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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북한산 자락에는 ‘깨달음의 숲’이 있다. 바로 전등사 전등선림(傳燈禪林)이다. 전등사의 선원이름이 ‘선림(禪林)’인 이유는 나무가 홀로 성장할 수 없듯이, 수행자도 도반들과 함께 정진해야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근현대 호남의 대표 선사였던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이 지은 이름이다.
올 하안거에도 16명의 재가자가 방부를 들인 전등선림은 해안 스님이 “재가불자들도 스님과 함께 수행해야 한국불교에 희망이 있다”며 1967년 만든 ‘불교전등회’의 등불을 이어온 대표적인 재가 참선도량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가 실전 수행’이라며 도심에 전등사를 개원한 해안 스님은 “화두일념에 들면 누구나 7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수행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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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과 함께 ‘동(東) 경봉, 서(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던 해안 스님의 유지를 이은 선원장 동명 스님은 스승이 입적한 지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선(禪)의 가풍을 이어오고 있다. 전등선림의 안거 수행자들은 오전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하루 8~15시간 참선한다. 동명 스님은 대중과 함께 선방에서 좌선하거나 죽비 경책을 내리는 한편, 수시로 일대일 점검을 하며 수행자를 지도하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된 선원장실에 들어가 삼배를 하려니, 일 배만 하라고 한다.
“스님, 성북동 재개발 문제로 사찰이 이전해야 될지도 모른다면서요?”
“재개발 허가가 났지만, 주민들의 찬반이 팽팽해서 아직 확정되진 않았어요. 재개발 여부가 결정되면, 절 바로 옆에 홀로 된 어르신들이 마지막까지 정진하며 살 수 있는 쉼터를 만들까 해요.”
사진기자가 연신 플래쉬를 터뜨리자, 스님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겸연쩍게 말한다.
“인터뷰라는 게 꼭 연기하는 거 같네요.”
“스님, 세상살이가 연극 아닌 게 있나요.”
“그렇지. 하하하!”
전등선림의 수행현장을 여러번 방문한 터라 스님의 출가인연과 공부담에 대해 여쭈었다.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머님이 자식을 키우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완주 일출암에서 2년 동안 지내기로 하고 절에서 생활했다. 열네살 때부터 1년반 동안 출가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데, 신심행이라는 노보살님이 “전라북도의 큰스님 한 분이 전주에 오신다”며 만나뵙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도 도인스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던 일을 놓고 도망쳐 나왔다. 순진한 마음에 절에서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을 넘어 그렇게 도망나와 큰스님을 뵈러갔더니, 이미 날짜를 하루 넘겨 큰스님께선 “충남 보덕사로 찾아오라”는 전갈과 200환을 넣은 돈봉투를 남기고 떠나셨다.
다음 날, 보덕사를 올라가니 비구니스님들이 “전주에서 꼬마가 왔다”며,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깎아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당시 보덕사 선원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하던 해안 큰스님을 뵈었는데, 그리도 엄숙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앉은 동명 스님에게 큰스님께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꼴도 베고 나무도 하고 일도 했다”고 대답했더니 반가워하면서 옆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날 밤, 그렇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사랑 받았으며, 내 생애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모했던 스승님을 뵈었지요.”
동명 스님은 보덕사에서 무더운 여름 날, 큰스님의 지시에 따라 일념으로 하루에 일만배씩 열흘 동안 십만배를 했다. 그러고 나니, 큰스님께서 청소하는 것에서부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이때부터 동명 스님은 내소사 지장암(現 서래선원)으로 가서 해인사 강원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 서너 해 생활 그대로가 법문이었던 행자시절을 보냈다. 큰스님은 어린 상좌에게 목탁 치는 법이며 염불하는 것을 가르쳤고, 금강경을 외우다 모르는 것이 있어 여쭈면 자다가도 일어나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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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때 스승은 무엇이든 물으면 가르쳐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큰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했고, 그 때부터 스님을 모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스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지요. 스승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며, 그것이 사제지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해안 스님은 동명 스님에게 ‘불교가 무엇이다, 수행자란 이런 것이다’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공부를 가르칠 땐 무서울 정도로 엄숙하게, 사적으로 스님과 신도를 대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일상생활 속에서 법을 깨닫게 했다.
“지장암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 때, 스님은 종종 내소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 ‘산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고 물으시면서 ‘산을 보거들랑 산의 부동(不動)함을 배워라’하셨고, 흐르는 물 앞에선 ‘만물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는 모습’을 보도록 가르치셨어요. 일상생활의 모든 게 법임을 배웠던 것이지요.”
일 년에 한 번 두부를 먹어볼까 말까 할 만큼 가난했던 지장암 시절엔 오전에 참선과 경전 공부가 끝나면, 오후 내내 농사짓는 울력이 많았다. 먼 곳에서 도인스님을 찾아 공부하러 왔던 수좌스님들도 못견디고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하지만 동명 스님은 스님 곁에 있는 것으로 감사해 그런 마음을 한번도 먹지 않고 한시도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멀리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 기침소리만 듣고도 원하는 걸 감지하고 그대로 대령하곤 했다. 그러면 큰스님이 “내가 물을 먹고 싶었는데 네가 알고 떠왔구나”하고 기뻐하셨고, 가을이면 산에 올라가 다래며 머루, 으름 등을 따다 드리면 어디서 어떻게 따왔는지를 물으면서 맛있게 드시곤 했다.
해안 스님은 16세의 어린 동명 스님에게 행자생활과 함께 참선을 시켰다.
“어느 날 우물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데 다가오셔서, 주장자로 우물을 세 번 두드리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시길래,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 뒤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내리셨습니다.”
그후 동명 스님은 해안 스님과 늘 화두에 대해 문답을 주고 받았는데, 해안 스님은 법회 때 사람들 앞에서 “동명이 공부를 잘 했다”고 칭찬했다. 막상 제자 앞에선 칭찬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공부도 잘 하고 착하고 좋은 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어린 상좌를 기쁘게 했다.
“스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 공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선지식입니다. 선지가 투철한 대선사이셨고 시문(詩文)에 능하셨던 스님께선 내게 시를 읊어 주시며 받아 적게 하셨고, 스님들이나 신도분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기록하도록 하셨어요. 스님은 내게 글을 짓는 법에서부터 말하는 법까지 수행자가 지녀야 할 법도 등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내 평생의 살림살이로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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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스님의 공부에 대한 지도방법은 독특했다. 용맹정진을 할 때 한 사람씩 불러들여 문답을 하면서 잘못된 점은 지적하고 혼을 내어 분심과 의심을 일으키게 해서 잡생각할 틈을 두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제자가 다른 틈을 두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참선이고 간경이며 공부였다.
스승의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가르침을 동명 스님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받아들였지만, 세상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동진출가했던 스님은 수행과정에서 큰 사고(?)를 치고 만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스님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바지 속에서 불쑥불쑥 치솟는 욕망덩어리를 확인하고 심한 자괴감과 혐오감을 느꼈다. ‘성욕(性慾)이 없어진다면 더 열심히 수행할 수 있을텐데…’ 하는 고민 끝에 스님은 극단적인 선택을 결행했다. 아궁이 문으로 사용하는 두툼한 나무판 위에 성기를 올려놓고 시퍼런 삭두(머리 깎는 칼)로 힘껏 내리친 것이다. 순간 스님의 몸에서 붉은 피가 머리까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이를 발견한 열일곱 살 더 많은 사형 혜산이 깜짝 놀라 손수레에 스님을 싣고 병원으로 가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공부가 안될 때는 생식이나 단식, 묵언 정진 등 안 해본 게 없었죠. 몸뚱아리를 조복받아야 견성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했던 겁니다. 하지만 고행은 인내력만 기를 뿐, 오히려 깨달음과 멀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시절인연에 의해 발원할 때는 손을 끊거나 태워도 아프지 않지만, 그게 항상 수행의 바른 법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쾌락과 고행의 양 극단을 버린 중도의 길을 택해 깨달으셨듯이) 괴각(乖角: 소의 뿔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듯 유별나게 고집 부리는 것) 하지 않고 심성이 곧고 반듯한 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소한 일상속에서 인간미를 느끼게 한 자비로운 스승에 대한 동명 스님의 회고담은 40여년 전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생생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스승에 대한 사모의 정이 우러나는 표현들이어서,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사제지간의 애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삭막해지긴 했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금 여기’의 수행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예로부터 먹고 살기 힘들지 않은 시절이 없었지만, 수행자의 근기가 얕은 요즘 신도들이 바쁜 일상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초보자는 일할 때는 화두 놓고 일에만 몰두해야 해요. 일하거나 운전할 때는 그 대상과 하나가 되면 됩니다. 이것 저것 만이 배우기 보다 일행일구(一行一句)라도 제대로 알아서 소화를 잘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할 때는 일과 하나 되어 정성껏 일하고, 절에 와서 좌선할 때는 모든 망상을 쉬고 화두만 챙겨야 합니다. 화두공부는 한가하게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공부죠. 험한 세상살이가 까딱하면 바깥 대상만 쫓아다니는 독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상(我相)을 허무는 계기로 삼아 발심만 잘 하면 훌륭한 공부도량이 될 수 있습니다.”
“해안 선사께서는 일주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알지만, 견성(見性)은 단시일에 결정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7일안에 깨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은 수행자의 정신자세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수행자는 ‘크게 한번 죽는(大死一番)’ 용맹심으로 오직 화두 일념에 사로잡혀 옆에서 뇌성벽력이 쳐도 듣지 못해야 하고, 찬 바람이 뼈 속에 스며들어도 추운 것을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죽기로써 대든다면 7일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 생사의 일대사를 결정짓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겁니다.”
“산문 밖이나 안이나 경제난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지다보니, 수행자들도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행과 생활이 조화되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요?”
“수행이란 마음 씀씀이를 좋은 쪽으로 바꾸는 일이고 자기 업을 전환하는 행위라 볼 수 있죠. 긍정적인 생각, 올바른 행동이 삶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수행한다고 할 수 없어요. 공부가 잘 된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 맡은 일도 잘 하고, 인격도 훌륭하죠. 그 사람의 언행(言行)을 보면 탐진치가 어느 정도 조복이 됐는지, 공부 정도를 가늠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분이셨고 완전한 인격자였듯이, 우리들 역시 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반듯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분들이 마을에서도 신뢰를 잃거나 고통 받지 않고 잘 사는 법입니다.”
“<유마경>에 ‘직심이 도량(直心是道場)’이란 법문이 있듯이, ‘반듯하게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순수하고 곧은 마음, 일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렇지요. 부처님께서도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말할 게 없죠. 자신의 수행을 되돌아보고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불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계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함과 꾸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이 피려면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씨도 뿌리지 않고 꽃을 피우려고 해요. 부지런히 정진해서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꽃이 활짝 필 때가 있음을 믿고 한결같이 나아갔으면 합니다.”
동명 스님은 안거 횟수가 계급장 처럼 여겨지는 수행 풍토와 훌륭한 선지식의 지도점검이 없는 선방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말을 아꼈다. 일평생 선방에서 정진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을 불법의 대해로 인도하는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무심도인(無心道人)이 존경받는 것도 미덕이지만, 시대가 요구할 때는 시장통에서 대중과 울고 웃을 수 있는 보살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법문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마다 하지 않고 설법 후 법문비도 사양하는 동명 스님. 언제나 동자승 같은 천진한 미소로 재가불자들을 자상하게 맞는 스님을 보면, 해안 선사가 전등선림을 스님에게 맡긴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요즘, 진흙속에서 연꽃은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도심속에서 깨달음의 숲이 더욱 푸르고 무성해지기를 발원하며 선원의 불이문(不二門)을 나섰다.
동명 스님은
195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내소사에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75년 합천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백양사 등 제방선원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화두로 참구했다. 87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졸업한 스님은 부안 내소사 주지와 조계종 종회의원,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등사 주지 겸 선원장을 맡고 있는 스님은 해안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시민선방을 개설, 사부대중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