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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읍내를 지나 극락사로 가는 길. 길 양옆으로 과수원이 이어진다. 연분홍빛 사과꽃이 끝물인 듯 빛을 잃어가고 있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자, 비를 머금은 구름들이 몰려 온다. 한줄기 비라도 뿌릴 기세다. 극락사를 품어 안고 있는 건경산은 화마가 지나 간 듯 불탄 흔적이 남아있다. 지성 스님께 여쭈었더니 “얼마 전에 큰 산불이 났어요.”라고 무심하게 한 마디 할 뿐이다. 붉은 화염에 휩싸인 산을 보고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을까? 하지만 스님은 이미 평상심으로 돌아와 있다. 대웅전이 무사하고, 요사채가 건재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어 혼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성 스님의 거처는 소박했고, 경전과 많은 서적들이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동화사에서 행자시절을 보낸 지성 스님은 불교를 알고 출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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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린 진주의 응석사에서 의현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을 모르고 살면 인간은 우주의 나그네가 되고, 내가 자신을 깨달아 알면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그 말씀에 불교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결국 이 한 마디가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행자시절 금당선원의 입승스님으로 계시는 지월(指月)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매일 저녁 두세 시간씩 정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우(石友) 노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과 <금강경> <육조단경>을 배웠다. 석우노사로부터 배운 공부는 훗날 정진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일 년의 행자시절을 끝내고 동화사에서 인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은사이신 혜진 스님은 “방일하거나 나태하면 안 된다.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니 시간에 투철해야 한다”고 일렀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지성 스님은 불영사에서 삼동결제를 했다. 은사 혜진 스님을 비롯해 금담 스님, 비룡 스님 등 세 분의 스님들이 겨울 내내 장좌불와를 하는 등 초인적인 정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구도의 길은 개척의 길이며, 창조의 길이고 발견의 길임을 알았어요. 인간심성을 개척하고 발견하여 참성품을 알고, 참인간을 실현하는 길이 구도의 길임을 불영사 선원에서 절감했지요.”
그 후 깊은 산중의 몇몇 토굴에서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는 수행의 날들을 보냈다. 지성 스님께 토굴이야기를 청했더니 스님은 “세월이 지나 다 잊어버렸지”라면서 웃으신다. 그중에서도 심적(深寂) 토굴에서 공부했던 그 때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들려주었다.
“토굴은 원시인의 혈거(穴居)를 겨우 면했을 정도였어요. 토벽이 그대로 드러난 방에서 가마니 깔고 생활했지. 산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꿀밤이라, 꿀밤을 삶아 가루로 만든 것이 주식이요, 산나물에 소금이 부식이었어요. 물론 탁발을 해다 먹을 수도 있지만 수행에 방해를 받을 것 같아 마을로 내려가지 않았어요. 그때는 보는 것이 그대로 공부가 되던 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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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이라 겨울 내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눈 위에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어떤 것은 처연(悽然)했고, 어떤 것은 분연(奮然)했는데, 처연한 것은 쫓기는 입장이요, 분연한 것은 쫓는 입장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발자국을 돌아보게 되더란다. 서산대사의 선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때에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한 번은 오대산줄기인 백석산 토굴에서 홀로 겨울 한 철을 났는데, 그곳은 음력 9월인데도 눈이 내리더란다. 설한풍에 문 바를 종이가 없어 쇠풀을 엮어 문을 삼았고,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야무야(有也無也)’ 화두를 잡고 치열하게 정진했다. 그런 극심한 토굴 수행이 왜 필요한지 여쭈었다.
“토굴 생활은 외적인 현상계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내적인 갈등과 번뇌를 방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무상한 현실존재의 참모습을 기필코 깨닫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심이 힘든 토굴 생활을 견디어내게 한 것 같아요.”
해제를 하고 신작로로 나와 버스를 타고 제천 시내에 내렸더니, 형사가 경찰서로 데려가 심문을 하더란다.
“그때 거울을 통해 내 몰골을 보았는데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깁고 기운 누더기 옷에 다 떨어진 신발, 내가 봐도 거지 중에 상거지라. 형사가 ‘너 언제 휴전선 넘어왔어? 내가 다 알아. 바른대로 불어!’ 그러는데 웃음이 절로 나오데요.”
오년이 넘는 토굴 생활을 마치고 사중(寺中)에서 생활하게 됐다면서 스님은 오래 전 수행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했다. 현재를 잘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지성 스님은 토굴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용연사, 송림사, 은혜사 주지 소임을 맡아 여법하게 해내었다. 스님은 2002년 동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그때 동화사의 수행 풍토는 물론이거니와 대구불자들의 의식을 크게 일깨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동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을 때 저의 출가본사이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주지직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 원로어른들을 만나 가르침을 구하기도 했지만, 삼보를 잘 외호하라는 등 별로 흡족한 답을 얻지 못했어요. 제 나름으로 ‘생각하는 주지, 고뇌하는 주지’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선원스님들이 공부 잘 할 수 있게 분위기 조성해주고, 강원을 재개원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강원교육에도 힘을 쏟을 것이며, 교구본사로서 포교에도 열을 쏟아야겠다는 그런 원력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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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스님은 임기 동안 <백고좌 법회> <화엄논강> <담선법회> <계율수행법회>를 열어 대중과 여러 언론매체의 관심의 한가운데 있었다.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경내 통일대전에서 100일간 설법을 전파하는 백고좌(百高座)법회였어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백고좌법회를 할 만한 여건이 아직 안된다면서 말렸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밀어 부쳤습니다. 다행히도 100일 동안 100분의 스님들이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법회를 하여 성공을 거두었어요.”
진제 스님을 비롯해 월운 스님, 천운 스님, 법타 스님, 법장 스님 등 백 분의 스님들이 참여해 <능엄경> <금강경> <법화경> 등 여러 경전을 설법했다. 매일 천 명이상씩 참여했고, 주말에는 이천 명 정도가 참여했다. 가르침에 목말라 있던 불자들에게 ‘백고좌법회’는 가문 날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 다음 해에는 ‘화엄논강’을 실시했다. 이전까지는 고승 법문이 주제도 없이 법상에 올라가 일방적인 법문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 이었기에 이런 식의 법회는 안 되겠다 싶어서 경전을 가지고 시작했단다. 3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13회의 법회를 열었다. 주제발표를 하고나서 토론자들이 반론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질문 시간도 마련했다. 백이삼십 명의 스님들과 사오백 명의 신도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법회방식도 신도들에게는 처음 접해보는 것인지라 인기가 있었다.
“이천오백 년 전 부처님 당시 영산회상에서 천이백 명의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한 분위기가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감회도 있었다.
2004년에는 담선대법회(談禪大法會)를 개최했다. 동화사 ‘담선대법회’는 한국 현대 조계종 선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다음 해인 2005년에는 ‘계율수행 대법회’를 열었다. 지성 스님은 계율법회가 공론화돼 열리기는 근ㆍ현대사를 통틀어 처음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율사들이 계율 속에 인간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했어요.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테러, 전쟁, 빈곤, 인종차별, 인권유린, 환경훼손 등 수많은 문제 해결책이 불교 계율에 담겨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사회의 도덕불감증과 무너지는 윤리의식을 계율을 통해 치유해 나가겠다는 원을 세웠어요.”
스님의 이러한 원력과 추진력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하여 여쭈었다. 지성 스님은 “나를 버리고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간절히 잘 하겠다는 발원을 하면 이 정도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말씀을 이어갔다.
“내 인생관은 간단명료합니다. ‘~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중은 중답게, 주지는 주지답게, 염불승이면 염불승답게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자기의 본분사에서 이탈하지 않고 산다면 일을 크게 그르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성 스님께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거뜬히 이루어낸 그 밑바탕에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토굴수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지성 스님은 동화사 주지 소임을 마치고 지역 사회발전을 위하여 불교사회단체인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함께하는 세상’은 국제포교 및 구호활동을 하는 단체로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해 불도를 닦는 ‘자리이타’사상을 근본으로 만들어진 단체란다. ‘함께하는 세상’ 산하 사찰인 ‘이웃절’은 대구지역 최초의 국제포교당이며, 이주노동자들의 수행공동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웃절은 타국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법당이기에 한국불상, 몽골불상, 스리랑카불상 3개국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그리고 이주민들을 위해 몽골과 스리랑카 스님들의 집전으로 매월 두 차례 정기법회도 봉행하고 있다.
지성 스님이 이주민 지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당시, 스님을 찾아와 후원을 부탁하던 몽골 학생들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다. 이후 한?몽골불교교류협회를 설립하고, 몽골불교유치원 건립을 지원하는 등 몽골 불교계와 긴밀한 연대를 이어오며 이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몽골뿐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의 노동자 지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주노동자 지원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되지 않아서, 법당과 이주민쉼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지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가장 심각해요.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겪는 어려움도 많기에 대신해서 사무 처리를 해주기도 하고, 직장을 알선해주기도 하고, 아픈 사람은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요. 다문화 가정이 점점 증가하고 있기에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자들이 절을 찾아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사회적 문제에도 눈을 돌려 이주민지원 등에 관심을 갖고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것도 불자들의 역할입니다.”
지성 스님은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에서 2007년 ‘국토사랑금강경 사경순례’를 시작했다. <금강경>을 사경(寫經)하며 전국 주요 사찰 33곳을 한 달에 한 번씩 순례하는 것이다. 2년9개월의 대장정중 벌써 중반을 넘어섰다. 순례동참자들은 1천일 동안 매일 <금강경>을 한 분(分)씩 사경하고 발원문을 낭독하는 수행생활을 하는 것이란다.
“눈으로만 보던 경전을 손수 베껴 쓰게 되면 내용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깊이 이해하다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행복과 가정의 화목은 물론이요 이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한 것인지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신심이 필요합니다. 유루의 복은 유한하고 한계가 있으니, 무한한 무루의 복을 닦아나가야 합니다.”
요즈음 경제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경제를 비롯하여 외적인 요소에 끄달리지 않고 잘 살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제가 봤을 때는 요즈음 같이 잘 사는 시대가 없었어요. 옛날처럼 옷이 없는 것도 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돈과 출세를 위해서 산다면, 자신의 고통이 탐욕에 사로잡힌 것이라면 돈방석에 앉아있어도 배고프고 불안한 것입니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살기에 풍요로워도 풍요로운지를 몰라요.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물질이 아닌 에너지라 할 수 있으며, 육신은 정신 에너지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뇌한다면 밥 한 그릇 먹는 것도 감사한 일 아닙니까?’라는 지성 스님의 이 한마디는 풍요로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 있는 화두이다.
약력
1940년 경남 진주 출생. 1958년 동화사 입산. 1959년 동화사에서 혜진 스님을 은사로, 인곡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5하 안거 성만. 청송 대전사, 영천 은해사, 옥포 용연사, 송림사, 대구 동화사 주지 역임. 제 10대, 11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지금은 사단법인 ‘함께하는 세상’ 이사장이며, 칠곡 극락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