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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깨친다고? 내 '욕심'을 봤다
이상언 기자의 성주 천상곡 도솔암 수행정진기





경북 성주군 천상곡에 위치한 도솔암에서 바라본 자연풍경

#만남


“아악~!”
비명소리가 고요한 암자의 정적을 깼다. 성인 엄지손가락 한 마디정도 크기의 말벌이 발바닥에 일침을 가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출발할 때부터 풀리는 일이 없더니 될 일도 안 될 날인가보다’ 라는 짜증과 함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나만을 위한 딱 하루의 시간이 절실한 요즘이었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만사에 의욕 상실은 물론이고 내 삶의 이유와 목적마저도 상실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숨을 쉬어도 늘 갑갑한 가슴을 뚫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경북 성주군 금수면에 위치한 천상곡 도솔암으로 ‘1박 2일 철야정진’ 취재 지방 출장 명이 떨어졌다. ‘딱 하루만’ 쉬었으면 했던 나의 바람이 산산이 무너지자 가슴이 죄어오기 시작했다. 더욱이 출발부터 도착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착한 이곳에서 날 처음으로 반긴 것이 말벌이었으니 허탈한 웃음과 고통을 부여잡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7월 18일, 저녁 10시가 되자 서울에서 온 5명의 보살님들을 비롯해 사찰에 기거하시는 보살님 등 15여 명이 법복을 맞춰 입고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매주 토요일 저녁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진행하고 있는 철야정진에 참가한 재가자들의 마음에는 이미 고요가 찾아들었다.

나? 벌에 쏘이고 보살님들의 극진한 응급처치를 받고도 통증이 쉬이 사라지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된장을 펴 바르고 앉아있다. 된장냄새는 슬금슬금 올라오고 욱신욱신 거리는 발의 통증은 발목까지 올라오고 있다. 그냥 된장냄새나 맡으며 나를 쏘고 열반에 든 벌을 추모(?)하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수행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나 천상곡에서 나의 생각들은 불필요한 소음일 뿐이었다. 도솔암 수행자들의 고요한 숨소리는 바람 따라 퍼지는 개구리울음소리, 풀잎소리, 새소리, 간간히 뿌려지는 빗소리와 함께 성성적적(惺惺寂寂)에 잠겨있었다.

수행은 50분 참선, 10분 포행을 반복했다. 자정이 되자 도솔암 주지 지해(智海) 스님의 우레와 같은 죽비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해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으로 법문을 시작하셨다.

“참나는 무엇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어두운 그림자는 참나를 가리고 있습니다. 늘 남탓을 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방해하는 어리석은 일들로 아까운 세월만 낭비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참된 노력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경책하게 됩니다.”
스님의 나지막한 음성을 타고 전해지는 법문이 경종으로 다가왔다. 무절제와 불규칙한 생활로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때론 소중한 이웃을 탓하기도 했던 나의 삶이 스쳐지나간다. 반성과 함께 광명이 들지 않는 마음에 갑갑함이 몰려왔다.

철야정진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오른쪽 두번째가 지해 스님.

“인간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잘 먹고 건강하기 위해, 병들지 않기 위해, 맵시 있는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자고자 하는 것 모두 탐욕입니다. 탐욕은 마음의 눈을 멀게 하고 만겁 세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본래 밝고 깨끗한 나와 이웃 모두를 못살게 합니다. 욕심을 내면 당장 내 마음이 어두워지는데 어떻게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해탈, 대자유, 마음의 광명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순간, 단 몇 시간 만에 깨침을 얻어야 한다는 욕심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깨달음에 대한 욕심도 아무것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듯, 바람 따라 흘러가는 자연의 소리처럼 조금씩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비움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채 헛된 소유에 집착하며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돌아본다.

“최소의 의식주만을 갖추되 남는 것은 이웃을 위해 유감없이 공양하고 보시하는 무소유의 삶을 사세요. 항상 예불, 공양, 발원하며 지혜를 갖추고 깨어있는 삶, 대자유의 삶을 사십시오. 참선하는 불자는 윤회의 근본을 끊고 참 자아를 찾아 참 자기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출가자와 진배없습니다.”

지해 스님은 수행자들을 아낌없이 격려하고 칭찬했다. 깊은 밤, 모든 것을 끊어 그 자리에 들어가기에는 힘들었다. 단지 아픈 발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깨비에 홀린 듯 살아오면서 놓치고 살았던 내 몸에서 어느 곳도 소중하지 않은 곳 없음을 알 뿐이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늘 놓치고만 살아왔음을 알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하루만에 깨쳐 해탈하리라는 기대와 욕심에 본래 마음자리도 계속 놓치고 있듯이 말이다.
철야는 비교적 수월했다. 고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삶 속에서 고요를 찾는 것이었다.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갑갑한 나의 일상에 묵묵한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에서 온 보살들에게 찻자리 법문을 들려주는 지해 스님(가운데)

#교감


이튿날. 산의 정기를 품은 콩죽공양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지해 스님은 멀리서 온 서울 보살들에게 다담(茶談)을 청하셨다.
‘스스로, 고요히, 자유롭게’ 라는 글이 눈에 띄는 스님의 방은 소박했다.

“자세를 바르게 하면 마음도 바르게 되고 편안해 집니다. 차를 마실 때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색향미(色香味)를 봅니다. 담담한 차색을 묵묵히 바라보고 코끝으로 은은한 차의 향을 맡아봅니다. 한 방울의 차를 혀끝에 올려 연잎에 구슬을 굴리듯 차 한 방울을 올리고 굴려 보십시오. 멀리 떠나있던 마음을 찾고 삶의 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행은 한 잔의 차에도 들어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도를 찾아가는 길과 같습니다. 차뿐만 아니라 밥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밥 한 알에도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몇 잔의 차가 오고갔다. 아직은 서툰 다도였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한 자연의 향과 맛과 색이었다. 도솔암은 거짓도 억지도 꾸밈도 없는 자연 그대로다. 스님이 손수 꾸며놓은 아름다운 경내도 모두 스님을 닮았다. 무명의 잡초를 거두고 지혜를 밝히듯 꾸밈새가 지혜로 풍만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문득 도솔암과 나는 어울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습관적으로 바른 화장품과 향수의 향들이 얼마나 인공적인 향을 내고 있는지를 느끼게 했다. 여기서는 노트북을 켜는 것도 MP3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내일을 걱정하는 허황된 모습, 산사의 적막을 깨우는 거친 걸음소리 등 행동 하나하나의 경거망동함이 자연의 거울에 훤히 비춰졌다.

다도를 마치고 울력에 들어갔다. 지난 밤 무섭게 내린 빗물은 법당 뒤에 조성되고 있는 ‘참선동산’의 토사를 씻어 내렸다. 수행자들과 스님은 삽과 괭이를 들고 장화를 신고 수습에 나섰다. 스님의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닌 생활 그 자체였다. 밥을 먹고, 그릇을 씻고, 울력을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수행의 일환이었다. 모두가 수행이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도솔암에 49재 막재로 분주한 한때를 보내고 나자 암자에 또다시 산사의 고요함이 숨을 쉬고 있었다.

산사에 홀로 남았다. 함께 있었던 도반들도 다 떠나고 나 홀로 덩그러니. 깊고 깊은 산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바람으로 전해지는 자연의 소리뿐이었다. 모든 것을 툭 놓아버리고 쉬기로 한다.

대웅전 법당뒤에 조성되고 있는 참선동산에서 울력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

새벽예불을 마치고 해지는 서쪽하늘을 바라본다. 차의 향처럼 알듯 모를 듯 한 어둠이 몰려왔다. 멀리서 지해 스님이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처럼 손짓을 하신다. 스님과 짧고 고요한 대화가 오고 갔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교육관 설립을 서원하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무슨 서원을 세웠지? 난 서원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더 모아야 하고 더 가져야 한다는 탐욕에 물들어 있었다. 순간, ‘딱 하루만’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다리를 틀고 있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우스웠다. 수행은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를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적게 먹고, 적게 자며, 말을 적게 하고 안일한 생활을 삼가는 것이다. 어려운 일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달게 참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심하고 근검절약하고 회향하는 삶. 간단했다.

고요한 하루를 보내고 방에 들어왔다. 양말을 벗어보니 발이 퉁퉁 벌겋게 부어 올라있었다. 통증의 다음 단계는 간지러움. 벌에 쏘인 자리는 하루 동안의 통증이 사라지자 슬금슬금 간지러워진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삶 아니겠는가. 좋은 날 올 것 같지만 또 역경에 부딪히고 마는 것. 점차 현실의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출발


새벽예불을 마치고 급히 길을 재촉했다. 떠나야했다. ‘하루만 더’라고 욕심을 부려봤지만 그것도 집착이다. 스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농사도 짓고, 참선동산을 정리하고 계신다.행자님도 암자의 소일거리들을 쉼 없이 하고 계시고 보살님들은 참선을 하고 계신다. 삶 자체가 수행이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선사들을 만났다. 자연의 미소를 품고 있는 지해 스님, 모든 일에 게으름이 없었던 행자님, 도솔암에 와서 겨울산 같던 마음의 눈이 녹아 내려 따뜻한 봄을 맞이했다는 보리자님, 입던 법복도 선뜻 벗어주며 초행자의 수행길을 도와주시던 광명보살님, 어머니와 같은 손길로 응급처치를 해주시던 여원행님, 초심자의 마음으로 마음을 교류했던 보련화님, 울력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신 보리심님, 따뜻한 할머니 보살님들, 지나가는 이방인에게 ‘쉿다 가입소’라며 환영해주는 산골 주민들. 자연과 같이 넉넉한 마음으로 감사히 사는 그들이 선사였다.

지치고 힘든 삶을 살았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본다. 천상곡을 막 떠나려는 순간 말벌이 나에게 소리친다.
할!
이상언 기자 | un82@buddhapia.com
2009-07-24 오후 9:38:00
 
한마디
인과선원 아악!~ 그래서 뭐이 이거이 선지식이 태어나는, 천지를 깨어나게 하는 소리인 줄 알고 들어왔더니 말벌에게 경책을 받다? 이게 다 허튼 글재주 갖고 죄 없는 사람을 향해 언론 플레이 하고 모함 하고 마음 아프게 한 과보인 줄 아시오. 교계 기자들 돈봉투 손에 쥐어주면 양심도 팔아버린다고, 지켜 본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이상언이는 젊어서 그러진 않겠죠?
(2009-09-01 오전 11: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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