의 지혜가 모자라면 남을 구할 수 없다. 보시에는 자비심이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는 게을러지기 일쑤다. 덥다고 게으름을 피우고 춥다고 게으름을 피운다. 진실로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그래서 육바라밀이라는 보살행을 완전히 실천하려고 그 근본 되는 보시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코끼리나 말도 아까워하지 않고 국토나 보물 따위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처자나 권속들 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자기의 몸과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보시를 행하셔서 지혜를 기르고 덕을 쌓았던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괴로움을 없애고 번뇌를 없애는 진리는 그다지 거룩한 것이 못된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동시에 남을 구원하는 진리, 자기 자신이 깨닫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을 다 깨닫게 하는 진리가 참으로 거룩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진리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다만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몸으로써 실제 행해야 한다. 이른 바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실행하는 것,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다. 듣고 생각하고 행함으로써 지혜가 얻어진다. 이것을 문사수 삼혜라고 한다. 교법을 듣거나 책으로 읽거나 한 다음에는 깊이 생각해 보고 실제로 행해 보아 얼마간 알았으면 다시 한 번 듣거나 읽거나 하고 다시 깊이 생각하고 다시 실행해야 한다. 부처님 교법은 그 뜻이 매우 깊고 높고 넓고 넓어서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운데 그 깊은 뜻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체 상대적인 것이 끊어진 ‘절대현재’의 자리이다.

옛 선사들은 말하기 전에 눈썹 말을 전하고 묵연히 눈으로 미소를 짓곤 했다.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고 해서 목격도존(目擊道存)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것이 극락의 소식이요 안락처로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참하고 성내는 모든 번뇌 망상을 다 쉬고 모든 생각이 붙으려고 해도 붙을 수 없는 그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마음이 항상 편해서 몸은 분주하더라도 마음은 태연해서 담연히 부동해야 안락처에 들어간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면 몸도 마음도 자연히 편안해진다. 그런데 본뇌 망상의 도적놈이 들어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불안하고 안절부절 하여 자기 자신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런 때일수록 마음을 고요한 고요한 곳에 머물러 두도록 애쓰게 되면 자연히 익숙하게 되어져서 고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같이 되면 마음과 몸이 하늘과 달 보다 더 밝아지고 고요한 바닷물 보다 더 맑아지는 경지가 들어온다. ㅁ바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즐겁고 편안하다. 공부 하는 사람은 지헤가 있어서 무슨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말의 낙처(落處)를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천진하고 깨끗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데,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과 팔만의 번뇌를 일으켜서 순금에 잡철이 붙듯이 몹쓸 것들이 더덕더덕 붙어있다.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교법을 믿어서 마음도 올바르게 하고 그 마음속에서 아무 잡된 생각이 없다면 잡철이 순금이 되고 보검이 되는 것과 같게 되는 것이다. 바른 뜻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데 어찌 괴로우며 이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곳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건지는 사람은 완전하게 사물을 보는 판단력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욕된 것을 참는 곳에 머물러서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된다.

수행자는 부동의 경지에서 자유자재 해야 한다.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놀라지도 말아야 되는데, 산이나 풀밭을 가다가 꿩이나 산짐승이 푸드득 소리를 내더라도 마음을 다 잡아 공부를 지어가면 저와 같이 푸드득할 때도 마음이 부동이 된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마음을 두어서 구하지도 못하고 무심으로써 얻지 못한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망심이 없는 바로 그것이다. 말로써 짓지도 못하고 문자로 이 자리를 어떻다고 형용할 수도 없는 적묵(寂黙)으로 통할 수 없는 그 마침의 자리다.



<질의 응답>



토론자(거사) :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라”는 <서장>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좋은 방법은 없을까?
시몽 스님 : 세속적 본위로 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이런 것을 설게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일은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손에 쥐어줘도 모르는 것이 불법이니, 이런 건 익숙하게 하라는 법문이다. 습관을 고치기란 정말 어렵다. 목숨을 걸고 큰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익은 것을 설게 하긴 어렵다. 그래서 고인들은 매일 다리 뻗고 자기 전에 울었다고 한다.

토론자(우바이) :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다. 이 육신이 있다가 사라져버리면 보물창고인 본래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같이 사라져 버리는가?
시몽 스님 : 부처님 출가 동기가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듯이, 생사대사를 깊이 있게 심각하게 논의한 종교는 없다. 불교를 모르는 범부들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는 ‘일생일사관’를 가진 사람이 많다. 기독교인은 어머니 뱃속과 천국에 태어난다는 ‘2생2사관’이다, 그런데 불교는 ‘다생다사관’이다. 불교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생사관을 갖는다.

향봉 스님 :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인불(人佛)사상을 말하는 <법화경>에서 상불경보살은 모든 사람을 부처로 공경한다. 승만보살은 <승만경>에서 법을 설하고, 유마거사는 <유마경>에서 법문을 설한다. 이와 같이 거사와 보살이 부처님을 대신해 법문을 설하는데, 80세의 비구니가 20세의 비구에게 절하는 비구니 팔경계법은 시대에 맞지 않고 불평등한 계율이다.
토론자(비구니) : 비구니스님 가운데는 비구를 원수 보듯 하는 분들이 있다. 공부 차원에서는 비구, 비구니가 따로 없지만 같이 공동체로 사는 한에는 팔경계가 있어야 조화롭게 살 수 있다. 미얀마에서 거사 분에게 삼배를 받고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서, 절 받을 자격이 되도록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발원을 새롭게 했다. 경전공부 12년, 참선공부 10년를 경험한 후 위빠사나를 20년 동안 하고 있지만 큰 소득은 없다. 어제 도법 스님의 “수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직성이다”란 법문을 듣고 얼굴이 뜨끈 했다. 뭔가 수행의 체험을 얻으려는 조급증도 놓고 가장 정직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어른 비구니가 젊은 비구에게 절하는 것도 상(相)을 비우는 공부를 한다는 점에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토론자(우바새) : 선종의 28조인 달마 대사의 스승인 27조 반야다라 존자가 여성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의 유마거사라 불리는 방거사의 딸 영조는 위대한 선지식이었듯이 반야다라 존자가 여성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토론자(우바이) : 고등학생 시절,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듣고 경전을 안 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풍토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마명 보살의 <대승기신론>을 본 후 마음의 구조를 알게 됐고, <금강경>을 본 후 ‘즉비(卽非)’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언어와 문자를 강조하는 시대에 서양인들은 로고스와 담론을 통해 마음의 해탈을 얻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불립문자’의 잘못된 전통이 진리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하는 것은 아닌지. 경전을 통한 공부로는 도(道)를 통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시몽 스님 : 덕산 선사는 깨닫고 난 후 <금강경> 소초를 불태웠는데, 이런 경우는 경전에 쓰여 있지 않는 법(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어와 생각을 떠난 자리를 체험한 사람들은 불립문자를 말해도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체험을 할 때까지 경을 볼 필요가 있다.
도법 스님 : 모든 부처님 법은 병을 치유하는 약에 해당한다(응병여약).팔만사천 번뇌가 있기에 팔만사천 법문이 나온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직접 깨달은 부처님과 제자들은 불교를 대화와 실천의 종교로 이끌어나갔다. 시대가 흘러 설법이 많아지고 존재의 실상에 대한 언설을 갖고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게 됐다. 그러나 또 다시 시대가 흘러 이제는 언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됐다.그 전에는 중생의 번뇌를 언설로 처방을 내렸지만, 후대에는 언설의 절대화라는 함정에 빠져 언설이 병이 됐다. 오늘날은 ‘불립문자’를 절대화한 중독을 치유할 때다. 다시 언설의 처방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향봉 스님 : 오조법연 선사는 ‘불립문자’라는 말 대신 ‘불착문자(不着文字)’ 즉, 언어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경전과 어록을 공부할 것을 제시했다. 불립문자에 대한 오해를 풀고 불착문자의 본뜻을 되살려 정견을 확립하는 노력이 절실한 때다.
글 김성우 기자ㆍ사진 박재완 기자 | buddhapia5@buddhapia.com
2009-11-22 오후 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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