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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 스님, 7년 무문관수행 마치고 혜능 선사 보임수행처 중흥
6조 스님의 수행처 중국 광동성 옹원현 동화선사를 가다




중국 광동성 옹원현 동화선사 대웅전에서 좌선하는 사부대중.

중국 광동성(廣東城) 신흥현(新興縣)에서 태어난 6조 혜능 스님은 어려서 부친을 잃은 데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땔나무를 팔며 살던 가난한 나무꾼 소년이었다. 어느 날 손님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 이란 구절을 듣는 순간 마음이 밝아져 황매산(黃梅山)에 있던 5조 홍인 스님을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혔다.

이 때 홍인 스님이 “너는 영남지방의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하고 사람됨을 떠보자, 혜능은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해 행자가 된다.

참선하는 동화선사 사부대중.

혜능은 이후 절에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다가 마침내 홍인 스님의 입실 제자가 되어 <금강경> 법문을 듣고 단번에 크게 깨달아 그날 밤으로 법을 전수받아 선종의 6조(六祖)가 됐다. 밤중에 스승으로부터 전법의 표시인 ‘가사와 발우(衣鉢)’를 받고 시기하는 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간 혜능 선사는 14년간 사냥꾼 무리에 숨어지내다가 조계(曹溪) 보림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그렇다면, 조사선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리는 혜능 선사가 암살 위험을 피해 숨어서 보임(保任) 즉,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가는 공부에 몰두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광동성 옹원현(翁源縣) 동화산(東華山) 자락이었음이 본지 취재결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밝혀졌다.

동화선사 곳곳에서는 연화생(불교기공) 수련하는 스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혜능 선사, 옹원현 동화산에서 14년간 보임



10월 24일 오후, 광동성 광주공항에 내려 2시간 30분 정도 승용차를 달려 도착한 옹원현에서 다시 시골길을 10여 분 정도 들어가니 기이한 풍광의 산세가 모습을 드러낸다. 독수리봉, 사자봉, 코끼리봉, 관음봉, 낙타봉 등의 형상을 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동화산이었다. 석회암 동굴이 발달되어 곳곳에 긴 동굴과 수행처가 남아있는 동화산은 그야말로 육조 스님이 한눈에 수행처임을 직감한 도량이었던 것이다.

동화선사 방장 만행 스님이 3년간 무문관 수행한 삼성동(동굴).

<소관부지(韶關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남조시대 양나라 무제의 천감 원년(502년)에 인도의 고승 지약(智葯) 선사가 바다를 건너 광동성 옹원현 동화산에 왔다고 전한다. 지약 선사는 이 산의 영기(靈氣)가 비범하다고 느껴 영취사를 창건했다. 영취사는 수나라 때 전쟁으로 파괴되었는데, 당나라 때 육조 혜능 스님이 정혜 스님을 데리고 와서 영취사를 동화사라 개명했다. 그러나 명청 때의 전쟁으로 다시 폐사가 되고 말았다.

삼성동 무문관 내부.

동화산에는 그후 절터만 남아있었지만 다행히 동굴 수행처들은 온전히 보전됐다. 특히, 깍아지른 절벽 위에 나있는 혜능동(慧能洞)은 지약 선사와 혜능 선사가 머물던 동굴로, 현재 삼성동(三聖洞)으로 개명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젊은 선객이었던 만행 스님이 1997년 8월부터 3년간, 이 동굴에서 세 번째 폐관(閉關: 공양구만 남기고 문을 봉인한 채 정진하는 무문관 수행) 정진을 무사히 마친 후, 혜능동을 삼성동으로 개명하고 동화선사를 창건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삼성동 무문관에 앉아본 필자와 대유학당 윤상철 대표.

1997년 대만의 고승 약휘 스님의 증명하에 입관의식을 치른 만행 스님은 혜능동에 들어가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동굴 밖 멀지 않은 곳에 묻어주시오. 수행하는 사람의 호법(護法)이 되고 삼성동의 호법이 되겠소.”

삼성동 무문관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 만행 스님 혜능굴에서 세 번째 무문관 수행



만행 스님이 무문관 수행을 처음 결행한 것은 민남(閩南)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되던 1993년 1월부터였다. 복건성 장주시 서죽사 근처의 동굴(絶塵洞)에서 여러 도반 스님들과 거사들의 성원을 받으며 입관한 스님은 23개월을 보낸 후, 1994년 12월 20일 출관했다. 동굴에서 스님은 하루 18시간씩 좌선을 하고, 나머지 6시간도 ‘옴마니반메훔’ 6자진언과 태극권 등을 수련하며 잠을 자지 않았다. 좌선할 때는 결가부좌를 하고 굴의 천장에 기둥을 매고 동아줄을 늘어뜨린 뒤 목을 감음으로써 혹여 자신도 모르게 눕게 되는 것을 방비했다. 2년간의 혹독한 폐관 수행을 하며 스님은 무아(無我)삼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화산 삼성동에 오르는 계단.

하지만, 스스로 완성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여긴 만행 스님은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서장(西藏) 연화도에서 1995년 1월부터 1996년 가을까지 두 번째 폐관 정진에 들어갔다. 랍몽(拉蒙) 대선사의 지도아래 육근(六根)을 닫고 하루 종일 선정에 들어, 명심견성(明心見性: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과 실상무상(實相無相: 실상은 모양이 없다)을 체험한다. 그러나 랍몽 대선사는 “너는 이제 젖을 떼어도 되겠다. 그러나 더 튼튼하게 하자면 아직도 수차 반복하면서 길러내야 한다”며 철저한 보임공부를 당부한다.

동화선사 일주문 밖에 보이는 사자봉.

그리하여 마지막 목숨을 건 폐관 정진이 1997년 8월부터 2000년 9월까지 이곳 혜능동에서 이어진 것이다. 끝없이 머무는 바 없이, 닦는 바 없이 3년간의 무문관 수행을 마친 스님은 “종극의 미지(未知)를 철저히 깨달아 온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가운데 공(空)과 유(有)를 초월하고 삼계를 초월해 다시금 세간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10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선방인 자재당.



# 365일 집중수행 하는 동화선사



“믿으려면 굳게 믿고 수행하려면 꾸준히 힘을 다하라. 일 처리는 원만하고 융통성 있게 하라. 도(道)는 인간 세상에 있으며 ‘공’에도 ‘유’에도 머물지 않는다.”

자재당에서 좌선하는 스님.

이와 같이, “행동 하는 자비심이 진정한 자비심”임을 깨달은 만행 스님은 마침내, 무문관 수행처 아래 옛 동화사 터에 동화선사를 창건했다. 그리고 중국불교협회의 비준아래 1998년 동화사 방장에 취임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동화사를 증축, 1000여명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광동성 최대의 선종 사찰을 중건하기에 이른다.

만행 스님이 7년간의 무문관수행을 마친 후 처음으로 법을 설한 관음굴.

10월 25일 새벽 4시 30분, 동화선사 대웅전에서 봉행된 예불은 비구, 비구니 스님 50명을 비롯한 사부대중 200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1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중국식 종과 목탁, 요령 등의 울림과 염불 가락이 아름답고도 장엄한 화음을 연출했다. 능엄신주 염송과 아미타경 독경, 관음 정근 등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의 예불의식 보다 복잡하고 길지만 예불시간 자체가 염불ㆍ독경 수행이 됨을 느꼈다.

동화선사의 생활선 가풍을 적은 만행 스님의 휘호들.

예불이 끝나자 사부대중은 대웅전에서 나와 기러기 처럼 줄을 지어 아직 어두운 도량을 가로질러 공양간으로 향한다. 1000여명은 수용함직한 넓은 공양간에서도 예법은 엄정했다. 사부대중은 일사분란하게 공양진언을 외운 후 묵언하며 식사를 하고 공양구도 직접 씻는다.

10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객당.

아침 청소 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참선, 간경, 설법, 연화생(불교기공) 수련 등 수행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어 저녁예불에 이어 밤 9시까지 이어진다. 365일 내내 집중수행이 이어지는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수행전문도량인 것이다.

육조혜능 스님의 발자국이 찍혀있다는 삼성동 근처의 바위.



# 비구니 창지 스님, 3년 무문관 회향 설법



10월 25일 저녁 8시, 저녁 예불에 이어 두 시간의 참선이 끝나고 특별 법문시간이 마련됐다. 이날은 사자봉 아래 동굴 무문관에서 3년간의 폐관 정진을 마치고 나온 비구니 창지(昌智) 스님이 수행담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대웅전에서 200여 수행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57세의 창지 스님은 간절하면서도 빠른 말투로 1시간 이상 체험담을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통역자와 다수의 대중도 알아먹기 힘든 광동 사투리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삼성동에서 내려다 본 동화선사 전경.

창지 스님의 수행담이 끝나자, 방장 만행 스님은 창지 스님의 용맹정진을 격려하는 한편,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 무슨 정진을 하든 일심불난(一心不亂)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하루 뒤, “창지 스님의 수행 경지에 대해 말씀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만행 스님은 “아직 문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짤막하게 평했다.

3년 무문관수행을 마치고 나온 비구니 창지 스님.

7년동안 세 번의 무문관 결제를 마치고 10년 동안 불사를 하고 있는 만행 스님은 동화선사를 완전한 수행도량으로 만들어놓았고, 365일 집중수행을 하고 있었다. 육조 스님과 만행 스님이 정진한 삼성암 이외에 길고 짧은 동굴이 많아서 관광객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임에도, 만행 스님은 1000여명이 동시에 좌선할 수 있는 3층 규모의 선원인 자재당을 건립, 외부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수행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 10년만에 신도 30만의 수행전문도량 일궈



동화선사에서 100㎞ 이남에 위치한 남화사에는 육조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육조 스님이 14년간 보임공부한 동화선사는 중국에서도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불과 10년만에 2만㎡에 달하는 전각들을 건립해 육조 스님의 수행도량을 중흥시킨 만행 스님의 폐관 수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동화선사는 현재 30여 만명의 신도를 가진 거찰이 됐다. 특히, 스님의 구도기와 법문을 담은 <마음의 달(心中月)>과 <항복기심(降伏其心)>이 100만 부 이상 보급되면서 중국 전역은 물론 홍콩, 대만 등 외국에서 온 수행자들도 장기간 머물며 정진하는 전문수행처로 인식되고 있다.

동화산에는 길고 짧은 석회암 동굴이 많다.

한국어로 번역된 <마음의 달>(대유학당 刊)에 추천사를 쓴 한국불교금강선원 총재 활안 스님은 “만행 스님은 세 차례에 걸쳐 폐침망찬(廢寢忘餐: 잠을 자지 않고 음식을 잊음), <능엄경> 50변마사(辯魔事: 삿된 수행경계를 판단함)와 <원각경> 25원통(圓通)을 체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사회를 구제하는 진정한 선지식이 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활안 스님은 또 “만행 스님은 역경 속에서도 좋은 스승을 만나 수행과정의 잘못된 길을 밝히고 건강한 몸으로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있으니, 21세기 지구상에서는 보기 드문 수행자”라며 수행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동화선사 방장 만행 스님.





“심법의 원만함은 반드시 세속에서 수련해야”
7년 무문관 수행, 동화선사 방장 만행 스님


“능력을 연마하는 것은 동굴속에서 수련할 수 있지만, 심법(心法)의 원만함은 반드시 인간세상에서 수련해야 합니다. 도(道)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 세상에 있으니, 돌파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세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선정입니다.”

7년에 걸쳐 3번의 폐관(閉關: 무문관) 정진을 무사히 회향한 동화선사 방장 만행 스님은 “하루 18시간씩 가부좌를 하고 좌선하며 잠을 자지 않는다고 성불하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신체로만 닦은 도는 영원하지 못하며 모두 생멸하게 된다”며 “오직 세속에서 수련을 거쳐 심리상태가 비워질 때에야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무형무상(無形無相)한 것(佛性)이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즉, “종극의 불과(佛果)를 얻자면 오로지 인간세상에서 보살도를 행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

만행 스님은 무문관 수행의 부작용과 위험성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설명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산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조절(鍊心調氣)’했지만, 결국은 비관하거나 실망하고 질병에 걸려 고생이 막심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고 수행하면 어떻게 기(氣)를 조절할 수 있겠습니까. 산속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 당분간 마음이 편할 수 있지만 일단 세속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다 소용 없게 됩니다. 수련을 하는 목적은 도를 남에게 보이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자기의 지혜를 세속에 필요하게 쓰자는 게 목적입니다.”

만행 스님은 “세속이야말로 심리 상태와 능력을 검증하고 인품을 검증하는 유일무이하고 효과적인 장소”라며 “수도자가 가장 먼저 닦아야 하는 것이 바로 마음가짐, 지혜, 자비심, 인품과 인격”이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스님은 “이와 같은 수련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환경이 바로 세속이요 사람들의 무리”라며 “산림 속에서 수련한다고 해서 선자(禪者)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만행 스님은 혹독한 무문관 수행을 이겨냈지만, 극단적인 고행을 권하지 않고 오히려 단박 깨침의 기연과 늘 깨어있으면서 비춰보는 ‘각조(覺照)’가 더욱 소중하다고 밝혔다.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인데 또 무슨 부처님이 된다고 합니까? 도(道)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풀어놓고 고요히 안정한 뒤에 관(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하기만 하면 됩니다.”

동화선사 방장 만행 스님.


1971년생으로 18세에 중국 하문시 남보타사에서 삭발 출가한 만행 스님은 22세에 중국 민남불교대를 졸업하고 1993년부터 7년간 세 번에 걸쳐 폐관 정진에 돌입했다. 1998년 동화선사(www.donghuasi.org) 방장에 취임한 스님은 2003년부터 동화선사 중흥불사에 나서 2008년 10월, 10만 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봉행했다.

스님은 50여 스님, 종무원들과 함께 불사현장에서 일하는 한편, 틈틈이 제자들과 신도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설법하면서 중국에서 보기 드문 수행전문도량을 일구고 있다.
중국 광동=글ㆍ사진 김성우 기자 | buddhapia5@buddhapia.com
2009-11-04 오전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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