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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야단법석 이틀째인 11월 22일 오전. 각묵 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교수사)은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을 주제로 열정적인 법문을 펼쳤다.
각묵 스님은 “초기불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라고 주장했다. 각묵 스님은 “초기불전에서 나타나는 수행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들(신, 수, 심, 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 고, 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빠사나)”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각묵 스님 설법의 요지와 질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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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 즉,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 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재가자들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보시와 지계를 닦아서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도 행복할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궁극적인 행복은 열반이요 깨달음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名言)를 해체해서 법으로 환원해서 보아야 하는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온, 처, 계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철견,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逆觀) 등으로 말씀하셨다. 초기불전에서는 이러한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방법은 37보리분법이며, 이것은 팔정도로 귀결이 된다. 이렇게 하여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불자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열반의 실현이요 깨달음의 성취이다. 이 둘은 염오, 이욕,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염오경)이라는 문맥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열반야말로 불교의 진리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가운데 세 번째인 저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며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이 바른 깨달음이다. 따라서 열반은 궁극적 행복이요, 그 궁극적 행복은 바로 괴로움이 소멸된 성스러운 경지요, 이러한 것을 철견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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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깨달음은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가? 깨달음은 당연히 수행을 통해서 실현된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나타나는 수행은 팔정도를 근간으로 하는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37보리분법, 37조도품)로 정리된다. 그러나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만 닦으면 깨달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세상과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緣起)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오온(五蘊)’이라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12처로 말씀하셨다. 나와 세상은 조건발생이요, 여러 조건(緣)들이 얽히고 설켜 많은 종류의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러한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구명하여 그 괴로움을 없애야 저 깨달음과 해탈, 열반은 실현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나와 세상에서 진행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철저하게 밝히시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이다. 나와 세상과 여기에 존재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에 대한 연기적 관찰은 궁극적으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는데, 그것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라고 한다. 이처럼 교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37보리분법의 수행이 있어야 깨달음은 실현되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를 위시한 니까야에서는 깨달음의 실현이 ① 무상, 고, 무아의 통찰과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② 연기의 이욕(탐욕의 빛바램)-소멸을 통해서 ③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④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⑤37보리분법을 닦아서 실현된다고 밝히고 있다.
초기불전에서는 불교의 인간관인 오온과 세계관인 12처의 무상, 고, 무아를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설하고 있고, 연기관인 12연기의 이욕-소멸도 역설하고 있으며, 진리관인 사성제를 관통할 것도 역설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수행실천관이요 중도인 팔정도와 37보리분번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실현도 강조하고 있다.
초기불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핵심을 한 마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부처님 제자인 왕기사 존자는 <상윳따 니까야>에서 부처님을 “부분들을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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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석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 처, 계, 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무상, 고,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개념적 존재나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조건발생(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 처, 계, 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 등 초기불전에서 나타나는 수행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들(신, 수, 심, 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 고, 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빠사나)이다.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문제를 온, 처, 계, 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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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응답
토론자(우바이) : 주부이다 보니 육류나 생선을 요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늘 고민이 된다. 재가자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 것인지?
각묵 스님 : 부처님 당시, 스님들은 걸식을 하기 때문에 신도들이 주는 고기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초기불전에서 불자는 스스로를 위해서 고기를 직접 잡아서 해먹거나, 잡을 때 소리가 들리는 육류 등은 먹지 못하도록 했다. 재가자들도 가능한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사먹거나 가족을 위해 슈퍼에서 육류를 사서 요리해 먹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토론자(사미) :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색수상행식(오온)이라고 답하셨다. 느낌이 반복되어 기억을 만들고 개념을 형성해서 ‘나’라는 것을 형성하는 게 아닌가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기억’을 어떻게 보는가.
각묵 스님 : 초기불교에서는 기억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기억도 행위의 일종이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심리현상으로 환원할 수 있다. 구사론에서는 영(靈)을 ‘기억’으로 해석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챙김(사띠)’으로 번역한다. 기억 보다는 현재의 마음챙김이 중요하다.
토론자(우바새) : 윤회는 불교 고유의 교리인가, 인도 전통에서 유래한 것인가.
각묵 스님 : 삼사라(윤회)는 인도의 6파철학 등 모든 종교나 사상에서도 인정한다. 다만 윤회를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 힌두교는 ‘자아의 윤회’를, 불교는 ‘무아의 윤회’를 주장한다. 그런데, ‘무아’인데 왜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이는가. 불교에서는 윤회를 오온이 ‘찰나생 찰나멸’ 하며 상속(거듭되며 흘러감)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금생의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死心)’이 다음 생의 최초 마음이 되는 것으로 본다. 이른바 재생연결식이 여러 조건으로 인해 새로운 생의 흐름을 받아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아라한이 되어 반열반(般涅槃)에 들면, 윤회의 흐름이 끊어지게 된다. 부처님은 ‘반열반’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토론자(우바새) : 기독교 창조론과 과학의 진화론은 인간의 기원을 유한한 것으로 본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언제부터 존재한다고 보는가.
각묵 스님 :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입장이다. 물론, 중생이 깨달아 아라한이 되면 윤회는 끝이 난다.
토론자(사미) : 선불교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 해야 깨닫는다고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견성’을 어떻게 보는가.
각묵 스님 : 견성은 무아성(無我性), 무상성(無常性), 고성(苦性)을 깨닫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즉 무상, 고, 무아란 ‘삼법인’의 근본성질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토론자(비구) : 선종과 화엄, 법화에서 말하는 자성청정심은 연생(緣生) 연멸(緣滅)이 다 알아진 상태라고 본다. 이를 일러 구지 ‘일심’이니 자성청정심이라 한 것이다. 성품을 본다는 것은 연기법과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깨달은 상태로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차별이 없다.
토론자(우바새) : 초기불교에서는 정토 삼부경에 나오는 극락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각묵 스님 : 초기경에도 천상에 대한 법문이 많이 나온다. 욕계, 색계, 무색계에 각각 천상이 있다고 본다. 욕계 천상은 보시와 지계를 잘 지키면 태어날 수 있다. 색계 천상은 공덕을 쌓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물론 삼매(선정)를 닦아야 갈 수 있다. 특히 정거천은 삼매를 닦아 불환과(不還果: 아나함과) 이상을 얻은 성자만이 태어날 수 있다. 극락세계에 가려면 죽기 전에 염불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해야 하기 때문에 색계 4선천, 또는 정거천을 극락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토론자(우바이) : 화두 참선 중인 불자다. 8정도는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각묵 스님 : 정견(바른 견해), 정사유(바른 사유),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업), 정명(자른 직업), 정정진(바른 정진), 정념(바른 마음챙김), 정정(바른 삼매) 가운데 정념이 본격적인 수행에 해당된다. 정념은 수행의 대상에 대해 바른 마음챙김을 함으로써 선법을 유지시키는 방법이다. 수행의 대상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사념처이든, 화두이든, 염불이든 무관하다. 화두 참구는 화두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볼 수 있다. 화두 챙김을 하되 바른 견해를 갖추고 팔정도를 함께 닦아야 함은 물론이다. 화두 참구만 바르게 하면 팔정도는 저절로 닦게 된다.
토론자(우바이) : 깨달음을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깨달음의 대중화가 가능한가?
도법 스님 : 깨달음이 굉장히 신비화, 환상화 되어 혼란과 갈등이 적지 않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는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이들을 위해 삶을 바쳐 성자로 추앙받았지만, 그 자신은 의심과 불안, 두려움으로 암흑 같은 삶을 살았다고 적고 있다. 만나고 싶은 하나님을 평생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한 존재나 구원은 저 멀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그를 하나님, 부처님으로 보고 헌신하는 그것이 자기 구원이자 완성의 길, 해탈의 길이다. 깨달음의 사회화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 되었으면 한다. 수행을 해서 진리에 대한 의심, 불안,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수행은 나날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