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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불자를 위한 달라이 라마의 특별법회가 9월 15~17일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봉행됐다. 이번 법회에는 한국인을 비롯한 대만, 유럽 등에서 온 3500여 불자들이 동참, 예불을 시작으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하루 두 차례씩 3일간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경청했다.
달라이 라마와의 인연을 9년간 이어오고 있는 여수 석천사 주지 진옥 스님은 법회를 열며 “이곳에는 수행하는 분들이 많다. 나 스스로가 재발심의 계기가 되고 많은 수행하시는 분들과 존자님을 뵈면서 그분을 통해 내 수행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참석하신 신도님들이 바른 법에 들어서 모두가 번뇌를 버리고 실제 이익을 찾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간 한국인 불자들을 위해 <입보리행론> <보리도등론> 등을 설법해 온 달라이 라마는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대다수의 불자를 감안해 기초적인 불교 지식과 함께 대승의 진정한 보리심을 발현하는 용수 보살의 저서 <보리심석(菩提心釋)>을 설했다. 달라이 라마는 보리심을 내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 이유를 불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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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초전법륜(初轉法輪)의 해설서인 용수보살의 저서 <보리심석>은 본래 인간의 마음은 청정하며 밀교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인간 마음의 허물을 없애는 것을 관건으로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한 의식 상태를 현현시키는 것이 밀교의 수행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떤 법을 설하고 듣는데 있어서 근기(根機)는 매우 중요합니다. 설법자와 법을 듣는 이 모두 절실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의 불법을 유지하고 받들겠다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고 제자 역시 신심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멸성제(滅聖諦) 즉, 번뇌의 허물에서 벗어난 열반을 이루기 위해 불교 수행을 합니다. 비폭력으로 선취에 들 수 있지만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명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하며 일어나는 지혜에는 사해(思解)에 의해 일어나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 그 이전에는 문해(聞解)가 일어나야 합니다. 수습해서 일어나는 지혜를 수해(修解)라고 하는데, 우리가 공성(空性)을 사유함에 있어서 확신을 스스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많이 듣고 공부하는 문(聞)을 시작으로 사수(思修)의 과정은 반드시 인과의 관계로 성립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이 자리에서 법을 듣기 위해 모인 동기를 바로 세우십시오.
모든 고통의 근본은 번뇌이고 그로 인해 아집(我執)이 생깁니다. 나만 소중하다는 이기심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꿈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고 해롭다면 우리는 아견의 반대되는 생각인 무아(無我)와 아집의 반대된 생각인 보리심(菩提心)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이 용수 보살의 <보리심석>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무아의 지혜를 증장시키고 이타심을 키워 나간다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지속적인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행복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보리심석>은 무아의 지견을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의 경장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오온(五蘊: 생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 즉, 色受想行識)에 의지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인무아(人無我)입니다. 경량부에서 이야기하는 인무아는 몸과 마음을 좌지우지 하는 주체로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에서는 인무아를 향유하는 존재자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아’의 집착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식학파와 중관에 있어 인무아와 함께 거론되는 것이 법무아(法無我)입니다. 아의 집착을 없앨 때는 인무아이지만 반대로 향유하는 주체 대상이 아직 남아 있음으로 법아의 집착은 끊어집니다. 물론 인무아를 수행했을 때 법에 대한 집착도 줄어듭니다.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안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무자성(無自性)인 것입니다.
마음은 환(幻: 환상)의 본성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은 안근(眼根)과 대상 경계가 만날 때 일어납니다. 일반적인 생각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 실체인양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것이라고 규명하려 할 때 결코 실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모든 제법은 상호의존에 의해 존재하니 본래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희론이 적멸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대상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집니다.
어떤 이에게 분별이 일어난다면 공(空)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승의보리심(勝義菩提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공을 이름붙인 것뿐이지 공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리라는 말은 ‘희론의 적멸’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허물이 벗겨져 본래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는 의식 또한 적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菩提)란 성품이 없고 생함이 없으며 존재한 적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공성을 깨달은 승의의 보리심은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수에 머무시는 부처님은 언제나 공이 허공과 닮았음을 아십니다. 붓다라는 말 속에도 ‘청정하다’, ‘그치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집착의 근거가 모두 적멸한 상태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공성(空性)입니다. 이런 공성을 깨달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대치합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는 궁극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선(善), 불선(不善)이란 분별의 흐름을 깨 것이 공입니다. 마음에 의식의 대상이 없는 머무름은 허공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배제되어야 합니다. 공의 사자후에 모든 실유론자(實有論者)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실체가 있는 타력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 조건에 의해 결과물이 발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체종지를 이루고, 이를 위해 승의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자성은 제법의 법성입니다. 사탕의 달콤함과 불의 본성인 뜨거움과 같이 모든 법의 본성을 공으로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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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자를 위한 달라이라마 보살계법회 3일째. 9월 15일부터 이어온 법회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남걀사원에 함께한 3500여 내외국인 불자들이 합장하고 <반야심경>을 봉독 후 달라이 라마의 법문이 이어졌다. 어떻게 진정한 보리심의 싹을 띄우고 가꿔야 궁극의 열반에 도달하는가? 지혜의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는 티베트불교의 가르침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보리심의 보리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장춥’입니다. ‘장’은 허물을 모두 정화해 청정한 상태입니다. ‘춥’은 대상을 모두 알고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허물이 정화돼 깨끗해지는 근간은 ‘장’이 2가지 청정함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이고 우연한 객진(客塵)을 대치법으로 청정해진 객진청정(客塵淸淨)의 관건은 바로 공성입니다. 공성은 궁극의 실상을 의미합니다.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번뇌에 휩쓸려 끊임없는 고통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의 실상인 공성에 밝지 못하면 계속 윤회를 하는 것이고, 궁극의 실상을 밝히면 윤회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은 계속적인 고통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성청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객진을 대치로 다스려서 객진청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공에 대한 지견을 거듭 거듭 사유한다면 열반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법이 자성청정(自性淸淨)인데 이것이 국한된 대상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객진청정과 자성청정은 생명체에 국한된 의식을 지닌 존재에게 한정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속 식(識)이라는 것은 대상을 요량하고 인지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무지한데 무명의 반대인 실상(實相)을 확연히 요달할 때 본래부터 우리가 자성광명을 지니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용수 보살의 저서 <법성계찬탄>에는 “윤회의 인(因)을 소멸한 것이 열반이다. 법신 또한 그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해 업을 쌓고 윤회를 하게 됨을 말합니다. 윤회하게 하는 번뇌의 뿌리인 무명에 물든 의식 상태입니다. 그렇게 윤회의 바탕이 되는 의식 상태에서 허물이 대치법으로 정화되면 열반입니다. 실제를 바탕으로 하는 방편으로 보리심이 뒷받침 됐을 때 번뇌의 습기도 없앨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용수 보살은 “불로 옷을 태워도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네. 마음의 객진을 대치법으로 청정히 해도 근본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합니다. 마음의 허물들을 대치법으로 썼을 때 대상을 요량하고 광명의 자성을 가진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닌 또다른 특성은 물질적으로 바깥의 육체를 단련했을 때의 특징과 달리, 마음에 습(習)을 들였을 때 습이 견고해지고 무궁무진하게 증장될 수 있는 것이 내면의 마음이 지닌 공적(空寂)함입니다. 이렇게 해서 궁극의 일체 종지까지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부족하지만 많은 허물이 있는 의식 상태가 향상 되어 궁극의 성불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춥’은 객진이 없어 일체의 대상을 알아차리고 요량하는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대상을 요별하고 인지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마음 상태는 대상을 인식하지만 현재 마음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모든 대상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은 소지(所知) 즉 일체 대상을 알 수 있는데, 실제 그렇지 못한 것은 소지장(所知障)의 일체 모든 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무명을 없앤다면 우리에게 무시이래로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공덕들은 기존에 있는 것이기에 조건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닝마의 <마하무드라>에서는 ‘본래 갖추었으니 모두 부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장춥’이라는 보리심은 존재 가능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위함입니다. 일체 종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실질적으로 소지장을 없애는 대치법이 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뒷받침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공성이 소지장을 없애게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이전의 동기와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더 나아가서 중생 전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인지 목적에 따라 행동은 같더라도 결과는 다릅니다. 처음 자신의 동기가 옳다면 그에 맞는 선업을 받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개인의 해탈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한 편에 치우친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성불하기 위한 행동으로 선업을 행한다면 그 과(果)는 무량합니다. 즉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일시적인 행복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겠다는 생각으로 선을 행한다면 아주 다양한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굉장히 큰 이익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공성의 지혜가 소지장을 끊어 일체 종지를 끊는 대치법이 될 때 진정한 성불로 가는 궁극의 원인이 됩니다. 출리심(出離心)을 내어 단순히 해탈을 원한다면 번뇌장(煩惱障)을 베는 것은 가능하지만 보리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지장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공성의 지혜검은 소지장을 없앨 수 있습니다.
승의보리심과 진제보리심(眞諦菩提心)은 반드시 병행 돼야 합니다. 공성의 지혜를 수행할수록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견고해집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일체 중생의 구제를 원하는 보리심에 공성의 지혜는 힘이 되어 증장시킴으로써 공성의 지혜와 보리심의 방편은 쌍수(雙修)가 되어 병행돼야 합니다.
백조가 하늘을 날려면 두 날개를 펼쳐야 하듯 보살이 부처가 되려면 보리심과 스승의 힘과 공성을 깨우친 지혜의 날개를 펼쳐 선한 공덕의 발원으로 공덕을 성취합니다. 월칭 보살은 두 가지의 장애인 번뇌장과 소지장을 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샨티데바는 <입행론>에서 “보리심의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자들이 보리심이 있다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를 아는 자 어찌 나태함에 빠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용수 보살의 <보리심석>에서 중관은 제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합니다.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해서 생겨난 것으로 의지해서 가설한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들이 항시 존재합니다. 12연기 가운데 안팎을 나누어서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내면의 연기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무명에서 비롯한 노사(老死)까지의 연기는 조건에 의한 것으로 모두가 꿈과 같습니다. 원인과 성품 그리고 결과물은 모두가 무자성입니다.
외부의 연기를 보면 오온은 조건으로 생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 사상에 있어서 인과연기는 불교의 4대 설일체(說一切), 경량(經量), 유식, 중관 철학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원(原)이라는 것 역시 결과에 의지함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은 결과를 의지해야지만 안립됩니다. 긴 것는 짧은 것에 의지하듯, 원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결과에 의지된 이름입니다. 이러한 상호 의존의 안립을 중관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4대 견해들이 원인과 조건에 의한 연기입니다.
공성을 수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봅시다. 습기와 멀어지는 행복이 적정(寂靜)입니다. 용수 보살의 저서 <중론> 18장과 26장을 참고하십시오. 이러한 공을 수행자가 수행하면 해탈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법보(法寶)는 도성제(道聖諦)와 멸성제(滅聖諦)입니다. 법보가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알게 되면 이를 구현한 성현의 귀함을 알게 되어 불보(佛寶)의 귀중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법어의 전통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그 해설서를 쓰신 스승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3학입니다. 외도 뿐만 아니라 기타 종교에도 3학이 있지만 불교에서 더 수승한 것은 무아와 공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아의 지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타(利他)에 착하는 마음으로 중생의 이익을 구하십시오. 중생을 향한 대자비심을 내십시오.
중생들을 이롭게 할 때 얻는 선한 과보와 반대되는 부정적 과보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운 중생들에게 자신의 신구의(身口意)를 모두 받쳐 자신의 몸처럼 중생을 보살펴야 합니다. 이타심을 증장해야 합니다. 자비의 단단한 뿌리를 가진 보리심을 수행해 타인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서라도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샨티데바의 <입행론>에는 속제보리심(俗諦菩提心)이 자세히 규명돼 있습니다. 이러한 논서 뿐만 아니라 부처님 경에 보리심의 가르침이 가장 광범위 하게 나온 것이 <화엄경>입니다. 티베트에서는 <화엄경>이 6부 입니다만, 중국에는 80부가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분발해야할 부분입니다.
대보리심의 마음을 일깨워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을 자유로 안내해야 합니다. ‘제법이 무아’이니 보리심의 마음을 가지고서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해야 합니다. 유정(有情)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지닌 이는 진흙탕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수련의 향기가 납니다. 자비의 행장을 꾸리십시오. 세상에는 다양한 방편이 존재합니다. 중생의 근기에 맞춰 처음에 중생들의 관심을 끌어 성숙시키고 궁극의 길로 향하게 합니다. 윤회에도 열반에서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고귀한 마음은 보물입니다. 보물은 광명을 수행해 무간도에서 끊어야 할 바를 끊은 해탈도의 상태로 고귀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보리심에 두어 희유한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매진하여 보현 보살의 행원을 따라 무지개 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광명의 공성을 깨달은 상태를 이룰 때 지혜의 법신을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예찬하신 보리심을 찬탄합니다. 윤회의 바다와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이 양족존(兩足尊)께서 의지하신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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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제14대 계승자로, 본명은 텐진 갸초다. 1935년 7월 6일 티베트의 동북부지역인 타크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의 환생자로 인정받아 ''왕위계승'' 교육을 받다, 1940년 정식으로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정치적인 전권을 인수했다. 1959년 발생한 티베트 국민의 민중봉기에 대해 중국이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인도로 정치적 망명길에 올랐다. 1960년 달라이 라마는 고국 티베트와 가장 가까운 히말라야 산맥 아래 다람살라에 13만 명의 티베트 난민과 30여 개 국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들을 위한 망명정부를 건설했다.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핵실험 금지와 세계 평화 및 인권을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막사이사이상과 스웨덴의 월렌베르히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으로부터 조국을 빼앗긴 대신, 전 인류의 가슴에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를 전하는 인류의 스승으로서 불교 중흥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