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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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공부는 거문고 줄 타듯 조화롭게 해야
[선지식을 찾아서] 의정 스님(상원사 용문선원장)



깊은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 보낼 정도로 시원했으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입해 버린다. 용문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상원사로 가면서 짙푸른 풍광에 눈이 멀고 물소리에 귀가 멀어버렸다. 마음은 잠시 세속으로부터 떠나 온 시간을 잊어버렸다.

신라 때 세워진 상원사는 고려시대 말에는 태고 보우 선사가 수행했던 도량이었으며,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 선사가 말년에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이 원찰로 삼고 수도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애석하게도 상원사는 두 번의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한 번은 일본군에 의해 한 번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됐다. 우여곡절 끝에 호산 스님과 사제들이 상원사를 중창했고, 의정 스님은 용문선원을 열었다. 폐허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찰이기에 대웅전과 3층 석탑을 비롯한 당우들이 귀하게만 여겨진다. 보랏빛 비비추꽃과 검자줏빛 여로 꽃, 분홍빛 봉숭아꽃이 청정한 도량을 더욱 환하게 맑히고 있다.

선원 입구에서 방문객의 발목을 잡는 벽보와 마주쳤다.
‘회색 걸망, 바루 한 벌에 무명초를 끊고 백운에 뜻을 심으며 용문산에 마음을 가두니 태고보우의 선풍과 선지가 남아 죽비 삼성에 생사해탈해 일언에 만법이 열리고 돈각(頓覺)에 삼라만상이 들어오더라….’

납작납작한 예서체로 정성 드려 쓴 벽보의 요지는 ‘이 도량에는 눈 푸른 납자들이 수행정진 하는 공간이니 출입을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글귀를 통해 선원장의 결연(決然)한 의지와 원력을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삭발일이라 선원장인 월암의정(月庵義正)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2005년 조계종단에서 수행 지침서인 <간화선>을 펴냈는데, 이때 전국선원수좌회를 대표하는 다섯 분의 선원장 스님들이 편찬위원이 됐다. 이 중 한 분이 의정 스님이시다. 스님은 선가에서 존경받는 분으로 선방 좌복 위에서 서른 하안거를 성만했다.
스님께서 요즈음 추진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전국선원수좌회 스님들이 주축이 돼 ‘선원청규 위원회’를 5년 전에 발족했는데 의정 스님이 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중국의 백장 선사가 처음으로 총림(叢林)을 만들고 총림에 맞는 ‘선원청규’를 만들었다. 중국에는 11종의 청규가 일본에는 9종의 청규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1700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만든 ‘선원청규’가 없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간화선의 전통을 오롯이 잇고 있는 나라이기에 우리 실정에 맞는 선원청규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경허 스님 이후로 자유분방한 수행을 많이 했는데, 법도가 없으면 오히려 수행하기가 힘듭니다. 선원에는 천명의 대중이 산다면 천명의 대중 각자마다 맡은 소임이 다 있어요. 대중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양ㆍ교육ㆍ복지ㆍ의식ㆍ다비식 등 모든 것이 필요하잖아요. 이때 청규에 의해 움직인다면 아주 조화롭겠지요. 선원청규는 수행의 모든 것을 담는 지침서이기에 한국 불교가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화합의 매개체가 되는 지침서가 없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 실정에 맞는 선원청규가 나오면 많이 달라질 것이라 했다.

“수행을 하게 되면 의식이 바뀌기 때문에 인식 자체가 변합니다. 수행을 하면 높고 낮다, 고통과 즐거움, 피안과 차안 등 이렇게 끊임없이 둘로 나누는 이분법(二分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손바닥의 앞뒤처럼 부처 쪽에서 보면 반야, 지혜, 열반이고 중생 쪽에서 보면 고통, 망상, 번뇌입니다. 중생과 부처, 어느 쪽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달라지지요. 수행을 해 초월을 해버리면 괴로움과 번뇌가 반야로 바뀝니다. 육조 스님은 ‘자성을 본 사람은 부처’라고 했으며, 한쪽을 보는 사람은 중생이고, 양변을 다 보는 사람은 부처라고 했어요.”

인생을 고(苦)로 인식하는 것은 무명에 의한 어리석음 때문이란다. ‘수행을 하면 한쪽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게 돼 괴로움은 물론이고 즐거움까지도 이미 초월하게 된다’면서 수행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으라고 했다.

스님은 어떤 연유로 대학시절에 출가를 결행했는지 궁금했다.
“일찌감치 철이 들었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눈을 떠 가지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깊은 고민을 많이 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어요. 여러 종교와 철학을 공부했는데, 불교 책을 보고 나서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이 보였지요. 선(禪)수행을 보고는 이렇게 뛰어난 종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리고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구도의 삶이 나에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스님은 선수행처럼 스스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하고 양명한 그런 수행 방법이 타종교에는 없기 때문에 불교와의 인연을 가장 수승한 복이라 여긴다’고 했다. 수십 권의 불교 서적을 읽고 크게 발심해 의정부 포교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은사 운경 스님을 만났고 출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받았다.
“은사스님은 자비보살의 화현이었어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봉선사를 평생에 걸쳐서 복원하셨으며 군포교를 최초로 하신 분입니다. 군인들 수계식과 군부대위문 또한 많이 하셨는데, 요즈음 와서 돌이켜 보면 시대를 앞서서 볼 줄 아는 예지력을 갖추었어요. 저와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은사스님을 정말로 존경합니다.”


스님은 강원을 마치고 송담 스님을 존경했던 터라 인천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젊었을 때는 한 번 들어가면 2~3년씩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었다. 선수행이 너무나 좋아서 출가를 했기에 가행정진, 용맹정진 등 어떤 수행도 거뜬히 다 해내었다. 의정 스님은 지금까지도 송담 스님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스님은 간화선 수행에 있어 무엇보다 스승이 중요하다고 했다.

“간화선을 스승 없이 혼자서 공부한다면 열두 명이 하면 열 명은 망가집니다. 마음 길은 수억만 가지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 또한 수억만 가진데 혼자 가면 거의가 바로 가지 못합니다. 자신이 한 번도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스승님은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을 두고 ‘부산 삼랑진에서 서울 가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삼랑진에서 출발한 기차로 서울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대구쯤 가면 책에서 본 서울처럼 느껴지겠지요. 책에서 본대로 빌딩도 많고 사람도 많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도 많고 해서 서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서울로 생각하기 십상이지요. 대구를 서울로 생각하고 내린 사람 또는 대전을 서울로 착각하고 내린 사람은 그것으로 공부는 끝입니다. 잘못 착각해 내리려고 할 때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겠지요. 역사 속의 보우 스님이나 경허 스님 등 몇 분은 선지식 없이도 깨달았지만, 스승 없이 깨닫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다른 유사 공부가 많기 때문에 또 너무 영리해서 스승 없이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유사 깨달음이 오는데 이때는 반드시 깨달음을 경험한 선지식에게 가서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스승은 제자가 화두를 들면서 어디엔가 매달리고 의지하면서 조금이라도 분별을 낸다면 그 분별의 근거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그것을 박탈해 버린다. 스승은 제자가 어떤 분별과 미세한 알음알이에도 속지 않도록 화두를 들고 은산철벽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단다. 한 번에 대견성(大見性)하기는 힘들다면서 보우 선사의 예를 들었다.

“태고보우 선사는 이곳 상원사 선원에서 초견성(初見性)을 하고 감로사에 가서 이차 견성을 하시는 등 네 번에 걸쳐 견성을 하고서 대오(大悟)를 했어요. 스승이 없는 사람은 초견성을 하고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람은 외도로 빠지기 십상이지. 그것은 자신을 망치는 길입니다.”

의정 스님은 당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처음 경계에 부딪혔을 때 너무 큰 환희심이 났어요. 스승을 찾아가 탁마를 해야 하는데 내 경지가 너무 수승하다고 여겨 그때는 스승의 말을 부정했어요. 그러다 상기병에 걸려 아주 고생했어요.”

상기병에 걸리면 기(氣)가 위로 올라와서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증상이 나타나는데, 의정 스님은 수행자는 모든 것을 인내하야 한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수행에 전념했다. 나중에는 명치가 막혀서 밥을 먹지 못해 몸이 장작개비처럼 마르기 시작했지만, 부처님의 육년 고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계속 정진했다. 결국은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스님은 자신이 상기병인 줄도 모르고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린 것이었다. 급기야는 생명줄을 놓아야할 만큼 위급해서야 송담 스님을 찾아갔더니 상기라고 하더란다. 상기병은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다. 일본의 백은 선사가 연소호흡법으로 상기병을 치료했음을 알고 스님도 연소호흡법으로 병을 다스렸다. 그 세월이 십년이라고 하니 스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싶다.

“화두 공부는 거문고 줄 타듯이 조화롭게 해야 합니다. 분심이 확 일어나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공부하게 되는데, 그러다 기가 위로 올라오는 등 병이 나지요.”

몇 생에 걸쳐서 경험할 것을 한 생에서 경험한 탓인지 공부에 대한 스님의 생각과 열정은 남다르다.


“간화선의 생명은 화두 의심인데, 화두 공부는 발심한 만큼 화두 의심이 생깁니다. 발심을 한 사람에게는 화두 의심이 쉽지만, 발심이 안 된 사람에게는 어려워요. 발심이 부족하더라도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의심이 일어나서 공부에 진척이 있습니다.”

계곡의 물소리는 스님의 거처까지 차고 들어왔다. 물소리와 더불어 솔바람이 불어오고 향기로운 차를 앞에 두고 있으니 이 순간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요즈음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청년실업에 관해 여쭈었다.

“삶을 살다보면 우리 생은 흥망성쇠가 계속되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보아도 때로는 흥하다가 때로는 쇠하는 흥망성쇠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현상계에 집착하면 더 괴롭지요. 경제대란이 일어나서 받는 고통은 크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뜻이 크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옛 사람들은 흉년 들면 죽 먹고 풍년 들면 밥 먹고 그렇게 살아도 마음 편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인간의 최고 가치를 물질, 명예, 쾌락 등 낮은 것에 두기 때문에 고통이 더욱 큽니다. 첫째는 뜻이 원대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존자가 ‘보리심을 낸 사람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구절이 있어요. 부처님은 우리 마음을 사심(四心)에 두라고 하셨어요.”

사심이란 대심(大心), 광대심(廣大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이다. 대심은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이요, 광대심은 일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이끌어주겠다는 것이며, 상심은 그러한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전도심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디다 뜻을 두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측도도 달라지고 삶의 질도 달라져요.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런 사람은 평생을 가도 마음의 평정을 한 번이라도 느끼지 못할 거요. 사홍서원을 한 번 보세요. 중생을 다 제도 하겠다, 불도를 다 이루겠다, 그 뜻이 얼마나 큽니까? 자기 안위를 위해서 수행하거나 화두 참선한다면 공부가 안 되요. 불법(佛法)은 장마 때 소나기 오는 것과 같은데 작은 뜻을 가지고 공부한다면 소나기 올 때 자그마한 간장종지를 가지고 비를 받는 것과 같아요. 뜻이 적은 사람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늘 괴로워하고 방황하지만, 뜻이 큰 사람은 바람 불어도 태풍 불어도 끄떡 없어요. 자기의 뜻이 큰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닦아갑니다.”

의정 스님은 ‘개인의 완성이 곧 세계의 완성’이라면서 스님들이 자기 개인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참보살이란 ‘끊임없이 수행에 전념하고 세상에 머물면서도 세상일에 탐착하지 않고 또 성인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열반에 들지 않고 늘 중생을 생각하는 것’이라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산중에서 대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모르는 말입니다. 선을 한다는 것은 하화중생을 전제로 한 상구보리입니다. 내가 빨리 공부해서 이것을 사회와 중생들에게 회향하겠다는 마음으로 수행에 전념합니다. 장님이 장님을 안내한다면 올바른 길잡이가 될 수 없듯이, 중생 사회에 더 큰 것을 선물하고 싶기 때문에 그때를 기다리면서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성은 작용하는 그곳에 있으며 두루 나타나면 항하사(恒河沙) 세계에 고루 퍼지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저마다 지닌 불성을 크고 좋은 그릇에 담아서 잘 쓰고 있는지를 한번쯤 뒤돌아 볼 일이다.


의정 스님 약력


1973년 봉선사에서 운경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수지. 1974년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76년 해인사 강원 졸업. 인천 용화사 선원에서 송담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거. 이후 극락암, 송광사, 불국사, 운문암, 봉암사, 수도암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 안거 성만. 2000년 양평 상원사 용문선원을 사제스님들과 복원하고 개원하면서 선원장 취임.
2005년 조계종단 수행지침서 <간화선>편찬위원 역임. 2007년 조계종 전국선원 ‘선원청규’편찬위원장.

글ㆍ사진=문윤정(수필가ㆍ본지 논설위원) |
2009-08-05 오후 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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