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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206m의 문수산 정상 바로 아래 언덕을 연화대로 삼아 웅장하게 자리 잡은 축서사. 중앙고속도로에서 풍기IC로 나와서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에서 시골길로 다시 8km를 더 들어간 오지에 위치해 있다. 가파르진 않지만, 꼬불꼬불한 산길이 길게 이어지다 보니 급기야 10년 넘은 승용차 본네트에서 연기가 난다. 다행이 절에 막 도착해서 차량을 점검하니, 엔진오일이 새어나와 가열된 배기통에 떨어져서 연기가 난 것이었다. 불 타는 세간에서 허겁지겁 살다가 청정도량에 준비 없이 들어온 온 티를 내고 말았다.
2년만에 다시 방문한 축서사는 이제 도량정비 불사가 마무리 되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매달 셋째 주말엔 재가 선객 200여 명이 철야참선법회에 참석할 정도로 이젠 전국에서도 이름난 참선전문도량이 되었다. 축서사가 이처럼 재가 선객의 총림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원장 무여 스님의 10여 년 간의 중창불사가 오로지 출ㆍ재가를 위한 수행 및 교육공간의 조성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동안 틈틈이 진행한 재가자 참선교육은 입소문을 타고 수행자를 모이게 한 원인이 됐다. 선지식의 선법문과 실참, 문답 및 지도점검 등이 동시에 이뤄지는 보기 드문 참선도량이란 인식이 소리 소문 없이 자리 잡은 결과다.
오물 하나 없이 말끔하게 비질이 된 도량은 그야말로 무여 스님의 맑고 고요한 성품을 드러낸다. 훌륭한 선지식과 편안하고 청정한 도량, 좋은 도반이 있는 이런 수행처라면 구도자들은 타는 목마름를 적시기 위해 수 백, 수 천리 길을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축서사를 내려다 보는 곳, 작지만 맵시 있는 소나무가 반기는 뜰을 지나 선원장실에서 스님을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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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도량 정비가 마무리되어 더 많은 수행자들이 방문해 편안히 정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이제 후원채 한 동을 빼곤 완성된 셈이지요.”
-매달 축서사 참선법회에 수행자들이 많이 오는 걸 보면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2000년도부터 조계종에서 간화선 보급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재가자들의 관심과 요구도 높아진 듯 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웰빙 바람이 분 것도 한 요인인데, 웰빙이 되려면 결국 선(禪)을 해야 한다고 봐요.”
-재가자들이 참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반대로, 어렵다고 포기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인이 선(禪)에 깊이 들어가는 게 어렵다고들 하는데, 사실 선이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마음을 담담하게 해서 번뇌망상을 피우지 말고 안정된 상태에서 ‘어째서 무(無)라 했을꼬?’‘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을꼬?’ 하면 의심이 납니다. 비록 강하고 진정한 의심은 아니지만 계속 의심을 꾸준히 지어가다 보면 참다운 의정이 생겨 화두 드는 재미가 쏙쏙 나게 됩니다. 그것이 간절하게 한결 같이 익어지면 좌선을 안 해도, 일부러 화두를 안 챙겨도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늘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지속되게 됩니다. 화두를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담담하고 설레이듯이 기분 좋게, 이것뿐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하면 의외로 쉬운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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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은 특히 스승과 수행법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정도에 따라 공부 정도가 달라질 정도로 아주 중요하지요. 스승으로 인해 눈을 뜨고 화두도 들게 되고 진정한 공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은사 (희섭) 스님은 말씀이 없는 분이라 행동으로 가르치고 지도하셨어요. ‘잘 살아야 된다. 진정한 출가인이 되어 불법의 핵심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수시로 간곡히 당부하셨지요.”
-할아버지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보문 스님은 늦게 출가하셨지만 선승으로 유명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스님과 결사에 동참하셨고 제방선원에서 정진을 잘 하셔서 숨은 도인이란 칭송도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행자 때부터 곧바로 참선정진을 시작하셨는데,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시면서 기억에 나는 큰스님이나 가르침이 계시다면.
“향곡 스님의 영향이 가장 컸어요. 선방에 들어간 지 5년만에 원래 관음사(현재 묘관음사) 조실 향곡 스님을 모시고 정진했어요. 몇 철을 나고 해제 철에 다른 분들은 만행 떠나고 혼자 큰방에 남아 정진했는데, 큰스님께서 수시로 들어와 함께 좌선하곤 했어요. 때로 저녁 늦게 들어오셔서 제가 졸면 야단을 치곤 하셨지요. 어느 땐 당신 방에 오라 하셔서 여러 큰스님들의 일화와 공부담을 들려주셨는데, 직간접적으로 큰 도움이 됐어요. 요샌 어록도 많고 법문도 많이 들을 수 있지만, 당시엔 <선관책진>이 유일하게 번역된 선어록일 정도였으니까요. 조사스님들이나 노장님들의 수행담을 들을 때면 신심이 났는데,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곤 해요.”
-다른 큰스님들과의 인연담을 들려주신다면.
“성철, 경봉, 춘성, 구산, 서암, 서옹, 탄허, 석주 큰스님을 곁에서 모시고 살아봤습니다. 해제철만 되면 유명한 선지식들을 찾아가 가까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극도 받고 경책도 받으러 애를 썼어요. 해제 때는 의례히 경책 받으러 다닐 작정을 했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큰스님은 어떤 분 이셨나요?
“춘성 스님은 가장 남성적인 선승이셨어요. 옛날 조사스님들처럼 전설적인, 걸출한 분이셨지요. 해제철에 수좌 한 분이랑 세 분이 함께 망월사에서 산 적이 있어요. 선방에는 이불 자체가 없는데, 9시만 되면 춘성 스님은 탁자 밑의 목침을 꺼내 주무시곤 했어요. 그런데 12시만 되면 깨어나셔서 새벽 내내 앉아 계시곤 하셨어요. 칠순 어르신이 주지방도 따로 없이 함께 생활하셨는데, 그 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선어(禪語) 였어요. ‘욕쟁이 스님’이란 별명을 들으셨지만, 욕이 바로 직설적으로 하는 선어였지요. 스님은 평소에는 대승적으로 너그럽고 활달하시지만 사리판단 하실 때는 대단히 분명하셨어요. 한 번은 정진을 게을리 하고 밤새 절밖에서 놀다 들어온 수좌를 물에 처박아넣고 부목 옷을 입혀 산문 출송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정도예요. 그분은 기분이 좋을 때면 “씨부럴!”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날 망월사로 올라오기 전 냇가에서 한 수좌가 빨래를 한 후 발가벗고 좌선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하신 적이 있어요. 나중에 공부 잘 한 그 수좌가 선방을 떠날 때 종불사를 하기 위해 모아 둔 불사금을 몽땅 하사할 정도로 수행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셨지요. 절약하며 모아 둔 불사금을 전부 주시고선, “아~ 씨벌! 종불사 잘 했다” 하신 그런 분이 춘성 스님이셨어요. 가까이서 뵈니까 참 매력적인 분이셨고 감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공부가 잘 되어 힘을 얻으신 때는 언제셨나요?
“1970년경 오대산 북대에서 혼자 2년을 난 적이 있어요. 드러내놓긴 뭐하지만 아득한 나만의 추억이라고나 할까요. 겨울에는 무척 추워서 부엌에서 불을 때고 변도 집안에서 봤어요. 밥은 큰 솥에다 한 20인 분 정도 해놓고 배고플 때 마다 언 것을 녹여서 먹곤 했어요. 한겨울에는 굴뚝새 여섯 마리가 방에 들어와 함께 겨울을 난 적이 있어요. 토굴 뒤에는 멧돼지 가족이 배가 고파 오곤 했는데, 굶어죽을 것 같아 무우랑 밥지꺼기를 주며 같이 산 적도 있어요. 토굴수행은 잠자는 시간이나 울력시간이 관계 없이 24시간 밀어붙이고 싶을 때 한 두 철 할만 하지만, 웬만하면 대중생활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대산 북대에서 날 때가 공부 맛을 느끼고 수행의 보람과 행복을 비로소 느낀 때 였지요.”
-오랜 수행과정에서 힘들거나 좌절한 적은 없으셨나요.
“고비도 있었지만 출가동기가 확실했으니까 밑바탕에 참고 견디는 힘이 있었어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길이냐?’ 이런 고민을 안고 독서와 사색으로 하얀 밤을 지새운 젊은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발심 못 하면 이 공부 하기 어렵다’고 하잖아요? 오직 할 일은 이것 뿐이다. 오직 정진위주로 나아가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건 저절로 사라지게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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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성철 스님이 강조한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를 통한 구경각의 증득이란 수행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압니다. 지난 해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해 어느 분이 ‘오와 매를 나누는 것이 이미 분별심이라 하면서,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 논쟁이 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어 공부가 잘 되면 몽중일여와 오매일여의 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깨치기도 합니다. 오매일여 단계를 지나갔는데, 못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원을 지나 서울 가는 분이 대부분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바로 서울로 가는 분도 있겠지요. 그런 분에게는 ‘오매일여’란 말도 군더더기일 수 있겠지만, 육조혜능 대사와 같은 훤출한 종교적 천재가 아니고서는 바로 서울 가는 분이 극히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라톤에서도 극한의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골인 할 수 있듯이 가장 어려운 ‘오매일여’ 단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확철대오 하기 위해서는 오매일여의 선정에는 들어야 하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은산철벽을 투과해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 해야 드디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도달해야 생사자재(生死自在),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경제난이라든지 일에서 오는 각종 스트레스나 번뇌망상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자기계발서에서는 ‘비움’이나 ‘쉼’을 강조하는 책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선(禪)의 핵심을 쉽고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 같습니다.
“수행법이란 한 마디로 ‘(마음) 비우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공 스님께서는 ‘장맛만 알아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마음을 비운다, 쉰다, 놓는다, 고요히 한다고 하는 것은 일체 잡스런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인데 아주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고인(故人)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쉽다’고 하기도 하셨지만, 분주한 현대인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튼 비우는 것이 시작이고, 비워져야 고요해지고, 담담한 고요와 안정 속에서 화두나 염불 정진이 잘 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을 우리 바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바다가 고요할 때는 잔잔하지요. 하지만 이 바다에 파도가 치고 태풍이 불어올 때는 1미터 앞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일체의 번뇌망상을 걷어내야 마음이 밝고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깨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천번 쉬고 만번 쉬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바로 쉬면 깨치는 겁니다. 쉬면 근본 자성이 바로 드러납니다. 임제 스님도 ‘쉬면 바로 그 자리가 청정법신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면 그 자리가 부처요, 열반입니다. 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망상이 사라진 자리, 생사초탈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쉽게 마음을 비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번뇌망상으로 똘똘 뭉쳐 있어 움직이거나 입을 열면 번뇌망상이 곧바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요즘은 책이나 매스컴을 통해 지식을 많이 습득합니다만 근본 자성에서 보면 이 지식들이 바로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요인입니다. 그러니 현대인, 지식인일수록 더 많이 비워야 합니다.”
-경제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안심(安心)을 얻는 방법을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우리 국민은 너무 민감한 것 같아요. 글로벌 장기 불황으로 인한 국내 경제난이 예전 보리고개 시절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닌데, 체감 고통은 더 큰 것 같아요. 너무 동요하고 쩔쩔 매고 괴로워하는 거죠. 10여 년 전 경기가 좋을 때 국민소득 2만불에 진입하기 전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매스콤이 국민을 너무 선동해서 좌지우지 해요. 사람들이 주변의 변화와 어려움에도 초연하게 동요됨 없이 당당하게 소신껏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해요. 평소 마음가짐이 안정된 상태이면 불안이나 괴로움이 적어요. 그러니 국민들이 마음을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정신과 육체가 평화로워지면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롭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마음이 안락하면 집중도 잘 되고 어떤 일이든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스님과 불자님들께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면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곳에 따라 주인노릇 하면 선 곳이 바로 진리 자체다’ 그런 마음으로 사세요. 어디 가도 나그네가 아닌 주인이란 마음가짐으로 내 것, 내 일처럼 여기며 임할 때 그 자리가 바로 진리입니다. 오직 마주한 일에 빠지듯이 주인정신을 갖고 일한다면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고 능력을 제대로 드러내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은 번지르 하면서도 인격과 삶이 대중의 사표가 되지 못하는 사이비(似而非) 스승들이 적지 않다. 무여 스님을 뵐 때마다 한없이 자비롭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스승의 덕을 느끼게 된다. 스님과 같은 지혜와 자비,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을 두루 갖추고 언행이 일치되는 존경받는 우리 시대의 문수보살이 끝없이 출현하길 기원하면서 문수산을 내려왔다.
무여 스님은
1940년 김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조계사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듣고 발심, 26세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6년 이후부터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관음사 해인사 등 제방선원에서 20여년 동안 정진했으며, 칠불사 망월사에서 선원장을 지냈다. 1988년부터 문수산 축서사에 주석하며 중창불사에 매진해 참선전문 교육도량으로 탈바꿈시켰다. 조계종 초대 기초선원 운영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운영위원으로서 후학 양성과 선의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