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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수유시장에 한 노파가 있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평생을 보낸 억센 노파였다. 욕도 잘 하고 사람들과 말싸움을 하기고 하며 억척같이 살아 온 노파는 어느 날부터 한 평생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 나도 살만치 살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좋은 일보다는 남에게 해될 일을 더 많이 한 것 같구먼.”
“시장에서 장사하며 한 평생 살았는데 좋게만 살 수 있는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그래서 말이여. 나는 죽어서 지옥 갈 것이여. 근데 지옥에 가면 계속 지옥에만 있게 되나? 아님 부처님이라도 있어서 누가 구해 주는 법도 있는감?”
“낸들 알어? 그게 궁금하면 저 위 서원사 큰스님에게 여쭤봐야지. 그 절 큰 스님은 이녁의 궁금증을 풀어 주시지 않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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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벌떡 일어서서 가게 정리도 하지 않고 한 걸음에 서원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효란(曉鸞, 90) 스님을 뵙고 다짜고짜 여쭈었다.
“스님, 지옥에도 부처님이 계신가요?”
“예?”
“아, 지옥에도 부처님이 계시냐고요. 나 같은 사람은 죽으면 암만해도 지옥 갈 텐데, 거기도 부처님이 계신지 어쩐지 궁금해서 그래요.”
“계시고말고요. 지옥이든 어디든 중생이 있는 곳엔 부처님도 항상 계십니다. 근데 왜 지옥 갈 생각을 먼저 하시오?”
“아따, 시장통에서 평생 억세게 살아 온 나 같은 사람이 극락갈 수 있다면 지옥이 텅 비었게요?”
효란 스님은 조용히 말했다.
“아직 살날이 많으니 다른 생각 마시고 염불을 하세요.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하시면 지옥을 면할 수 있어요. 극락정토에 가실 수 있으니 믿음을 굳게 하시고 열심히 염불하세요.”
노파는 한 마음으로 염불만 열심히 하면 지옥을 면한다는 효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춤을 추듯 좋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노파는 입만 열면 ‘나무아미타불’이었다. 노파는 오직 스님의 말씀을 믿고 염불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손님들과 입씨름 할 시간도 없이 염불만 했고 남을 대하는 것이나 가족들을 살피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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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염불삼매에 들다시피 한 생활을 하다가 노파는 병이 들었다. 효란 스님이 병문안을 갔더니 노파는 평온한 얼굴로 “스님, 저는 지옥 안가요. 죽는 순간에도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죽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노파는 잠을 자는 듯 그지없이 편안한 얼굴로 이승 인연을 마감했다.
이 일화를 두고 효란 스님은 “그 보살이 유식한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일심염불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별이 많고 의심이 많으면 그렇게 염불에 매진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옛날부터 아는 게 많으면 신심은 적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이유 없이 그대로 믿는 그 마음이 염불의 근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종교도 신앙할 수 없어요. 그 철저한 믿음을 바탕으로 쉼 없이 정진하는 것이 도를 이루는 유일한 길입니다.”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장마전선이 남하 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효란 스님을 뵈러 갔다. 노파가 찾아 간 서원사가 아니라 경기도 연천군 고문리 오봉산 계곡에 위치한 오봉사로 가야 했다. 수유리 서원사에서는 효란 스님의 제자인 서진 스님이 국내외에서 찾아 온 제자들을 가르치며 불자들에게 염불 신행을 지도하고 있다. 서진 스님은 효란 스님의 뒤를 이어 정토학을 연구하며 신행을 지도한다. 지난해에는 <불이정토론>을 펴냈다. 원효대사의 <양권무량수경종요>와 <아미타경소>를 번역한 뒤 엮은 책이다. 서원사는 생활불교잡지 <참불교>를 통해 신행을 안내하기도 한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조선말엽까지 향화가 꺼지지 않았던 오봉사는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피폐 일로를 걷다가 효란 스님이 1993년 중창을 발원하고 법당을 지으면서 염불도량으로 가꾸어져 왔다.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오봉사 마당에 들어서자 끊임없이 염불소리가 들린다. ‘무량수전’이란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현판을 달고 있는 법당에서 젊은 스님이 쉰 목소리로 염불삼매에 들어 있다. 저렇게 목이 쉬고 또 쉬기를 반복하는 동안 젊은 스님의 정신과 육신에는 공덕의 향이 그윽하게 베일 것이다. 황금색 글자를 담은 현판은 서쪽에서 비껴드는 햇빛에 눈이 부시고 목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는 귀를 가득 채웠다.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한 걸음에 효란 스님을 찾아간 노파의 간절함 만큼은 안 되겠지만, 절을 한 번 하고 마주 앉자마자 ‘한 마디’를 여쭈어 바쳤다.
“근본소원을 믿어야지요.”
지체 없이 떨어지는 스님의 대답. 귀에 보청기를 하셨지만, ‘한 마디’는 즉시 ‘한 마디’로 답하셨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를 위해 친절을 베푸셨다.
“근본소원이란 <무량수경>에 나오는 48대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본래 원력 다시 말해, 법장보살의 48대 원력을 믿고 염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본원염불이라 합니다. 염불신앙은 오직 본원염불이어야 잡되지 않아요. 48대원을 뿌리 삼지 않고 다른 것들을 자꾸 접목시키니까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지금 염불신앙이 자꾸 번잡해 지는 겁니다.”
그냥 맨입으로 염불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말씀이다. 48대원을 믿고 알고 행(염불)하는 것이 진짜 염불수행이라는 것. 효란 스님은 일심으로 믿고 염불하면 공덕이 생기고 그 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해 극락왕생 한다는 순수한 마음 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말라고 당부한다.
“원효 스님도 <아미타경소>에서 왕생의 정인(正因)은 발보리심이요 염불은 조인(助因)이라 했습니다. 본원(48대원)을 믿는 것이 발보리심이고 염불로 공덕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48대원을 바르게 철저하게 믿고 염불을 하면 부처님의 공덕이 회향되어 그 힘으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효란 스님은 염불을 하되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48대원을 믿는 순수한 마음으로 염불에 일념을 바치라는 것이다.
일구미타무분별(一句彌陀無分別)
불로지탄도서방(不勞指彈到西方)
“(본원을 믿고)분별하는 마음 없이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만 염불해도 손가락 튕기는 수고 없이도 서방정토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육조 혜능대사의 말입니다. 염불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 순수하고 행(염불)함이 한결 같으면 되는 것입니다. 본원염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외길신앙입니다.”
외길신앙, 효란 스님은 일본의 정토진종 사찰에서 이 같은 내용의 강의를 여러 번 했다. 물론 일본 스님과 불자들이 이 주장에 공감하며 더욱 신심을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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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드렸던가?”
효란 스님이 내놓은 책은 <일광삼존불의 유래와 신앙>인데 표지가 노란 것이 한글로 된 책이고 사이즈가 크고 은색표지를 한 것은 일본어판이다.
일광삼존불(日光三尊佛)의 유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67세 때 비사리국 암라수원(菴羅樹園)의 대림정사(大林精舍)에서 설하신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일광삼존불상은 아미타불과 좌우보처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함께 조성한다.
일본의 장야현 선광사(善光寺)에 모셔진 일광삼존불상은 백제 성왕이 서기 552년에 일본의 흠명천황(欽明天皇)에게 보낸 것이다. 백제에서 봉송될 당시에는 ‘석가불금동상’이라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선광사여래’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왕은 삼존불을 보내면서 “서방(중국)의 성인들은 깨우치지 못했지만, 오직 깨달은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다”라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고 한다.
효란 스님은 10년 전 일본에서 발간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일광삼존불의 유래와 신앙>을 한글판과 일본어판으로 펴냈다. 그리고 백제 성왕이 모시다가 일본으로 봉송했던 이 삼존불상의 분신불을 조성해 1983년 서울 서원사에 모셨다. 분신불의 조성에는 일본 진종다까다파의 고승들이 정재(淨財)를 내놓았다.
“인도에서 백제로 비래(飛來)하신 삼존불이 다시 인도 땅으로 가실 인연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한 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9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인도 스님들이 입회한 가운데 국내에서 일광삼존불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네팔의 카트만두에 세워진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에 모시게 됐습니다.”
효란 스님이 이 불사를 주도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원이 성취되어 모든 업보중생이 성불하길 바라는 원력 때문이었다.
“강의 하다가 죽어도 좋다.”
효란 스님은 언제 어디서든 강의 요청이 오면 달려가신다. 법회에서 법문하는 것 보다는 강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 법문은 일회성이기 쉽지만 강의는 텍스트(주로 정토삼부경)를 정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세속 나이가 90인데도 매주 수요일 연천에서 분당 아미타사(前 약사암)까지 강의를 하러 가신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강의는 <무량수경>을 마무리하고 곧 <관무량수경>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효란 스님은 직접 펴내신 <정토삼부경 강설>을 강의 교재로사용 하신다. 두 말할 것 없이 정토신앙의 근본요체가 삼부경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정토삼부경 강설>을 선물로 주시곤 한다.
효란 스님은 경전을 귀하게 여기고 경전을 해석한 책 나눠 주기를 즐기신다. <정토삼부경 강설>의 서문에 그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경전은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인도에서 중국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경전을 소중하게 의지해 온 수많은 학승들의 노고가 있었다. 때로는 설산에서 동사(凍死) 직전에 이르기도 하고 빙하에 빠져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는 등 말할 수 없는 노고와 참기 힘든 고독과 불굴의 전신이 이 많은 경전들을 인도 중국 한반도 일본으로 전하였으며 열성적 역경사들에 의하여 혼신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여 번역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봉사 뒤편 숲에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1호인 오봉사지 부도가 있다. 효란 스님은 이 부도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신다. 초목을 베어내고 주변을 정갈하게 보존하고 있다. 오봉사의 역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또 효란 스님은 인근 심원사 부도밭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다. 군사지역에서 방치된 부도밭을 인근부대 불자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정돈하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기도 했다. 한 때 심원사 부도밭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적도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존치하게 됐다고 한다.
역사적 연원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효란 스님은 정토신앙이 보다 넓게 확산될 때 인류와 만생이 이고득락하길 염원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오봉사를 나와 임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37번 국도에 멈춰 섰다. 북한 지역의 산들을 배경으로 서쪽 하늘에 걸린 붉은 해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 황홀한 노을빛은 서방정토 극락세상의 한 풍경일 것만 같은데 우리민족은 분단되어 있다. 나무아미타불.
효란스님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3세에 수덕사 만공 스님에게 출가했으나 도일(渡日)하여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독립운동에 관여해 옥고를 치렀다. 동산 스님의 사제인 동원 스님을 은사로 재득도하여 정토교학 연구와 염불수행에 매진했다. 한 일 양국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국제진종학회 한국대표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서원사와 오봉사 회주. 저서로는 <염불신앙법요집> <정토삼부경역본> <진실한 불교는 본원에 있다>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 <정토삼부경 강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