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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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지혜 자비 키우는 수행해야”
[선지식을 찾아서] 툽텐 갸초 스님




호주 출신의 젊은 의사였던 에이드리언 펠트만(Adrian Roy Feldmann)은 젊은 날을 히피로서 자유분방하게 보내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탐구했지만 어떤 종교에도 흥미가 없었다.

이십대 후반에 그는 갑자기 의사 일을 접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찾기 위해 러시아 신비주의자 구제프와 중국의 노자, 장자 사상에 의지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여행을 떠난다.

펠트만은 아프가니스탄의 시골을 여행하며 친구들과 환각제와 히피 음악, 철학적 토론을 즐겼지만, 얼마 안 있어 그런 삶에서도 회의를 느낀다. 자유로움과 순간적인 쾌락은 있었지만, 참된 평화와 행복이 아님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펠트만은 세 친구와 함께 작은 돛단배에 몸을 맡기고서, 삶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맡기라는 노자의 도(道)를 좇아 장장 10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인더스 강을 여행한다.

이 여행을 마칠 즈음, 대자연에서 얻은 가르침으로 내면의 힘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다시 의사의 일상으로 돌아간 펠트만은, 그러나 예상 밖의 좌절을 맛본다. 히피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동체 삶을 도모해 보기도 하지만 음악과 마약, 자유로운 삶도 해답이 아님을 깨닫고서, 다시 아시아를 여행하다가 1974년 3월, 마침내 네팔 카트만두에 있는 코판사원에서 불교 명상 강좌에 참석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비로소 세상 문제의 원인에 대해 뜻깊은 해답을 주는 동시에 개인이 가진 고뇌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명상법을 포함한 심리학 체계로서의 불교에 감명을 받게 된다.

불교를 ‘원시적인 히말라야 미신’쯤으로 치부하던 펠트만에게 붓다의 가르침은 의사로서 고민하던 문제인, 감정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완전한 처방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르마(法)라는 약은 약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발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인과 세상의 괴로움을 없애는 탁월한 방편으로서 붓다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그는 결혼 생활에 대한 갈망을 접고 1975년 툽텐 갸초(Thubten Gyatso)라는 법명을 받고 티베트 스님이 됐다.

갸초 스님은 네팔과 인도에서 네 해 동안 안거수행을 한 후, 1980년대에 프랑스에 티베트 불교사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불교교육과 명상 지도를 더 받았다. 그 뒤로 호주와 대만, 홍콩, 몽골 등지에 머물면서 세계 곳곳에서 불법을 전해왔다. 특히 2004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오스트레일리아 캥거루 섬에 홀로 안거하며 무문관 3년 결제를 무사히 회향해 수행승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히피’에서 ‘스님’으로 탈바꿈하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인생 여정을 쓴 책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원제: A Leaf in the Wind - A Life''s Journey)>(호미 刊)의 저자로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진 갸초 스님이 10월 11일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13일 서울 조계사 내 갤러리 ‘나무’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진 스님은 당신의 수행체험을 통해 얻은 참다운 행복과 평화에 이르는 길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스님은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방한하셨는데, 달라이 라마 처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2000년 첫 방한 당시 나흘간 도심 안거에 참여하면서 선 수행에 대한 한국 스님들의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친절하고 너그럽고 자연친화적이며 예술적인 감각이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곳이 바로 정토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친척들의 한국과의 인연이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삼촌이 호주 군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삼촌의 딸은 한국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죠. 그리고 삼촌이 암에 걸렸을 때 한국의 참선 수행을 통해 병을 치유하고, 이 이야기를 호주에서 책으로 펴내 인기를 얻은 바 있습니다.

9년전 몽골에서 간단미술대학 김선종 교수와 김인희씨를 만나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를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게 된 인연이 깊습니다.”

-티베트불교와 한국불교는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습니까?

“티베트 불교는 우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잘못된 생각을 제거한 후 명상을 통해 옳은 생각까지도 다 비우는 수행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보리심을 발해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도록 합니다.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한국불교는 이성적인 것보다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대승불교의 지향점에서 양국 불교는 결국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까지 3년 동안 무문관 결제를 마치셨는데,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처음에는 집중이 어려웠지만 불법승 삼보에 대한 신심으로 나중에는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 정도 정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진에 자신감이 생기자 수행의 방향을 더욱 뚜렷이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이번 3년 안거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문관에서 나오기가 싫고 계속 정진하고 싶다는 점이었습니다. (웃음)

어떤 도반들은 대승의 수행자가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한 소승의 수행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3년 결제의 정진력으로 몽골불교 포교에 다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니 제가 소승의 수행자가 아닌 점은 분명합니다. (웃음)”

-올해 3월부터 몽골 울란바토르 불교회관에서 상임법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1999년 스승님이 몽골에 갔을 때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가 약해져, 몽골 불자들이 불교센터 건립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몽골에는 선교사들이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고, 불교는 미신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불교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 상임법사를 맡은 것은 그 때의 요청에 응해서 몽골 불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몽골 불교는 티베트불교와 같은 전통이어서 책임감도 있습니다.”


-1970년 히피 세대들이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의미에서 앞날이 밝은 의사의 길을 버리고 히피로 떠돌다가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방랑의 최종 종착지를 왜 티베트로 택하셨나요?

“남들은 히피라고 불렀지만 머리가 좀 길었던 것 말고는 우리는 멀쩡했습니다. (웃음)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당시, 우리 세대는 부모님을 비롯해 선생님, 정치인, 군인 등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심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자유로운 사상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엉망진창인 사회를 개선할 해법을 찾기 위해 해외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특히 서양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 역시 그러한 이유로 여행을 떠났고, 인연법에 의해 티베트불교와 두 분의 스승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불교가 매우 과학적인 것이 호기심을 자극한 요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의사는 몸을 고치는 사람이지만 그들 자신의 마음은 ‘혼돈(mess)’ 상태인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마음을 고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히피 세대는 물론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에 열광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리가 아니었다면 서구사회에 법이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30여년이 지난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도 정신적으로 공허해지는 반대 여파로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서양의 히피 음악이나 영화 등에 공감을 표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계시다면.

“한국의 젊은 세대는 참 행복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정신문화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문화속에는 이미 불교의 가르침이 녹아있어서,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불교를 배울 수 있지만 서구사회에는 그런 기회가 드물지요. 한국 젊은이들이 티베트나 다른 불교국가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한국의 전통불교를 버려선 안 됩니다. 방편이 다를 뿐 궁극에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 내면적으로 성장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스승을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구도의 길은 한 개인의 온전히 사적인 여행입니다. 그 길은 인내심 많고 자비롭고 영성이 뛰어난 스승이나 도반의 지도 없이는 나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곳 한국에는 수행을 많이 하신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유교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제자들이 스승에게 과감하게 질문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면 좋겠지요. 산중에 계신 스님들도 재가자와 역동적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개개인 차원에서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없애나가면 이런 개인이 모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고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참된 고요와 평화는 사실 마음의 본성입니다. 이미 본래의 마음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무명으로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고자 명상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계발하는 것이 티베트불교의 수행법입니다. 모든 생명과 사람을 분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탐구와 명상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 다음 모든 존재를 나의 어머니로 여기는 자비심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13일 저녁, 서울 인사동 불교영어도서관에서 열린 법회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설법의 형식을 통해 다시 한번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스님은 40여 스님과 불자들이 모인 가운데, 마음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수행자가 아집과 분별심을 여의고 참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법문했다.

“괴로움의 뿌리는 자기 자신이 독립된 실체로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이나 사건들, 외부의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식상의 개념이나 생각으로만 존재함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은 그 모든 것에 좋다, 나쁘다 등의 실재하지 않는 자질을 부여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질이 그 사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을 뿐,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이 투사한 것에 대해 집착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면서 반응합니다. 모든 괴로움을 풀 길은 이러한 그릇된 겉모습을 꿰뚫어보는 지혜이니, 이것이 바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지혜는 모든 것이 우리가 마음으로 투사한 것일뿐 비어있음을 즉,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입니다. 잘못된 터전에 기초를 둔 자아(ego)는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스승이 할 일은 제자가 자아를 벗어버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삼보에 대한 믿음으로 생긴 용기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개성을 잃는 대신 우린 붓다가 됩니다. 그것은 자아를 대신해 통합된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날 법문의 핵심은 법회를 마치고 사부대중이 한글과 영어로 합송한 ‘회향기도’에 오롯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공덕으로 견성하여서 우리 원수 번뇌 극복해 생로병사에 매달린 중생 해탈케 하소서. 보배로운 보리심 없는 이에게 생기고, 있는 이에게는 더욱 성장케 하소서. 허공이 남아있고 중생이 남아있으면 나도 남아 있어서 중생 고통 해탈케 하소서.”

갸초 스님은 이번 방한 기간에 14세기 티베트 불교의 스승 쫑까파 대사가 지은 <람림(Lam-rim.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바탕으로 불교의 근본 원리와 마음을 일으켜 수행해 나가는 단계 등을 한국 스님과 불자들에게 법문한다.

부산 홍법사(18일 오전 10시) 청도 운문사(20일 오전 7시30분, 운문사 스님 대상) 울산 해남사(20일 오후 7시) 부산 미타선원(21일 오전 11시) 동국대 경주캠퍼스(22일 오전 11시) 해남 미황사(24일 오후 2시) 중앙승가대학 승가학연구원(26일 오후 2시) 서울 불광사(27일 오전 10시)에서 법문을 통해 불자들의 보리심을 활짝 꽃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툽텐 갸초 스님은

속명은 에이드리언 로이 펠트만으로, 1943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1969년 멜버른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971년 영국 런던대학에서 열대의학 학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뉴기니,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런던에서 학위를 받고서 의사로 일하던 중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친구들과 여행하다가 인더스 강을 장장 1,000킬로미터에 걸쳐 작은 범선을 타고 여행했다.

그러면서, 오래 전부터의 삶의 화두였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탐구하던 중, 네팔 카트만두에서 라마 예셰와 라마 조파 린포체의 명상 강좌를 듣게 되고, 18개월만에 출가를 심한다.

1975년 네팔 카트만두 코판사원에서 사미계를 받고, 1977년 인도 다람살라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티베트 스님이 된 뒤로 네팔에서 무료 의료원을 운영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미국, 대만, 홍콩,일본, 몽골 등 세계 곳곳의 불교회관에서 상임법사로 불교와 명상을 가르쳐 왔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오스트레일리아 캥거루 섬에 홀로 안거하며 3년 무문관 결사를 마쳤고, 2009년 3월부터 몽골 울란바토르 불교회관에서 상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글ㆍ사진=김성우 기자 | buddhapia5@hanmail.net
2009-10-27 오전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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