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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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활하는 그 자리가 공부하는 자리
[선지식을 찾아서] 청주 법인정사 선원장 설우 스님




법인정사에 들어서자 소박하면서도 정갈함이 느껴졌다.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이곳 법인정사에 내려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도량이 벌써 안심법문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설우 스님의 처소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무위진인’ 법인정사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덥석 안겨주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고 한 임제 선사의 일갈이 들리는 듯하다.


설우 스님은 조계종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불교TV에서 <선요>강의를 해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고봉 화상이 저술한 <선요禪要>는 화두참선의 지침서로서 쉬운 책은 아닐진대 설우 스님은 그것을 쉽고도 재미있게 풀이해 대중들에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스님은 화두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간화선을 풀어나갔다.
“화두는 논리와 분별심을 뛰어넘은 자기만의 체험의 경지에서 직관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스스로 화두의 세계를 자락(自樂)하는 것입니다. 즐기는 그 경지를 스스로 수용해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경지를 두고 화두의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화두공부는 세상에서 말하는 상대적으로 얻어지는 문답식의 공부가 아니며,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화두에서는 분별로 알음알이로 들어가는 것을 사구(死句)라고 하지요. 화두 드는 자가 알음알이를 통해서 화두를 조금 짐작하게 되고 엿보게 되는 것은 스스로가 허망한 중생 업식에 속는 것임을 알아야 해요. 활구(活句)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 즉 공안이든 아니든 모든 것을 차단해 알음알이 분별의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게끔 예리한 칼로 끊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떻게 하면 화두공부를 제대로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우리 마음의 번뇌와 고통은 허공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와 같아요. 번뇌와 집착 등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고통은 실체가 있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밖에서 오는 인연에 의한 것이며, 내 마음의 판단에 의해서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번뇌와 고통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고 관한다면 화두 공부를 잘 할 수 있어요. 옛 사람들은 ‘물속에 떠있는 달을 보면서 그것을 건지려는 것’처럼 공부하라고 했어요. 또 <선요>에는 ‘우물에 눈을 져다 메우는 것처럼 공부하라’고 합니다. 번뇌, 망상, 욕망의 그림자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임을 알면서 지우려고 공부하는 것을 두고 우물에 눈을 져다 부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눈 열 짐을 져다 우물에 부어도 아무 표시가 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공부도 우물에 눈 져다 붓는 것처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물에 흙을 한 짐 져다 붓고 두 짐 져다 부으면 져다 부은 만큼 우물에 표시가 있어요. 실체도 없는 번뇌와 망상, 야망의 그림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없애려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우물에 흙을 져다 메우는 것과 같아요.”

지금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 등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고통을 만들기도 하고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고 하니 고통을 만드는 것은 자신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설우 스님은 ‘우리는 기능적으로나 능률적으로나 부처님과 조금의 차이도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본래 성불했기 때문에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찾고 닦아야 할 그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없애야 할 번뇌가 있는 것이 아니란다.


“화두는 본래 성불돼 있는 자리, 본래 청정한 자리를 알 수 있게 끔 해주는 직로(直路)입니다. 완성돼 있는 무심한 자리를 화두가 인도해 주는 것이지요. 화두는 절대 알음알이나 분별의식으로 풀어 들어가면 아무리 해도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사유분별을 차단해 버리고 바로 우리 본성 자리를 화두로 참구해가면서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조주 스님은 왜 뜰 앞의 잣나무라 했을까’하고 그것 하나를 들고 의지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뜰 앞의 잣나무’ 앞에서는 수만 권의 책도 소용없고 경전을 천권을 읽어 독파를 해도 아무 힘이 없어요. 사람들은 공안을 동문서답이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정견과 법안이 없이 허공에 뜬구름 잡는 식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에는 반드시 우리 본성을 확철하게 깨칠 수 있게끔 하는 직관해 들어갈 수 있는 법칙성이 있어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서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선문답을 하면, 스승은 제자의 질문에 세상살이처럼 비슷하게 풀어서 답하는 것이 아니고, 스승은 제자의 질문 자체를 뺏어버립니다. 제자가 그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성불된 부처자리와 성불하지 못한 중생 자리가 있고, 열반의 자리와 생사(生死)의 자리가 있고, 번뇌가 있고 보리가 있다는 상대성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질문 속성에 분별심과 차별심이 이미 포함돼 있어요. 스승은 주관과 객관이 벌어져 있는 질문의 속성 자리를 부수어 버립니다.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 상대성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는 소리가 바로 ‘뜰 앞의 잣나무’인 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에는 부처도 중생도 번뇌도 보리도 주관도 객관도 없고, 알 수 없는 자리로 들어가게 합니다. 교학적으로 말하면 알 수 없는 그 자리는 ‘연기법의 자리’를 말합니다.”

스승은 제자의 마음에 깨쳤다는 흔적과 자국이 남아있으면 그것마저 빼어버린다. 뺏어버리면 비로소 제자는 ‘증득했다, 깨쳤다’ 는 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본래 성불된 그 자리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행하는 평범한 보살이 되는 것이다.

빠르지 않은 말투로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시는 설우 스님의 한 마디 한마디는 듣는 이의 가슴에 사무친다.

설우 스님께 출가동기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불교가 무엇인지는 몰랐고, 그저 외롭고 쓸쓸해서 출가했다면서 스님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속가의 부모님은 불심이 깊어서 칠남매 모두가 출가하기를 바랐던 분이었어요. 부모님들이 절에 가서 공부하신다고 집을 많이 비웠기 때문에 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그래서 많이 외로웠어요. 어릴 때는 불교도 싫었고 스님도 싫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머니를 좋아하는 정이 남달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출가를 했습니다.”

설우 스님은 출가 목적이 성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 소개로 청담 스님의 상좌 원명 스님과 연을 맺었고, 상주 원적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원명 스님은 평생을 선승으로 살다 가신 분으로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었다. 출가한지 며칠 만에 은사스님은 콩을 한 바가지 주면서 밭에 심으라고 하더란다. 콩을 두알 씩 넣어서 심어라고 했는데, 날은 덥고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콩 대여섯 알씩을 넣어서 심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한 군데서 대여섯 포기씩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본 은사스님은 “너는 출가할 선근이 없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부터 배우니 집에 가거라”면서 내쫓았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출가는 정직하고 항상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네가 잘못했다. 스님께 가서 참회하고 빌어라”고 했다. 다시 원적사로 돌아 온 상좌에게 원명 스님은 한 달 동안 ‘하루에 삼천 배씩 하라’고 명을 내렸다. 법당에서 삼천 배를 하니 힘이 들고 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참고 견디어 냈다고 한다.

은사스님을 모시고 육 년 동안 토굴 생활을 했는데, 은사스님은 일을 많이 하라고 가르쳤다. 나무 심고, 약초도 심고, 밭에 김도 매는 등 하루 종일 일하면서 화두를 들었다. 설우 스님은 동중 속에서 일하면서 나름 공부가 즐거웠다고 했다. 물론 선방에서 30안거를 보냈는데 제도권 내의 틀 속에서 공부한 것은 그대로 또 배울 것이 많더란다.

설우 스님은 불교 공부를 함에 있어 제일 중요한 덕목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정견이 바로 서야 하고 둘째는 믿음이 확고하고 확신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그 믿음을 통해서 발심이 돼야 하고 넷째는 그 발심으로 인해 내가 얻은 공덕이 있다면 이웃들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정견이란 모든 생명세계는 서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나 벌레는 서로 어울림 속에서 관계 속에서 생명을 지탱해나가고 있으며, 모든 생명세계는 연기 속에서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연기법을 바로 아는 것이 정견이다. 연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은인(恩人)으로 생각해야하고, 은인으로 생각하면 모든 관계가 은혜로울 수밖에 없단다.

“이 모든 생명이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 다음은 ‘우리는 본래 성불돼 있는 것’임을 스스로가 믿어야 합니다. 섬진강 연어가 섬진강을 떠나서 태평양을 지나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삼 년 만에 다시 섬진강으로 돌아오는데 거기에 무슨 이정표가 있고 팻말이 있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불성이 있어 돌아올 줄을 아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스스로 북쪽을 찾아갈 줄 알아요. 사람도 이기심과 욕망과 대립심과 분별심으로 자기 진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우리는 기능적으로 능력적으로 부처 자리에서 하나도 부족함이 없어요. 마음은 원래 구족돼 있기 때문에 잘 쓰면 되는 것이지 구하고 닦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임을 알고, 이 법이 굉장히 귀중하고 놀라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저절로 발심하게 됩니다. 이것을 발보리심이라 하지요. 발심이 되면 보리심으로 안락하고 기쁘고, 지혜로 회향하게 돼요. 발심이 되면 축생을 보아도 자기 본래 진성자리를 깨닫게 되고 무엇을 봐도 다 전부 그것이 공부가 됩니다. 발심만 되면 3일만에도 성불할 수 있고, 발심만 잘 되면 그것이 그대로 회향이 됩니다. 회향하는 마음은 원력에서 나오는 것인데, 회향은 밖으로 드러나고 분출돼야 합니다. 회향은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로 말하면 봉사활동이 되겠지요.”

진정한 발심이 어떤 것인지 여쭈었더니 설우 스님은 당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사십대 후반 때 회생이 어렵다고 할 정도로 몸이 아팠고 오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부처님께 내 공부가 잘못됐음을 참회도 하고 그랬지. 투병생활을 하면서 경도 보고 어록도 보았는데, 그때의 발심이 참발심이었던지 보는 것이 전부 그대로 이해가 되고 긍정적이고 모든 법에 막힘이 없이 수용이 되더라고요. 그동안 진정으로 내 자신을 관찰하는 공부가 부족했고 껍데기공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투병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느낀 것이 있다면 공부는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허망하고 허무하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법인이 오롯하게 공부거리로 남더란다. 오년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자연 음식과 자연요법으로 치유하면서 병고를 이겨냈다. 은사스님의 “한 세상 안 난 셈치고 공부하라”는 그 말씀이 무아의 사상과 직결되는 것임을 그때야 알았단다. 불법이 진정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법이고 가장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법이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이렇게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발심이 저절로 되더란다.

법인정사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가르치지 않는다. 교양대학에서 부처님의 정신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나면 그 후 백일 공부기도를 시키는데 법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지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한다. ‘불지촌’은 법인정사의 봉사단체인데, 생활이 어려운 백오십 명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도시락을 배달해주는 등 이웃과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스님을 비롯한 법인정사 신도들에게도 많은 마음공부가 된단다.
봉사활동을 통해 나의 현 위치를 알고 바라보게 만들고 내가 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도와주고 무엇을 베풀어야할지를 깨닫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공부고 기도란다. 법당에서 염불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설우 스님의 철학이다.

설우 스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가 돼야 하는데, 절에 가서 큰스님 법문 듣고 특별한 공간에서 공부하는 것만이 공부라 여기는 것이 한국 불자들의 큰 병”이라고 지적했다. 일상생활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공부를 위한 공부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설우 스님이 병고 속에서 온 몸으로 체득한 산공부인지라 참으로 귀중하게 다가왔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가 우물에 눈을 져다 붓는 공부인지 우물에 흙을 져다 붓는 공부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상을 내는 공부를 할 것인지 상을 지우는 공부를 할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이다.


설우 스님은

1971년 원명 스님을 은사로 원적사 입산출가. 1975년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78년 구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수도암, 도성암 등에서 25안거 성만. 조계종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집위원 역임. 지금은 법인정사 선원장이며, 조계종 기본선원 교선사를 맡고 있다.
글ㆍ사진=문윤정(수필가ㆍ본지논설위원) |
2009-06-29 오전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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