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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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알고 가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어"
[선지식을 찾아서] 법연 스님(봉암사 선덕)



봉암사로 가는 굽이굽이 이어진 계곡에는 층층나무가 백자색 꽃을 피우고 있는가 하면, 꽃 져버린 벚나무는 연둣빛 나뭇잎을 꽃인양 진중하게 달고 있다. 연둣빛 신록이 꽃만큼이나 곱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봉암사 일주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동방제일수행도량’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에 젖는다. 한때는 봉암사에 삼천여 대중이 머물렀고,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산철이기도 하지만, 도량 전체가 묵언 정진에 들어갔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그나마 장대에 걸린 빨래들이 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 않아 한결 마음이 놓인다. 금색전을 지나서 태고선원 앞에 섰다. 진공문(眞空門)이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에는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고 쓰여진 주련이 걸려있다. ‘이 문에 들어올 때는 덧없는 알음알이는 버리고 한 마음 돌이켜 자기 존재의 실상을 밝혀라’는 경책이다. 한 스님이 진공문을 들어서기에 얼른 쫓아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노란색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태고선원에서 이십분 정도 올라가면 백련암이 나온다기에 부지런히 걸었다. 수레 정도는 다닐 수 있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백련암’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휴대폰도 터지지 않으니 물어볼 때도 없다. 무조건 앞을 향해 걸었는데, 양 갈래로 나뉘진 길이 나타났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그야말로 로보트 프로스트의 ‘가보지 못한 길’ 시(詩)가 절로 떠오른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습니다/ 한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어/ 서운한 마음에 한참 서서/ 덤불 숲속으로 접어든 한 길을/ 끝간 데까지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쪽 길을 택했습니다.


두 갈래 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사람의 발길이 오고간 듯한 길을 택했다. 산모롱이 돌아 한참을 올라갔지만 바람소리와 목탁새의 나무 쪼는 소리만이 귓가를 스친다.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서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해 걸었다. 개울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서 또 한참을 걸었다. 산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 와락 무서움이 엄습했다. ‘길은 길로 이어지기에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고 했던가. 대웅전으로 돌아가서 길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왔다.

백련암 암주 법연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잎이 무성한 산죽이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길을 반쯤은 가로막고 서 있다. 단청도 없는 퇴락한 백련암에는 이제야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벚꽃과 돌배나무의 하얀 꽃은 음전하게 도량을 단장하고 있는데 반해 분홍빛 복사꽃은 도회의 은성한 불빛마냥 화려하게 산중 도량을 외호하고 있다.

스님의 거처에 들어서자 시계 바늘이 한 오십년은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미타불이 모셔진 그 공간은 법당이자 스님의 수행처이자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날살과 씨살을 대충 얽어매어 만든 창호문, 짚으로 만든 씨앗통, 벽에 걸린 낡은 삿갓 등등. 낡아서 소박해서 단순해서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있다. 법연 스님께 삼배를 올리려는데 손사래를 친다. 봉암사 입구에서 한 노장스님이 꼬챙이로 하수구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법연 스님이라 깜짝 놀랐다. 아이구 송구스러워라, 사진까지 찰깍 하고 찍었는데….

“옛날에는 신발을 아예 안에 들여놓고 살았어. 신도들이 찾아오면 차라도 같이 마셔야 하고, 그런 번잡한 것이 싫어서 될 수 있으면 반연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아예 신발을 안으로 들여다 놓고 공부하셨다는 말씀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백련암 찾는다고 좀 헤매었어요. 무조건 열심히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최소한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야 되겠더라고요.”

“그렇지. 동방으로 가야하는데 서방으로 가고 있으면서 무조건 열심히 간다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나 가야지. 오늘 그것 하나만 알고 가도 봉암사에 온 보람이 있어. 그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을 거야.”

법연 스님을 찾아뵙고 뜻하지 않게 좌우명을 받았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스님은 점심공양 시간도 지났으니 배고프겠다면서 곶감을 내주었다. ‘곶감이 달고 맛있다’ 했더니 스님은 웃으시면서 ‘야단맞은 곶감’이라 한다.

“예년에 비해 감나무에 감이 영 안 달린 것 같아서 과실수가 열매도 못 맺는다고 막 야단을 쳤어. 그렇게 욕을 하고 나서 며칠 후에 봤더니 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거라. 내가 잘못 본 거지. 감나무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내가 잘못 봐가지고 야단을 쳤으니 이젠 마음을 풀게’하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어. 감나무도 사과를 받아들였겠지.”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나무에게 야단을 친 것도, 나무에게 잘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한 것도 ‘감나무에게 불성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주 선사에게 한 스님이 “잣나무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조주 스님은 “있다”라고 답하지 않았던가.

법연 스님은 유복한 집안의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살에 동진출가 했다. 출가동기를 여쭈었더니 “우연히 절에 놀러갔는데, 어린 마음에 절이 참으로 좋아 보이데요. 그래서 며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절로 가버렸지. 출가랄 것도 없어”라고 하신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그머니 찾아간 절이 대둔사이며, 그렇게 시작한 수행생활이 육십여 년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낙산사, 상원사, 화암사에서 살기도 했지만, 봉암사에 바랑을 내려놓은 햇수가 사십년쯤 된단다. 법연 스님의 시간은 흘러만 간 것이 아니라, 백련암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있을 것이며, 돌배나무 꽃잎 속에서 자라고 있을 터이다. 무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스님은 꿈쩍 않고 그렇게 한 자리에서 공부를 일구어 내신 것이다. 봉암사에만 왜 그렇게 오래 살았느냐고 여쭈었다

“저 돌바우와 나무들이 훨씬 더 오래됐어. 여기만큼 수행하기에 더 좋은 곳이 안보이데요. 난 게을러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를 못해.”

스님의 공부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수행하실 때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다”고 했더니 “난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 몰라. 목숨 떼놓고 공부 못한 것이 후회가 돼”라고 하신다. 스님은 자신의 공부가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단다. 법연 스님은 많은 수좌 스님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터이다. 그런데도 당신의 공부는 입 밖에 내지 않으시려 한다. 스님께서 따라주신 차를 말없이 마시다가 무슨 화두를 참구하시는지 궁금하여 또 다시 여쭈었다.

“천지가 화두라!”

천지(天地)에 화두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에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제비꽃도, 조팝나무도, 바위도, 하늘의 구름도, 여름날의 태풍도, 한 겨울의 눈보라까지도 이 모든 것이 다 법연 스님에게는 화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법문이 팔만사천가지인데, 그것은 수행 방법이 팔만사천가지인 것이라. 사람들은 화두가 아니면 성불하지 못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는 않아. 그 대신 바로 딱 깨달으면 화두참선이 가장 빠르지. 화두참선이 들어오기 전 신라에도 도인(道人)이 많았음을 생각할 때 간화선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해요. <육조단경>에 보면 최상근기라야 참선을 한다고 했어. 누구나 생각만 내면 최상근기가 되는 것이지. 보통 자신은 하근기라서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데, 상근기 하근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녀. 자신이 상근기라 생각하면 그 순간 상근기인 것이고, 나는 하열(下劣)하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하근기인 것이지. 내가 최상근기라 생각하고 화두 들면 그만큼 공부도 잘되는 것이여. 공부에는 승속이 없어. 승속을 떠나서 누구나 다 열심히 하면 부처님처럼 대자유인이 될 수 있어.”

법연 스님은 어느 수행법에 집착해 구속되는 법박(法縛) 또한 조심해야 할 것이라 했다.


“아는 길을 가는 것은 쉽지만 모르는 길을 가면 어려운 것처럼 부처님 법도 그와 같아요. 평소에 자신이 많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좋지요. 화두를 들던지, 염불을 하던지, 다라니를 하던지 무엇이든 일념(一念)으로 하면 됩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낯설고 물설은 절집에 살면서 세속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세속의 삶이 궁금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고 벌써 절집을 나가겠지”라고 하신다.

“요즈음은 행자들이 늦은 나이에 들어와서 중물을 들이기도 전에 나가버리는데, 그것이 안타까워요. 절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신심이 없으면 못사는 곳이지. 신심이 없으면 공부도 안 되고, 공부 안하면 절에 살 이유가 없지. 공부도 안하면서 절에 사는 것은 큰 빚지는 것이야. 절에 있는 것은 모두 비싼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요만한 작은 것 갖다 바치고도 큰 것을 바라니 시주물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몰라요. 내 노력으로 번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시주로 사는 것이니 그것은 무서운 것이지. 오죽하면 옛 어른들은 ‘견성성불 못하면 시주물 한 방울도 소화 못시킨다’고 했을까.”

부처님 전에 올리는 시주물에는 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을뿐더러, 바라는 마음이 시주물보다 백배 천배가 많기 때문에 시주물은 비싼 거란다. 법연 스님은 정지간(淨地間)이 있어도 직접 밥을 해 드시지 않고 큰절에서 대중들과 함께 공양한다. 밥을 해먹기 시작하면 다음을 위해서 무언가를 비축해두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필요 없는 것에도 욕심을 내게 되고 그러한 마음씀이 번거롭다고 한다.

출가하신지 두해가 모자라는 육십 년째이다. 백련암도 선기(禪氣)에 물들어 있는데, 암주인 법연 스님의 높고도 맑은 선기에 대해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싶다. 그래서 여쭈었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은 없었는지.

“색심(色心)은 생사의 근본이기에 부처님이 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요. 팔지 보살 정도 올라가야 그런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요. 조사스님들께 일일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색심이 완전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여. 단지 수행에 의해서 자제하고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지.”

법연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처음과 끝이 같은 분’이며 ‘안과 밖이 같은 분’이라 한다. 안과 밖이 같기에 속내를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는다.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울력이 있을 때면 몸을 아끼지 않는다. 봉암사가 이만한 사격을 갖추는데 거의 사십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법연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여일하게 두는 것이 참선”이라 생각하기에 좌선 대신 울력을 한다 해도 공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일반사람들이 조사어록을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맞고 틀림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여. 조사어록은 깨달은 분상에서 말했기에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조리에 맞는 말이고, 앞뒤가 맞는 말이지. 어린이에게 어른의 말을 하면 못 알아듣는 것과 같이, 선어록은 깨달은 사람끼리 주고받은 말이기에 일반인들이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지.”

공안이 천칠백 가지나 되는 것은 의심하라고 해 준 말이 아니란다. 깨달은 사람들이 알아듣게 말을 해주어도 듣는 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자꾸 의심하다 보니 화두가 된 것이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여쭈었더니 웃으시면서 “숨쉬고 사세요”라고 한다.

“요즈음 세상을 보면 내 주장보다는 남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 남의 말에 끄달린다는 것은 내 주관이 없다는 것이지. 그러면 자유인이 되기 어려운 것이라. 상대방이 나에게 시비를 해도 상관치 않고 자신의 일만 한다면 시비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지.”

스님은 ‘선물’이라는 부처님 법문을 들려주셨다.

어느 날 외도가 와서 부처님을 비방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 비방을 다 듣고 있었다. 외도의 욕설이 다 끝나자 부처님께서 물었다.
“당신은 손님이 찾아와서 선물을 주면 어떻게 하느냐?”
“선물을 주면 받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선물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사람이 도로 가져가겠지요.”
“나도 자네의 말을 하나도 받지 않겠네.”

법연 스님은 “사람들이 사회에서나 어디에서나 정해진 기본적인 규칙만 지켜도 이 세상은 벌써 극락이 됐을 텐데, 너무 과욕을 부려서 힘든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 끝에 “좋은 것이 오더라도 나쁜 것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곧 저녁공양시간이라면서 이젠 내려가란다. 스님은 군불이라도 때려는지 땔나무 몇 둥치를 안고 정지간으로 들어간다. 서녘 하늘은 금빛으로 빛나고 무심도인은 군불을 지피고, 봄날의 그림 같은 풍광이다.




법연 스님 약력

1943년 선산에서 출생. 아홉 살에 대둔사로 출가. 그 후 상주 남장사, 오대산 상원사, 낙산사, 화암사에서 수행정진했다. 지금은 문경 봉암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으며, 봉암사에 머문 지 사십 년이 된다.
문윤정 논설위원(수필가) | un82@buddhapia.com
2009-05-09 오전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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