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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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사랑이 자비 보살행
지상중계-빛고을불교아카데미 제2강 정락 스님
주제: 여래의 사자를 만나다 2 - ‘업력의 삶과 원력의 삶’
일시: 11월 3일
장소: 광주 동구KT문화센터
강사: 정락 스님(前 조계종 포교원장)





이렇게 좋은 자리에 동참하게 되어서 영광스럽습니다. 광주불자님들을 이렇게 좋은 법석에서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 법문 주제는 ‘업력(業力)의 삶과 원력(願力)의 삶’입니다.

업력의 삶과 원력의 삶을 비교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이야기 하는데, 어느 학자가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신 것이 불교다”라고 정의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하는 대목이 중생이 업력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보살의 원력으로 살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 불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인 ‘업력의 삶과 원력의 삶’이란 다시 말해서 ‘중생의 삶과 보살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펴봄에 있어서, 각자 삶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렇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중생의 업력으로 사는 삶 속에서도 어떻게 살면 더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삶과 부처님께서 ‘어떻게 살아라’고 설하신 내용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에 앞서, 행복의 조건을 몇 가지 열거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이것이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주 능력을 갖추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체력 뿐만 아니라, 재력, 지식 등 모든 능력을 잘 갖추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자유스러움입니다. 어떤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자유스럽게 살면 행복 조건 중 하나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떤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다섯 번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내가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가족 및 이웃, 또 직장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바깥에서 기쁜 일도 많이 생겨야 되겠고,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복력이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능력만 가지고 노력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복력이 있어서 그 복의 힘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들 딸을 기르는데 자기 체력이나, 재력이나, 지식이나, 그런 능력을 다 동원해서 자식을 잘 키울려고 해도 자식 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차이가 있더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복력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있으면 땅 위에 나와 있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뿌리가 있듯, 보이는 능력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안 보이지만 복력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력이 있는 사람이 행복의 조건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를 제가 행복의 조건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건강하고, 오래살고, 능력 있고, 자유스럽고, 지혜가 있고, 사랑하고, 기쁨이 넘치고, 복이 있는 삶을 말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뭘 더 찾는 표정입니다. 일곱 가지가 부족하다는 표정이네요. 아니면 또 만족하다는 표정입니까? 사실 여기서 한두 가지만 다 갖추어도 괜찮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닥쳤을 때 가령 몸이 좀 아플 때에는 재산도 다 필요 없고, 그저 몸 건강한 것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제가 말씀드린 일곱 가지 중 단 하나만을 구할 수도 있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 그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면 제일 첫번째,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이렇게 그 일곱 가지를 다 갖추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만 갖추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세간에서, 중생세계에서 욕심을 갖고 업력으로 살아가는 내 삶을 놓고 보면 만족하게, 완전하게,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건요, 뭐 60대 된 분이 몸이 좀 아플 때에는 10년만 더 살았으면, 20년만 더 살았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근데 아무리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그냥 생에 대한 애착을 놓고 본다면 만족하고, 완전한 것은 없어요.

제가 어느 절에 살 때, 96세 된 노스님을 제가 시봉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절에서 스님들이 세배를 왔어요. 절에 세배를 와서 96세 된 노스님 보고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여쭈니, 아주 당당하게 “아흔여섯이다” 합니다.

그러니까 세배 한 스님이 자기 생각에는 덕담한다고, “아이고, 스님 100세까지 사셔야겠네요.” 그랬단 말이죠.

그 스님이 간 다음에 노스님께서 “그 중 다시는 못 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앞으로 나보고 4년만 살다 죽으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96세 된 노스님께서 더 살고 싶으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렇게 건강, 오래 사는 것, 아름다운 것, 이런 것을 놓고 보면 중생 세간에서는 만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보통 50대, 60대만 되면 늙고 주름이 생기는 것을 놓고 볼 때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거의 평준화가 된답니다. 누가 이쁘다 그런 소리, 그 때 되면 안 듣는데요. 그냥 누가 돈이 많다, 그런 이야기나 좋아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건강을 이야기 하고, 오래 살기를 이야기 하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100년, 만년 지나면 서로 꼴(모양)도 못 봅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원한 생명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중생 세간에서 번뇌를 다 끊어버리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서기 전에는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고, 살아있는 그 자체도 삶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세워놓고, 그런 원력을 세우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우리가 공양을 올릴 때, 차 공양을 올리는 것은 열반을 상징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열반을 증득해야겠습니다. 부처님으로서 갖추신 조건 중 ‘부처님은 열반을 증득하신 분이다’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불자로서,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열반을 증득해야 되겠다는 것을 목표로 두고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업보 속에 사는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어도 중생의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그 다음에 이제 능력을 생각해 봅시다. 능력에는 재력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이런 것이 포함될 수 있어요. 부자가 되면 부자 될수록 더 욕심이 많아진답니다. 아는 것도 많이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고 그렇습니다. 사실 이렇게 따져보면 서로 욕심내고 자기 자신의 욕심 속에서 살다보면 만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 욕심내서 다투다 보면 절대 혼자서 만족하는 완전한 능력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능력도 분석을 해보면 우리 중생의 업력으로 사는 이 삶 속에서는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잘 살아보려고 해도 만족할만한 완전한 그런 삶이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유를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자유도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좀 걱정이 있거나, 근심이 있으면 그건 자유라 할 수 없어요. 화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도 자유스럽지 못한 거예요. 해탈을 해야 완전히 자유스러운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자기가 자유로우려고 해도 마음 속 근심 걱정이 있다든지, 분노가 있다든지 이렇게 되면 자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라고 하지만 중생의 업보를 지니고, 업력으로 사는 한은 자유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예요. 지혜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믿는 사람들을 종(노예)이라고 그럽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모두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성불 한다고 그래서 부처라는 거예요. 그런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보살수행을 해서 성불하겠다든가, 일체 중생을 제도해야겠다라든가, 그러면 중생을 자식 같이 사랑하고, 중생을 위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죠. 정말 생각해 보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세간의 어떤 지혜나 이런 것으로는 완전한 지혜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완전한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 전에 등 공양을 올리는 것은 반야를 상징합니다.

또 하나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세속, 세간에서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 없어요. 어머니가 아들 딸 사랑하는 것을 그래도 가장 완전하다고 하지만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 없어요. 중생의 소견을 가지고 사는 한에는 그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그런 말이 있는데, 이는 원수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대단한 것 같지만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을 자비라고 그럽니다. 자(慈)는 일체 중생들을 사랑하고, 일체중생을 행복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일체 중생의 고통을 다 없애주고자 하는 마음이 비무량심(悲無量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일체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수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라는 말안에 그런 완성된 사랑, 그걸 자비라 그러고, 그걸 보살행이라 그럽니다.

그 다음에 기쁨을 생각해봅시다. 사실 나이가 먹어 가면 점점 기쁨도 줄어들어요. 자기만 기쁜 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남 기뻐하는 꼴도 못 보게 됩니다. 중생 세간의 기쁨은 그 때 뿐인 것이 많습니다. 가령 집을 샀다고 기뻐하지만, 집도 평생 열 채를 살 것도 아니고 그 때 뿐입니다. 중생이 기쁜 일이라는 것이, 죽어도 한이 없다 할 정도로 기쁜 일이 평생에 몇 번 없습니다.


그 다음에 복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비교해보면, 주는 사람이 훨씬 더 복이 많은 것인데 우리는 얻어먹는 것이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수경>에 ‘복 복자’가 두 번 나옵니다. ‘受福如佛等(수복여불등)’이라 할 때, 수복은 부처님한테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복이 바로 베풀어주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願我勝福(원아승복)’이 나오는데 전부 베풀어주는 복을 말합니다. 얻어먹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생은 얻어먹는 복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겨우 한다는 게 금생에 보시를 많이 하면 내생에 많이 받는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생에 부자 되어서 잘 먹고 잘 살자 그런 생각이기에, 사실은 금생에 보시를 많이 하면 내생에는 더 많이 보시한다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몇 가지 부처님의 경지, 즉 원력의 삶에 들어서서 보살의 삶으로 가는 삶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중생의 삶에서 원력의 삶으로 방향을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아까 중생의 삶, 다시 말하면 업력의 삶 속에는 아무리 이렇게 살고 싶다, 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분석을 해놓고 보니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두고, 다시 말하면 버리고, 이제 원력의 삶쪽으로 나아가는데 목표로 해야 될 것 몇 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옛날 중국 초나라 임금이 있었는데,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사냥을 나가면 금으로 된 화살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화살이 사슴에 꽂혔을 때는 사슴과 금화살을 한 번에 회수할 수 있지만, 빗나간 화살은 따로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날이 어둑어둑 해져서 신하들이 횃불을 들고 화살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아직 화살이 다 회수가 안 되어서 화살을 찾으려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임금이 “내일 와서 찾지 뭐하려고 이렇게 밤에 횃불 들고 찾을 것 뭐 있느냐, 내일 와서 찾으라”고 하니, 신하들이 “오늘 밤에 찾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임금님이 금으로 된 화살을 사용하는지 알고 밤이 되면 횃불을 들고 온 산을 뒤져서 주어갑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님 하는 말이 “초나라 임금이 잃어버린 것을 초나라 사람이 주어 가는데 무엇이 아깝느냐” 하는 겁니다. 얼마나 신하들이 감동을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공자님께 가서 자랑을 합니다. 공자님이 가만히 듣고 하는 말이 “왜 초나라 사람만 주어 가야 하느냐? 그냥 사람이 잃어버린 것, 사람이 주우면 되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천하통일할 만한 인물이 아니고 그 초나라 임금 밖에 못해먹을 위인이라고 합니다.

또 노자님이 그 말을 듣고 초나라 임금이나 공자님이 거기서 거기라고 합니다. “그것을 안 주우면 어떻고, 노루가 물어 가면 어떻고, 꼭 사람만 주워야 되느냐? 그것이 사람 욕심만 기른다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자님이 그랬고, 노자님이 그랬고, 초나라 임금이 그랬다고 하니까 우리 불자님들에게 물으니 뭐라고 답변했는지 아십니까?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는데 금은 곧 색이거든요. 그래서 “금즉시공(金卽是空)이니라”하고 말합니다. 그 자체를 공(空)이라고 본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금에 대한 욕심, 이런 것까지 버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진심(嗔心) 즉, 화 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의 스승인 정호, 정이 두 형제가 하루는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서 죽음 직전에 이릅니다. 사람이 큰 풍랑을 만난 상황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아비규환입니다.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아우성을 치는데, 그 때 두 형제는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 뒤, 배가 다행히 언덕에 닿아 걸어나오면서 형제간에 대화를 합니다.

형이 동생에게 “아까 배를 타고 오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몸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음은 어떠했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동생이 마음은 좀 불안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안한 마음을 다스린 겁니다. 치심(治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수심(修心)이라 해도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고요히 할려고 애를 썼다는 거죠.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지막에 어떤 스님 한 분이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배에서 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붙들고 물었습니다.

“아까 배를 타고 오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스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은 배를 탄 일도 없고, 풍랑을 만난 일도 없습니다.”

이런 경지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떠나서 무심(無心)의 경지를 말합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배를 탄 일도 없고, 풍랑을 만난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내용은 기억이 안 될 수가 없어요. 근데 깊이 그 뜻을 알아듣는다면, 정명도, 정이천 그 형제의 경지에서는 알아들을 만한 말이예요. 그런 경지가 갖추어지면 얼마나 참 마음이 편하겠어요. 얼마나 자유스럽겠어요.

그래서 오늘 이후에는 혹시 불자님들이 절에 갔을 때, 좀 마음 상한 일이 있었다든지, 혹은 친구 집에 갔을 때 초청 받아 갔는데 푸대접 받아서 욕하고 싸우고 나올 때, 그 때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다시는 그 집에 안 간다든지, 사람을 초청해 놓고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무 말 않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옆의 사람이 “당신은 아까 그 집 가서 그렇게 욕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개 그 때 그 주인이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다고, 그럴 사람 아닌데 그런거 보면 무슨 일 있어서 그러니까 하고 우리가 이해합시다.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대단해요. 그런데 그 때, 오늘 법문 들었으면 그런 정도 가지고 안 됩니다. “그 집 간 일도 없고, 욕 먹은 일도 없다”고 해야 됩니다.

원력의 삶이라는 것은 반야공(般若空)을 목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업력의 삶을 버리고 원력의 삶으로 바꾸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까 언급한 ‘금즉시공’이요, 또 배를 탄 일도 없고, 풍랑을 만난 일도 없는 그런 경지를 증득하는 것이 원력의 삶의 시작입니다. 그렇지 않고 중생의 세간에 끄달려서 얽매여있는 한 업력의 삶에서 못 벗어납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은 원력의 삶을 살아가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좋은 인연 만나서 참 좋습니다.
정리=양행선 광주전남지사장 |
2009-11-10 오전 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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