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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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경쟁'을 '무한 향상'으로 바꾸면 행복
[선지식을 찾아서] 금봉암 주지 고우 스님




초록빛이 온 산천을 물들이고 있다. 봄날의 그 많은 빛깔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일까? 산수유의 노란빛, 진달래의 자줏빛, 목련의 흰빛, 벚나무의 연분홍빛, 오동의 보랏빛...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짙어지면서 그 사이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현란한 빛들에 청복을 누렸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꽃 진 자리가 허전하다. 꽃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했던가. 꽃 진 자리에 열매 맺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이라지. 꽃 피고 지면서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진정 슬픈 일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금봉암이 자리잡고 있는 문수산은 태백산맥의 한줄기로 산세가 기운차고 첩첩 준령이다. 고우 스님은 17년간의 각화사 서암의 토굴 생활을 접고 이곳에 터를 잡고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 단청이 없는 소박한 전통 당우를 보면서 고우 스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우 스님은 ‘이곳에서는 오로지 법회만을 열고 있는데, 부처님 당시처럼 그렇게 살림을 꾸려보고 싶다’고 했다.
고우 스님은 선승으로도 명성이 자자하지만, <금강경>, <서장>, <선요>강의로 대중들의 인기를 모았다. 어렵고 추상적인 선불교도 스님의 입을 통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언어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조계종 최초로 간화선 수행법을 정리한 책인〈간화선〉발간을 주도하는 등 참선 공부의 저변을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


선종에서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가라(捨敎入禪)’고 한다. 하지만 고우 스님은 평생 참선수행을 하신 분으로서 교학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선수행은 나를 철저히 비워나가는 과정인데 비해 경전을 통한 공부는 무엇을 얻고 채워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면 교학은 참선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여쭈었더니 고우 스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다.

“자신이 무아(無我)임을 알고 있는 이것을 통해 바르게 실천해나간다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상관없어요. 아는 것이 곧 지혜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사람 중에 가장 큰 병이 수행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서 깨닫는 것이 불교공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 바로 수행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선(禪)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천천히 없애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비운다든지 없애간다든지 이것은 하나의 방편인 과정의 이야기이고 깨달음이라는 목적에 가면 내용이 달라집니다. 선과 교 모두가 목표는 깨달음 즉 성불(成佛)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옛 선사들은 과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구경각이 목적인 본래면목(本來面目) 그 자리에서 두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요. 목적에 도달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만,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물에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더해서 보잖아요. 말하자면 세탁 안 된 상태에서, ‘나’라는 의식의 때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입니다.”

세탁이 안 된 상태에서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두고 중생이라 한단다. ‘나’가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근본 ‘때’이니 그것을 벗겨야 하는 것이다.

“화두라는 것도 바로 ‘때’가 벗겨지라고 제시한 것입니다. 화두를 제시한 사람은 그 순간에 깨달으라고 준 것이지 결코 의심하라고 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해요. 그런데 화두를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깨닫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다보니 의심을 하게 된 것이고 의심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 입니다. 화두란 아주 비상한 약이지만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신비스러운 비상한 약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알려고 하는 가운데 의심을 해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의심하기 위해서 의심을 하니 공부에 진척이 없어요. 화두를 받은 순간 깨닫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은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화두를 알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 그 밑바탕에는 깨닫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만이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고우 스님은 화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깨우쳐 주었다. 바른 신심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믿는 것이란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을 한 평생 설법하신 분으로 팔만대장경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모아 둔 것이다. 고우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바로 공(空)이라 한다. 공은 곧 무아(無我)이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으로 시작되잖아요. ‘형상 지어진 것은 유정? 무정 모두 색(色)인데, 그 색이 공(空)한 것을 알게 된다면 일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오온개공’을 생로병사에 대입을 하면 태어나는 것도 공이요, 성장하는 것도 공이요, 늙고 병드는 것도 공이요, 죽음 그 자체가 공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즐겨 들던 비유를 하나 들까요? 시골에 가면 가마니, 짚신, 새끼줄, 멍석이 있는데, 모양새는 달라도 그 재료는 전부다 짚으로 되어 있어요. 재료는 하나이지만, 새끼가 되었다가 멍석이 되었다가 가마니가 되었다가 하잖아요. 이 짚이 바로 공(空)입니다. 매순간이 그대로 공이요 무아입니다.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이요, 무아인 것입니다.”

고우 스님은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모든 것은 연기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강조했다. 연기를 이해하면 불교를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존재원리를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내가 본래의 그 자리, ‘본래부처’임을 알게 된다고 했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내가 있다’는 대한 착각을 깨고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란다.

연기법이 거창한 것 같지만, ‘이 세상 어떤 것도 홀로 독립된 것은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고우 스님은 “우리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의 육신은 원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원자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물론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로 되어 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세분화하면 쿼크인데, 쿼크의 크기는 머리카락 굵기의 1조분의 1이다. 그전까지는 쿼크가 모든 물체를 이루는 최소단위라 여겼다. 하지만 최근에 질량화 되어 있지 않은 힉스가 있다는 가설을 세워놓고 빅뱅실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힉스를 ‘신의 입자’라고 부른다. 고우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 ? 법성이 힉스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부처님이 발견한 공 ? 무아 ? 자성 ? 법성 등을 현대 물리학이 하나하나씩 증명해가고 있어 참 다행한 일’이라 했다. 공과 연기법을 알게 되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서 말씀을 이어갔다.

“공에 대해서 백퍼센트 체험을 못한다 하더라도 신념화만 되어도 인생이 많이 달라져요. 경전 독송, 참선, 염불, 봉사 등 여러 가지 수행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지속적으로 행하는 그 과정이 자신을 비워나가는 수행입니다. 공에 대한 이해가 신념화만 되어도 굉장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확신해요.”

고우 스님의 얼굴에 항상 웃음과 편안함이 가득한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머무는 바 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유와 화평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고우 스님은 젊은 날에 폐결핵을 치유하기 위해 잠시 절에 머물렀다. 그때 절에 머물면서 불교를 알게 되었고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 출가했다. 출가를 하고 나서야 자신이 왜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단다.

고우 스님은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있지만, 무한경쟁은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철저히 ‘내가 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이 욕망은 때로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해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사회는 피곤한 사회라고 일침을 가했다.

“무한경쟁이 ‘무한향상’으로 생각이 바뀌면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무한경쟁은 욕망에서 출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되고, 수천수만 직업인들이 돈만 쳐다보고 일하고 경쟁하도록끔 되어 있어요. 하지만 ‘무한향상’이 되면 자신의 일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다보면 존경을 받게 되어요. 일에 대한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알고 일한다면 돈과 명예는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며, 이것은 정당한 돈과 명예입니다. 이 정당한 명예는 나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이지요. 무한경쟁은 돈과 명예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해치는 역기능이 더 많아요.”

고우 스님은 ‘국왕대신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천한 사람’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도층이 국민을 괴롭히면 더 천한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고우 스님은 소통이란 쌍방 소통이 되어야지 일방적인 소통은 소통이 아니라면서 소통부재의 사회는 위험하고 소란스러운 사회라고 꼬집었다.


“상대방에게 ‘나를 이해하고 따라주면 안되겠나’ 이런 생각은 일방소통인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적극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갈등의 원인을 풀려고 하는 자세가 쌍방소통인 것이지. 무지(無智)에서 지혜로 바뀌면 형상은 남녀, 빈부, 귀천 등 차별이 있지만 본질에 가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인정하여 쌍방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툴 일도 갈등할 일도, 전쟁할 일도 없어요. 진보와 보수는 잘 살기 위한 하나의 제도이지 그것이 목표가 아님을 알아야 해요. 불교만이 종교 전쟁을 하지 않은 세계의 유일한 종교입니다.”

고우 스님은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정견이며 정견을 바탕으로 하여 수행하여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하여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수행을 거꾸로 하는 것이란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추구한 만큼 행복하지 못한 연유는 어디 있는 것인지 여쭈었다.

“사람들은 눈으로, 귀로, 혀로, 몸으로,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구박하며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쁘다 좋다’ 고 하는 것도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일은 다가온다기보다는 자신이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아요. ‘나’가 있어 비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좋고 나쁜 일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가 있다는 집착 속에서 살면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좋은 일에 끄달리고, 나쁜 경계가 나타나면 나쁜 경계에 끄달려 속상해 합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으면 좋아하여 취하려하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배척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없애고 무지한 사람은 경계를 없애려 합니다.”

빈부(貧富), 귀천(貴賤), 고저(高低), 상하(上下) 등 이런 경계를 없애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고우 스님은 도리어 ‘무지한 사람은 경계를 없앤다“고 하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천수만 가지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이 수많은 경계를 다 없애려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하지만 나를 없앤다면 경계를 없애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아(無我)가 된다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각각 다른 수많은 경계들은 지혜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선종에서는 중생과 부처로 나누지 않고 일체 모든 것을 부처로 봅니다. 이분법으로 사고한다면 부처가 되는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무아가 된다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 하나로만 보인다고 했다. 무아가 되면 지금 사고하는 것이 지혜로 바뀌게 되니 매사(每事)가 좋은 일로 다가오고, 매일(每日)이 좋은 날로 되는 것이란다. 이렇게 되면 절로 행복해지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래서 고우스님은 무아(無我)를 신념화하라고 일러주시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고우 스님의 한유로움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마당에 내려섰다. 몸피가 큰 개들이 짖지도 않고 긴 꼬리를 시계추처럼 흔들고 있다. 반가워하는 개의 몸짓은 충분히 알겠지만 무서워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순한 개라고 하지만, 마음속의 견고한 공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심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기에 누구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지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개들은 객을 환대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그렇지 못하니 개와 객은 소통부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낯선 사람을 보고 짖는 것이 개의 본성이건만, 이곳 금봉암의 개들은 낯선 사람을 봐도 짖지 않듯이, 무심도인의 그늘에서 살면 날카로운 자는 둥글어지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워지고, 공격적인 자는 자애로워 지는 것임을 실감했다.


약력

1937년 성주출생. 1961년 청암사 수도암에서 법희 스님을 은사로 득도.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흔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수학했다. 봉암사, 축서사, 김용사, 용주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했다. 1968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마련. 전국 선원 수좌회 공동 대표 역임. 각화사 태백선원장 역임. 지금은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문수산 금봉암에 주석.
글/사진=문윤정(수필가 본지논설위원) |
2009-06-15 오전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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