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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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업 풀며 새로운 업 심는 현재에 충실하라
[선지식을 찾아서] 운성 스님(대구 광덕사 주지)




열세 살의 소년은 자신의 소원대로 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심 강한 부모님 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소년은 학교보다 부처님 계시는 절이 더 좋았다. 어머니의 치마끈 붙잡고 절에 졸졸 따라다니던 예닐곱 살 때부터 절에 가면 집에 오기가 싫었다. 어린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금색을 하고 근엄하게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안부가 궁금했고, 코끝에 와 닿는 향내가 그리웠다. 열세 살이 되자,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야물어졌는지 혼자서도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출을 시도해 절로 가 버렸다.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소년의 가출은 며칠 만에 끝을 맺고 집으로 잡혀왔다. 두 번째로 가출을 시도해 절로 갔는데, 금방 잡혀오게 됐다. 부모님이 또 다시 가출을 할까봐 단속을 했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허술한 틈을 보아 세 번째로 가출을 단행했는데, 이번엔 가출이 아닌 출가가 됐다. 부모님도 ‘수행자’가 될 아들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천상 너는 스님이 될 팔자인가 보다” 하면서 더 이상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소년은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는데, 한 번도 속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산에 가서 나무 한 짐 해다 나르고, 불 때어 밥하고, 도량이며 방이며 청소하는 그런 행자생활이 고달프다는 생각은커녕 신바람 나게 해내었다. 어른스님들이 어린 행자에게 “넌 아무래도 세세생생 중이었나 보다”고 한 마디씩 던졌다. 이 말도 무척 듣기 좋았다. 통도사의 월하 큰스님을 은사로 계를 수지하고 운성(雲惺)이라는 불명을 받고 부처님의 제자가 됐던 그 날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창댐을 따라 연이어진 산에는 쑥대머리 같은 갈대의 하얀 꽃이 가을빛을 그려내고 있다. 한낮의 태양빛이 뜨겁다 해도 한결 눅어져 그늘에 들어서면 까슬까슬한 기운이 느껴진다. 수면에 내려앉은 산 그림자는 물색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산색과 물색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주고 걷다보면 광덕사라는 팻말과 마주치게 된다. 만일염불기도도량 광덕사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운성 스님은 어릴 때 출가했기 때문에 월하 스님으로부터 남모르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공부는 드러낼 것이 없다면서 은사 월하 스님 이야기로 이어갔다. 은사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스님이 가시고 나면 방장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여쭈었더니 “아무도 없어야” 그러시더란다. 그래도 열반하시기 전에 정해놓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건 산 사람들 몫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야”라고 일침을 놓더란다. 은사스님이 열반하시고 나니 참으로 혜안을 지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월하 스님은 아주 자애로운 분이지만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대쪽 같은 분이었어요. 종단이 분란에 휩싸였을 때 박 대통령이 종단의 분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종단의 영향력 있는 원로스님 다섯 분을 청와대로 초청했어요. 그때 종회의원이 21명이었는데 재가불자도 종회의원에 넣자는 의견을 박 대통령이 제시했을 때, 월하 스님이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 분질렀데요. ‘속인 한 사람이 스님 이십 명을 다 잡아먹어요’라는 월하 스님의 말씀에 박 대통령은 박장대소했고, 스님의 의견을 존중해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데요.”

월하 스님은 환속한 제자까지도 챙길 정도로 정이 깊은 분이었지만, 잘못을 했을 때는 가차 없이 야단을 쳤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중들 앞에서 야단을 치곤했는데, 운성 스님은 이것 또한 큰사랑의 표현이라 여긴단다.

“은사 스님은 생전에 불교의 인과론은 숙명론이 아니라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과오와 고뇌를 근원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어요.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업을 푸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니 현재에 충실하라고 일렀어요.”
‘오늘 내가 받고 있는 이 과보는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됐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월하 스님의 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주었다.

스님은 선객이 돼 선방을 떠돌면서 공부를 하다 사고로 크게 다쳐 선방에 앉을 수가 없었다. 대중생활조차 힘들어서 작은 토굴을 마련해 홀로 수행정진했다. 은사스님은 토굴생활을 못마땅해 했고 몇 번이나 스님 곁에 와서 대중생활을 하라고 일렀다. 이즈음에는 어른스님을 좀 더 많이 모시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단다. 토굴생활은 스스로가 자신을 다잡아나가야 하기에 밤낮없이 염불수행에 매달렸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수행자로서 오롯하게 살아낼 것을 시시각각 요구했다. 고성염불로 목에서 피를 쏟을 정도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스렸다.


광덕사는 1993년 시월 초하루 날 ‘만일염불기도’ 입제식을 올렸다. 일만일(一萬日)을 세어 본다. 이십칠 년 하고도 반년을 더 꼽아야 하는 긴긴 시간들이다. 기도를 입제한 지 십육 년이 지났으니 앞으로도 장강처럼 긴 십일 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스님은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또 그 동안 우리가 윤회 전생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라고 한다. 스님의 셈본과 우리의 셈본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사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도량을 오고가기에 궁금해 여쭈었더니 절에서 키우는 아이들이라 했다. 수십 년 전부터 “내 힘에 버겁지 않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따뜻한 부모의 품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함부로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하나 둘 돌보기 시작했는데, 스님 손을 거쳐 간 아이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

“저는 아이들이 일반 가정에서 자라는 것처럼 똑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첫째는 아무리 바빠도 나 이외에는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고 정해놓았어요. 그리고 학교 공부 외에도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거나 공부가 더 필요한 아이들은 학원에 가서 배우라고 합니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 등 취미학원과 수학, 영어 등을 가르치는 입시학원에도 보내고 있다. 학교에서 앞서가는 아이가 되도록 원력을 세워서 키우고 있다. 스님은 말씀 끝에 “학교에 들어가는 돈은 돈도 아니데요. 저도 사교육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요”라면서 웃었다. 아이들이 원하면 대학교도 다 시켜주고 있다고 하니 스님의 원력 참으로 크다. 그래서 주위에서 스님과 인연 맺은 아이들은 ‘복이 많다’고 한단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님이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잘 키우고 있는 아이를 부모가 몰래 데려가서는 망쳐놓는 경우’라고 한다. 아이들을 거두는 것은 ‘하늘같은 불은(佛恩)에 대한 작은 회향’이라면서 이야기를 자꾸만 염불수행으로 돌렸다.

‘극락세계는 죽어서 가는 세계인지 아니면 죽기 전에 극락세계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스님은 “신심이 부족한 사람은 극락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의심하는데,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이며 <아미타경(阿彌陀經)>은 누가 물어서 설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임을 강조했다. <아미타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토를 지나가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에 계신 부처님 명호는 ‘아미타불’이시며 지금도 설법을 하고 계시느니라.”

“이렇게 선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극락을 의심하면 안 되지요. 정토불교는 수행과 더불어 무한한 빛과 무한한 수명의 아미타불이 한없이 밝고 영원히 지속되는 우리의 불성과 같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십만 억 국토를 지나서 있는 정토에 가려면 과학적으로 보면 현재의 인공위성으로 가도 1조억 년이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인공위성은 빛의 속도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데려가지 않고는 도저히 극락세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48대원 가운데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 있어요. 임종 시에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불러도 극락세계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아파서 ‘아’소리도 안 나오는데 어떻게 ‘나무아미타불’이 나오겠어요? 오랜 세월동안 염불 수행이 습성이 돼있는 사람이라면 기력이 떨어져 소리를 낼 수 없다하더라도 생각이 살아있다면 염불을 할 수 있어요. 꾸준히 수행한 사람이라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습니다.”


경전에 선연하게 기록된 아미타 세계를 의심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못내 서운하다는 듯 ‘전백장 후백장’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백장 스님이 법문을 할 때마다 노인 한 사람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뒷자리에서 법문을 듣고는 대중을 따라 물러가곤 하였다. 어느 날은 법문을 마쳤는데도 물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기에 백장 스님이 “어디에서 온 누구신지?”하고 물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200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청법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물어라.”
“어느 날 제자가 ‘수행이 뛰어난 자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과에 걸리지 않는다(無碍因果)’고 답했습니다. 그 인과로 여우 몸을 받게 됐습니다. 스님께서는 부디 한 말씀해 주셔서 여우 몸을 벗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수좌가 물은 것처럼 그대로 물어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백장 스님은 벼락 치는 듯 큰 소리로 “인과에 어둡지 않도다(不昧因果)”하고 답했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는 절을 올리면서 “저는 이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났습니다. 부탁하건대 뒷산의 여우굴을 찾아 승려처럼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백장 스님은 대중을 이끌고 산 뒤쪽의 동굴 속에서 죽은 여우를 한 마리 끄집어내어 승가의 법도에 따라 장례식을 치렀다.

“이것은 선가(禪家)에서는 ‘전백장 후백장’이라는 하나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무애(無碍)나 불매(不昧)나 뜻이 다르지 않는데도 전백장 스님이 자기의 소견대로 함부로 말한 인과로 이백 생 동안 여우 몸 받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스님들도 법문을 할 때 자기 소견으로 함부로 말한다면 그것도 삿된 일이라 했다. 인용을 하더라도 방편은 방편일 뿐 부처님의 진리를 왜곡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의 신념이다.

“극락세계가 어디 있나? 하면서 ‘극락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망언이라. 뼈 깎는 수행으로 극락이 내 마음 속에 있을 정도로 견성을 이루었을 때 극락이 내 마음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함부로 극락은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화두가 염념상속(念念相續)해야 하듯이 염불수행 또한 망념(妄念)이 섞이지 않도록 일심으로 염념상속해야 염불삼매에 이를 수 있는 것이기에 염불선도 결코 쉽지 않단다. 일체중생 모두 부처님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업이 두텁고. 번뇌에 휩싸여 있어 수행이 수순하게 잘 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선에는 염불선과 화두선이 있는데, 어느 것을 하더라도 견성하면 되는 것이지 더 수승하다고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단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자는 성불하는 것이 목적이잖아요. 아무리 팔만장경을 다 외워도 금생에 성취 못하면 다 외도(外道)라. 왜냐하면 죽어서 다음 생에 꼭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또 어디 태어날지 모르는데, 다음 생에 깨닫겠다고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아요. 그러니 다음 생으로 미루지 말고 사람 몸 받고 불법을 만난 금생에 정진해 해탈해야 합니다.

극락세계는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는데 극락국토에서는 하품하생에서 중생중생으로 올라가려면 2000억년을 닦아야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사바세계에서는 잘만 닦으면 일 년만 해도, 삼 년 만해도 중품중생으로 바로 올라 갈 수 있어요.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났는데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 해결하겠어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이 염불수행을 발원한 중생들을 받아들이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염불행자는 꼭 아미타부처님에게 ‘명을 마치면 나를 극락세계로 데려가 달라’고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우주에 무수한 부처들이 있는데 꼭 아미타불을 불러야 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근본 서원이 가장 강력하고 그 서원은 오탁악세에 가장 알맞기 때문”이며 또 “아마타불의 공덕과 지혜, 신통력과 수행력,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무한하기”때문이란다.

광덕사를 ‘만일염불수행도량’으로 만든 연유를 알 것 같다. 스님의 정토관은 확고하다. 스님은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님의 치열한 수행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평생을 염불수행으로 일관해 온 중국의 우익 스님은 결가부좌하고 서쪽을 향해 손을 든 채로 입적했다고 하는데, 운성 스님의 원력도 그러하다.

산문을 나서니 노을이 내려앉은 호수와 나무들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극락세계라도 갔다 온 듯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낯설다.




운성 스님 약력

1941년 경남 합천출생. 1956년 통도사에서 월하 큰스님을 은사로 득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60년 통도사 강원에서 사집 수료. 제방에서 6하안거 성만. 1988년 사회복지법인 화성양로원 이사장, 1992년 (사)대구 마하야나 불교문화원 부원장, 1998년 대구불교사원주지연합회 회장, 1998년 재단법인 선학원이사 역임. 지금은 소백산 장안사 회주이며, 대구 광덕사에 주석하고 있다.
글ㆍ사진=문윤정(수필가ㆍ본지논설위원) |
2009-10-19 오후 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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