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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지리산 황매암(黃梅庵)으로 일장(日藏) 스님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스님은 현대의 고승 동산 스님의 마지막 상좌다. 일장 스님은 석정ㆍ수안 스님과 함께 한국 선화(禪畵)의 3대 명장으로 불린다.
갈 길은 먼데 월요일 출근길 고속도로의 정체는 풀릴 줄 모르고. “버스전용차선은 누가 만들어 놨는지…. 가다서다 할 것이면 차라리 한참을 서 있다가 한 번에 가던지…” 좀이 쑤셔 뒤틀리는 몸처럼 머릿속도 운전에 집중하지 못하고 별의별 망상을 부린다. 이제는 갈 곳을 미리 넘겨짚었다. 몸은 여전히 서울 인근의 꽉 틀어 막힌 고속도로에 있는데, 마음만 벌써 가있어야 할 황매암을 생각했다.
“황매암, 왜 황매암이라 이름 했을까? 황매화 피는 곳이라 지은 이름이라면 정말 시시할텐데. 그보다 깊은(?) 뜻이라면 황매현에 주석해 황매 스님으로 불리던 육조 혜능 대사의 스승 오조 홍인 대사에서 유래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뭉게구름처럼 망상이 피어났다.
도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그저 핸들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앞유리창 가득 메우던 차들이 사라지고 아스팔트만 보인다. 차가 달린다.
내게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용기도 없었는데, 바람에 구름이 걷히듯 눈앞이 확 트이는게 환희심 가득하다.
“공부나 수행도 이렇겠지. 진척이 없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기연(機緣)을 만나 줄탁동시가 되면 놀라운 향상이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때가 돼서 정체가 풀린 것 뿐일테지”라며 어설프게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둘러대는 중생심(衆生心) 또한 여전하다.
서울에서 멀어지고, 지리산에 가까워질수록 계기판의 속도도 올라갔다. 끌려가나보다. 지리산 IC를 나오며 달리기도 끝났다. 지리산 실상사 못미처 있는 중군부락(中軍里)으로 들어서 임도를 올랐다. 이제는 친절하게 갈림길마다 ‘황매암’이라 정갈하게 쓰인 팻말이 나그네를 인도했다.
지리산은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흙이 두텁게 덮인 육산(肉山)이기 때문일까? 가파른 길이지만 전혀 험난해 보이지 않는다. 차로 5분여 쯤 올랐을까? 굽이를 도니 팻말 글씨만큼이나 정갈한 암자가 보인다. 황매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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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위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글씨ㆍ그림
일장 스님을 만나 삼배를 올렸다. 찻물이 끓기도 전 당장 황매암 유래부터 따지듯이 물었다.
“주변에 황매가 많아요. 조선조 말엽까지 근처에 절이 있던 곳입니다. 부도나 주춧돌 흔적도 보이고. 인근에 10여 가구 마을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 빨치산 소탕 때 마을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비웠던 곳이지요.”
노랑꽃인 황매화는 죽도화, 금완, 체당화 등으로 불린다. 4~5월 피는 황매화는 장미목 장미과로 매화나무와는 다르다. 꽃의 모양이 매화를 닮아 노랑매화라 불린다. 황매화의 꽃말은 숭고, 왕성, 고귀와 욕망을 누린다는 뜻이다.
소낙비처럼 휘몰아치는 나그네의 성급한 질문을 스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장삼에 묻은 빗방울 털듯 털어냈다. 툭툭 질문을 털어낸 스님이 어찌 먼 길을 찾아왔는지 되묻고는 한마디 던진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그냥 그렸을 뿐이지 선화가 아니요.”
일장 스님의 그림 솜씨에 대한 나그네의 미련이 계속되자 스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선화라면 열심히 수행하던 자가 자기도 모르게 어쩌다 낙서해 그린 것이지. 내 그림은 ‘실선’자 선화(線畵)라면 모를까 택도 없지. 게다가 자연 모두가 선화인데 굳이 그걸 그릴 필요가 있겠어요? 스님이 뭐하면 ‘선(禪)’자 붙이고 그림 그렸다고 선화라는데 내 그림을 내가 볼 때는 어릴 적 노트 뒤에 낙서한 것 같아요. 중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지.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쟎소?”
이어 스님은 요즘 세태에 죽비를 날렸다.
“예전 스님들과는 달리 요즘은 큰스님 돼서 유명해지면 정말 재수 없는 겁니다. 지금은 큰스님이라면 물질로 떠받들쟎아요?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죽어요. 살아있어야 팔리니까. 스님이 집과 부모 버리고 나와 출가했는데 출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 요즘 세상에서는 유명해지는 것은 불행해요. 천박하거나 못 알아주는 것이 고마운 세상이지요.”
그런 스님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것은 신도들 때문이었다.
“1985~2001년까지, 17년쯤 제주도에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한라산 자락에 ‘목부원’ 세우고 목부(牧夫)로 지내던 시절이었지요. 토굴살이 하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겠어서 염불이며 법문이며 닥치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법문을 해도 신도들이 돌아서면 잊고, 한두시간 열심히 이야기한 내용이 오고 간 곳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말만 해서는 안되겠다 싶었지요.”
일장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붓글씨로 적어주면 보고 느낄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다. 차츰 신도들이 ‘글만 쓰지 말고 그림도 그려 달라’ 했다. 나중엔 칼라시대에 색깔도 넣어달라고 하더라”며 “어느 순간 그림 그리는 일장 스님이 돼있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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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효대사> 읽고 출가발심
울산에서 출생한 일장 스님은 한국전쟁 즈음 절도 불교도 모른체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학창시절 만화책을 주로 보며 딴짓(?)하기를 즐겼던 스님은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 <서산대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은 사람인데 전혀 새롭게 사는 방법을 보고 신기했어요.” 어린 일장 스님은 책가방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불국사를 찾았다. 석주 스님이 첫 주지로 부임하던 즈음, 일장 스님이 13살 때였다.
“막상 절에 가니 소설과 현실이 달랐습니다. 행자가 됐는데, 막상 공부는 안가르쳐주고 집게 주고 껌을 주우라는 겁니다. 다시 뛰쳐나왔습니다. 5~6년 이곳저곳 동가식서가숙하다 17살 때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만나 정식으로 출가했습니다.” ‘금정산의 호랑이’라 불리며 참선수행을 강조했던 동산 스님(1988∼1965)은 성철 스님의 스승이다. 성철 스님과 일장 스님은 사형사제지간.
“동산 스님은 ‘글공부보다 참선해서 일대사(一大事)를 마쳐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은사스님의 그런 가르침 때문에 기도하며 선방에만 다녔죠. 동산 스님은 ‘출가자는 본사, 은사, 법사 3사를 떠나야한다’며 얽매이지 않고 공부하라던 분입니다.”
#대중의 귀감이었던 동산 스님
은사 동산 스님은 일장 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겨울 새벽에도 동산 스님은 아침공양이 끝나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나갔다. 큰스님이 솔선하니 대중스님들이라고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대중살이에 있어 동산 스님의 원칙은 확실했다. 방바닥이 닳으면 군데군데 땜질해 사신 검소함은 물론이고, 좋은 옷감이 시주 들어오면 대중방에 대중들을 불러 앉혀놓고는 대중 숫자대로 옷감을 잘라 나눴을 정도였다.
“해제 때마다 허튼소리 하는 도인이 인가 받겠다고 여럿씩 찾아왔어요. 엉터리 도인들을 제접한 동산 스님은 ‘그게 아니다’ 3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면 그쳤어야 하는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아상(我相)을 세우는 납자들에게는 앉은 자세에서 바로 이단옆차기를 날렸습니다. 그렇게 엄하던 분이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봄바람처럼 다 잊어 버리는, 자애로운 분이셨습니다.”
#내 습관 고쳐가는 과정이 수행
맹호부대원으로 월남 파병까지 다녀온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일장 스님은 전역 후 걸망을 지고 선방을 다녔다.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의 선원을 돌며 공부하던 스님을 괴롭힌 것은 유난히 약했던 심장이었다. 일장 스님은 “심장이 안좋았던 탓에 참선 중에 상기되며 숨이 가빠지기 일쑤였다. 대중스님들에게 피해주기가 싫어 토굴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토굴살이를 하다 보니 참 자유로웠어요.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방일하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기 시작한 책이 성철 스님에게 받은 <만선동귀집>이었어요.”
스님은 한글자씩 옥편을 찾아가며 3년동안 <만선동귀집>만 봤다. 꼼꼼하게 정리한 것을 도반스님들이 책으로 만들어 함께 보자고 권해서 책도 펴냈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불도(佛道)로 회향하는 길입니다. 자연 삼라만상 모두 불법 아닌 것이 없어요.”
일장 스님은 “업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비롯된 생활습관이다. 습관 들여 익숙해져서 수월해지는 것이 업”이라며 “수행은 나쁜 습관[業]을 바로 ‘고치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불자라면 스스로 자신을 고쳐나가는 만큼 돌이켜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교의 제일 덕목은 참회입니다. 매일 본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수행이지요.”
일장 스님은 “절은 자기를 낮춰 남을 높이는 행위”라며 “절에는 불교 전체 교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하심하면 아무 장애가 없다”고 강조했다.
#실천하지 못하면 팔만대장경 모두 부질 없어
스님은 “합리적이고 윤택하고 세련됐다는 지금 세상이 인간을 근원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옛날에는 책 구하기가 어려워 일일이 손으로 베꼈쟎아요? 쓰다보면 저절로 공부가 됐습니다. 부처님 전생담 가운데 ‘설산동자의 구법’에 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의 다음 구절인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을 듣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지기도 했쟎습니까? 지금은 어떤가요? 논리나 가르침이 없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동안 가물었을 때 일이다. 산중에 위치한 황매암에서도 물이 부족했다. 단체로 나그네들이 오고가면 물이 똑 떨어졌다. 그래서 붙여진 “실내의 수세식 화장실 대신 실외의 해우소를 이용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결과는 소용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실내 화장실을 써버리고 말지 실천으로 나가질 못하더군요. 백마디 똑똑한 말들 다 필요 없어요. 지금 배우고 아는대로 한가지씩만 실천하도록 마음을 내면 세상이 바뀝니다.”
일장 스님은 “우리는 위선에 쪄들어 숨는 것을 점쟎다고 생각하고 표정 없는 것을 문화인이라 포장하지만 도(道)는 진솔한 것”이라 말했다.”
“부처님 앞에 돈만 놓고 108배한다고 소원이 이뤄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실제 행동하는 생활이에요. 오늘 이 순간 자기를 돌아봅시다.”
황매꽃말처럼 숭고하게 도인의 욕망을 잔뜩 누리며 사는 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황매암을 나서는 길, 오던 길 나그네의 머리를 가득 채웠던 도량 주변의 황매꽃과 오조 황매홍인 화상은 어느새 일장 스님과 하나가 돼 있었다.
#일장 스님은 1945년 경남 울산 출생. 1958년 13세에 출가했다. 범어사 동산 스님의 막내 상좌다.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을 돌며 수선안거한 스님은 1980년 제주 한라산 자락에 목부원을 창건하고 10여 년간 <금강경> 등 경전강독회를 이끌어왔다. 2004년 지리산 황매암을 창건하고 참선정진 중이다. 주요 편역으로 <만선동귀집>, <선가귀감>(불광출판사 刊)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