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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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의 평등성 보면 언제 어디서도 행복해"
[선지식을 찾아서] 기후 스님(축서사 북암)



축서사를 지나 개울에 걸쳐진 작은 다리를 건너니 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산길을 따라 걸었다. 뻐꾹새와 휘파람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운다. 암자라기보다는 토굴이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리는 북암 초입에 들어서자,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잘라 울타리 삼고 나지막한 출입문 앞에는 ‘면담 가능 시간 12~2시’라는 팻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행자의 치열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팻말이다.

기후 스님은 새벽 3시면 일어나 가사 장삼 수하고 축서사 대웅전에서 예불올리고, 참선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요즈음은 거처 앞뒤로 풀이 하도 우거져서 도라지를 심으려고 풀을 베고 땅 고르는 일을 한다고 했다. 도라지가 피어 올리는 보라와 흰색의 꽃 위로 밤이면 별빛들이 쏟아질 터이고, 기후 스님은 별빛방장 노릇을 하겠지. 천년만년을 달려 온 별빛과 도라지꽃과 기후 스님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1965년 늦가을, 수학여행을 간 인연 밖에 없는 범어사를 묻고 또 물어 찾아갔다. 범어사의 어산교에 이르자 저녁노을은 붉게 불타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바의 울혈이 저절로 녹아내리면서,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고인의 말씀에 화두는 하나로서 족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세 개를 갖고 지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지요.” 첫째는 나는 왜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까? 둘째는 어떤 인연으로 승려가 되었을까? 셋째는 내가 어쩌다 위암에 걸렸을까? 이 세 가지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이 깊어져서 출가를 하신 것처럼 기후 스님 또한 자신의 삶을 화두 삼아 깊이 천착한 공부였음을 알 수 있다.

기후 스님은 한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온 몸을 녹이는 듯 한 고열은 얼굴에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얼굴의 흉터로 인해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고,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사춘기라 콤플렉스도 많았지. 사범대학이나 교원대학으로 진학하여 교단에 서고 싶었는데, 저 같은 사람은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데요.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포기했어요.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이런 얼굴로는 결혼하기도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 살아야한다는 조건아래 나를 받아줄 곳은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스님들은 결혼을 안 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니 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빳빳하게 풀 먹인 승복을 입은 스님이 지나가는데 향내가 나는 것이 참 멋있어 보이더란다. 그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스님과 불교를 연모했고, 고등학교 때 그 한 생각으로 스님이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천 가닥의 실버들도 때가 되면 가 버리는 봄기운을 붙잡지 못하듯 인연 따라 떠나가는 왕래의 길 또한 막지 못한다고 했던가. 출가의 인연 또한 그러하리라.

행자생활을 마치고 기후 스님은 월하 스님의 상좌가 되고 싶어 두루마기를 잘 차려입고 찾아갔다. 월하 스님께 상좌가 되겠다고 했더니 “근래에는 상좌를 안 받는데...”라면서 점잖게 거절을 하시더란다. 그때 기후 스님은 내 주제도 모르고 앞서갔구나 하면서 자책을 했단다. 이때까지도 기후 스님에게는 ‘나는 왜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까?’ 이것이 화두였다.

“불가에 들어오면 모든 허물을 감싸줄 것이라 믿었는데 스님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에 실망했고, 승가대학을 다닐 때도 소임배치라던가 인물 좋고 학벌 좋은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을 은연중 알게 되었어요. 자비문중이라 해도 사람 사는 데라 별 차이가 없음을 느꼈지요. ‘아, 내가 속았구나’ 그런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지요.”

통도사 승가대학에서 <초심>부터 해서 <서장> <도서> <절요> <능엄경> <기신론> <화엄경>까지 홍법 스님께 배웠다. 홍법 스님이 강사준비를 하라고 해도 이런 얼굴로 어떻게 대중에 설 수 있을까 하고 많이 망설였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승가대학에서 중강 소임을 보면서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진정으로 극복하지는 못했다. “어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하심과 진실을 추구하는 한편 부처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했다. 진실하게 사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 열심히 경전을 독송 했지만 끝내 답을 구하지 못했다. ‘내가 있다’는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이 모양이 있나? 무게가 있나? 그렇지만 사람들은 툭하면 ‘마음이 무겁다 괴롭다’고 하잖아요. 실체가 없는 것이 마음인데, 별의별 감정을 느끼면서, 과거와 미래의 일로 인연해서 항상 얽매여 있어요. 얽매임을 끊으려 하지만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끊을 것이 없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다만 망상이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채는 것이 공부지. 이것을 모르니 괴로운 것이지.”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예불 후 쪽지를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걸망을 지고 통도사를 나왔다. 전강 큰스님이 계시던 용화사에 도착해 첫 철을 지냈다. 용화사에서 한 철을 지내면서 “그동안 찾아다녔던 감로수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면서 환희심을 삼키고 또 삼켰다”고 회고했다. 그 후 봉암사를 비롯한 여러 선원에서 정진했고 차별의 세계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선원에서 나름 공부의 힘을 얻었다. 한 철 잘 지내고 해제 때는 내면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곤 해서 힘든 결단을 내렸다. 도반 세 명과 함께 기림사 북암에서 ‘6년 묵언’ 정진에 들어간 것이다. 바깥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으니 무문관 정진이나 다름없다.

“묵언 정진을 하는 3년 동안은 지금까지 살면서 잠재돼 있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와 괴롭히데요. 3년 정진이 지나니 업력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데요. 그런데 망념이 줄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부터는 그 상태에 머물고 싶은 무기(無記)에 빠져들어 한동안 힘들었지요. 그 후 3년 동안은 안 보고 안 듣고 반연을 쉬면서 정진하다보니 내면의 힘이 길러집디다. 그동안 내가 허상에 끄달려서 참으로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지니 나 자신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기후 스님은 당신의 공부는 드러낼 것이 없다면서 드러내기를 꺼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물질들의 모습이나 학문, 종교사상 등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화엄사상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 표현하지요.”

기후 스님은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별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 됨의 평등을 보라’고 했다. 그것이 진리적인 삶이고, 불법의 요체란다. 차별을 따르며 거기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매달리며 살다보면 항상 시비와 고뇌가 따르지만, 하나됨의 평등성을 보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했다.
“큰 회오리바람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아무리 완벽하고 오랜 인생 경륜이 있는 사람이라도 때로는 실수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참 선지식은 처처에 널려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선지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마주한 사람이 그대로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리라. 이때 마루로 날아 들어온 꽃등에 한 마리가 출구를 찾지 못하여 출구도 없는 유리창에 부딪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기후 스님은 신찬 대사의 말을 빌어 “세계가 이처럼 넓은데 나가지 못하고 창호만을 두드리니 언제나 나가려나”하고 한마디 했다. 그 한마디 속에는 ‘열린 마음으로 보면 온 세상이 출구요, 내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육년 묵언 정진을 회향하던 날 기림사에 큰 행사가 있어 불국사 조실이신 월산 스님이 오셨다. 일정에는 없었는데 월산 스님은 “육년 동안 묵언 정진한 공부를 대중들에게 내보여라.”고 했다.
기후 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세 번 호곡을 했다. 기후 스님의 호곡에 대해 월산 스님은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공부꺼리를 던져주었을 것 같다. 스님은 선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체험이라면서 선은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화두 수행하는 데는 대혜 스님의 <서장>이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묵언 정진을 회향했지만 공부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처소보다 홀로 공부하고 싶어서 더 깊은 곳을 찾아 태백산의 구마동 계곡으로 들어갔다. 구마동 계곡에서 일 년을 지내다 호주 시드니로 가게 되었다. ‘그곳 신도들이 별나서 스님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자신감이 있었다.

“묵언 정진으로 내면의 고요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어떤 경계에 부딪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호주로 떠날 때는 ‘육 년 묵언정진 한 것을 바탕으로 잘 할 수 있으리라’ 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한 이삼 년은 수행한 대로 사람들을 제접했지만, 분에 넘치는 불사로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점점 수행의 바탕에서 이탈하는 것을 느꼈다. 기후 스님은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시드니에서 정법사를 창건하여 15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다. “시드니 생활을 돌아보면 내 능력껏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은 위암을 얻었으니 마음 경영을 잘못한 거지. 시드니에서 머물 때 나 자신을 또 다시 회광반조하게 되었어요.”

기후 스님은 15년 동안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암 3기라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스님은 수술도 하지 않은 채 지금 육 년째 잘 살아내고 있다. 위중한 병을 특별한 치료 없이도 어떻게 버티어내느냐고 했더니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사는 덕분”이라 했다. 아마도 그동안의 수행과 정진의 에너지가 버팀목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시드니에서 찾아 온 불자들은 ‘우리들이 스님을 힘들게 해서 병이 났다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요. 설사 신도들이 힘들게 했다 하더라도 수행력으로 받아들이고 잘 풀었어야 하는데 내 근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라면서 스스로를 견책했다. 스님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기에 이미 시신기증도 해놓았다.

그래도 출가한 자취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얼마 전에 구도소설 <꿈속의 인연들>을 펴냈다. 스님은 “이것도 부질없는 욕심”이라 표현했다. 축서사 홈페이지 ‘별빛방장과 함께’에 틈틈이 올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스님은 “남몰래 낙서하다 들켜 버린 것처럼 부끄럽고 우습다”고 하지만 이 책은 지금 사찰 안팎에서 인기가 높다.

“우리의 삶이 묘미가 있는 것은 절망을 다시 희망으로 변모시키려 애쓰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에게 완벽하게 맞는 조건은 없어요. 만일에 자기 생각에 맞는 조건이 이 세상에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다면 아마 염라대왕도 저승의 자리를 박차고 재빨리 이승으로 오고 말 것이라 생각해요. 무작정 자신에게 맞는 여건을 찾을게 아니라 스스로의 무게와 처지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잘 가꾸어나간다면 희망의 에너지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저녁 공양시간이 되어 산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기후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시고, 객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골이 깊어서 그런지 아직도 못다 핀 철쭉이 짙은 분홍빛을 흩뿌리고 있다. 저녁노을 아래 철쭉은 분홍빛으로 오가는 이에게 추파를 보내고, 딱따구리는 다 부질없는 일이라면서 딱딱딱 나무를 쪼으면서 혼자 걷는 노승의 발걸음에 장단 맞추어 준다.




기후 스님은

1943년 안동에서 출생. 1965년 범어사로 출가하여 69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수지. 통도사 승가대학 졸업. 통도사,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사 역임. 용화사, 봉암사, 통도사 등 제방 선원에서 여러 안거 성만. 경주 기림사 북암에서 6년간 묵언 정진. 1991년 호주 시드니 ‘정법사’ 창건해 15년간 해외포교에 주력. 지금은 축서사 북아에서 안거 중이다. 저서로는 구도소설 <꿈속의 인연들>이 있다.
글/사진=문윤정(수필가/본지논설위원) |
2009-06-22 오전 10:57:00
 
한마디
ozbuda 언제나 자비로우셨던 큰스님께서,모진 무명중생들과 동사섭하신 15년 세월의 풍상을 꿈결인양 하시니,두손모아 삼배올리옵고,변덕스런 시드니의 풍상속에있는 소납은 때묻은 동방소매로 그리움을 짓습니다.큰스님!법체 청안하시오소서.()()()...
(2009-07-20 오후 8: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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