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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십리 길을 달려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 앞에 섰다. 한 호흡 가다듬고 산문에 들어서자 곱상하게 생긴 두 장승이 반갑게 맞이한다. 장승은 “이 문에 들어올 때는 덧없는 알음알이는 버리고 한 마음 돌이켜 자기 존재의 실상을 밝혀라(入此門內 莫存知解)”는 경구를 들고 있다. 세간의 시시비비를 내려놓고 산문에 들라는 가르침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이 세 개의 문을 세워 둔 것은 마음속에서 들끓던 번뇌망상을 하나씩 내려놓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송광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였던 가지산문을 개창한 신라의 보조국사 체징(普照國師 體澄)스님이 세웠다고 하니 아득한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그 앞에서 시간을 헤아린다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싶다. 보조국사 체징 스님은 중국으로 건너가 전국의 선지식을 만났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삼 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가지산문을 열고 승속을 초월하여 널리 법을 폈다. 체징 스님의 명성을 듣고 왕이 두 번이나 궁으로 청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법을 펴는데 일생을 바쳤으니 그 제자가 팔백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한때 폐허가 되었지만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덕화로 중창 복원되었다는 것이 송광사가 지닌 역사 중 한토막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아(亞)자모양의 종고루와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나한전, 극락전, 적묵당 등 넓은 대지에 펼쳐진 당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지 한 자락 씩 차지하고 있는 당우들의 배치가 군더더기 없이 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주지 도영 스님이 당우들을 재배치했다고 한다. ‘근육질로 다져진 금강역사의 힘을 빌어서 당우들을 앞뒤로 옮겼으면’하는 농담쯤으로 들으려고 했더니 아니란다. 신기술을 이용하여 진짜로 당우들을 옮겼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이쯤 되면 도영 스님이 금강역사로 비쳐진다.
도영 스님 처소 앞에 홍매와 백매가 쌍을 이루어 불을 밝힌 듯 환하게 피어있다. 한겨울의 추위와 눈보라를 이기고 나온 귀한 꽃이라 오랫동안 눈맞춤했다. 사무치는 향기 속에, 겹겹의 꽃잎 속에는 인고의 시간이 녹아있음을 어찌 모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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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다들 어렵다는 소리 밖에 하지 않는데, 나는 보릿고개도 겪었고 어릴 때부터 힘든 것을 다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지금의 어려움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렵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됐어’하고 지족(知足)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야.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 뚫린 항아리와 같은데 그것을 채우려고 하니 어리석지요.”
도영 스님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면서 “석주 스님이 써주신 글인데, 이 방에 오는 사람에게는 꼭 한번 읽어보라”고 한단다.
지족상락 능인자안(知足常樂 能忍自安),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고 능히 참으면 편안함을 안다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자신이 미리 작성해 두잖아요. 경제력도 있어야겠고 뭐 명예도 좀 있어야 하고 참으로 많은 조건이 따라 붙는데, 그것이 잘못된 거라. 행복은 내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하고 내 조건 안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이지, 바깥에서 구하려고 하면 얻을 수가 없어요. 가족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음이 행복하고, 힘들지만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음을 행복이라 여기면 하루에도 수없이 감사할 일이 생기고 행복한 일만 벌어져요. 한 번 그렇게 해보세요.”
도영 스님은 2001년 포교원장 소임을 맡아 처음으로 5년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났기에 또 포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기에 아직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스님은 이런 소리는 귓등으로 넘겨버리고 “개인적으로는 아주 바쁘게 살았던 그때가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짧게 언급할 뿐이다. 5년의 임기 동안 일구어놓은 것을 일일이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신도교육의 체계화와 군포교를 널리 확산시켰다는 것 그리고 템플스테이 사찰주말수련회 프로그램을 활성화하여 사찰의 문턱을 낮추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스님은 1980년에 김제 금산사 주지소임을 맡으면서 포교 원력을 세운 분으로 말사 주지스님들에게도 ‘포교를 하지 않으려면 주지직을 내놓으라’고 했을 정도이다.
“저는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21세기의 대안이라 생각하기에 불교를 널리 알리고 싶어요. 불교의 연기법, 동체대비사상, 불이(不二)사상을 알게 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포교이고 교육인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으로 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저는 포교를 하면서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아요. 불교로 인해 좀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자신의 바른 길을 찾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한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군인장병들에게 수계를 해주고 있는데, 수계를 받은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는 불교가 남아있어요. 이것이 인연이 되어 불자가 된다면 더더욱 좋겠지요.”
저마다 부처 씨앗이 함장 되어 있음을 모르는 이에게 다시 한 번 씨를 묻어주는 것이 포교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스님은 씨앗이 발아하여 언젠가는 꽃으로 화하게 될 그때가 올지 아니 올지를 말하지 않는다.
도영 스님의 ‘초코파이 법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법문이기에 일부러 청했다. 1985년 연무대에 처음으로 법문을 하러 간 것이 군포교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군포교를 열심히 하다 보니 초코파이 법문까지 생겨 난 것이다.
“아직도 군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초코파이인데 보관하기 좋고, 한 개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고 그래요. 초코파이 큰 것 한 상자가 라면박스 크기인데 그 안에 8박스가 들었으니 팔정도(八正道)를 닦아라. 작은 한 박스 안에는 12개가 들었으니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관하라. 큰 박스 안에 든 초코파이 개수를 더하면 96개가 되는데 이것을 세 개씩 나누어 먹으면 32사람이 먹을 수 있으니 삼십이관음(三十二觀音)이요, 부처님의 32상입니다. 그리고 96개를 2개씩 나누어 먹으면 48사람이 먹을 수 있으니, 법장비구의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을 이루어 극락세계를 만들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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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한 상자 속에 불교의 기본교리가 다 담겨있으니 진정 살아있는 법문이 아닌가 싶다. ‘포교는 수행자라면 끝없이 해야 하는 소명’이라 여기는 도영 스님의 간절한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법문이다. 부처님의 삶 자체가 전도여행이었음을 생각할 때 포교는 모든 불자들의 소명이기도 하다. 스님을 마주하고 있으니 “떠나거라. 한 길로 두 사람이 가지마라”고 한 부처님 말씀이 더욱 오롯하게 다가온다.
칠십 평생을 대나무처럼 곧고도 반듯하게 수행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 비롯됨이 내심 궁금했다. 유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남에게 큰 이익을 줄 수는 없다 해도 피해는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그것이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불자들이 어떻게 하면 올곧은 신심을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깊은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일생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을 그것에 접목시켜 살아간다면 날마다 좋은 모습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자기의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어요. 타인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내 업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은 자기 문제는 스스로 해결이 되어야지 외부에서 해결하려 해서는 안 풀리지. 누구 때문에 경제가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우리는 공업중생(共業衆生)이기 때문에 같이 고통을 안고 나가야 합니다. 업은 자신만의 업이 아니며 타인의 업이 곧 나의 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지은 업을 서로 공유하고 있어요. 때문에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해요.”
집즉분명 천지야 방내진찰 무비아(執卽分明 天地也 方乃塵刹 無非我)
하늘과 땅이 분명하다고 집착하지만
놓아버리면 티끌 하나까지도 나 아닌 것이 없다
“이 말은 방하착(放下着)하라는 겁니다. 놓아버리게 되면 하늘은 그냥 하늘이고 땅은 그냥 땅에 지나지 않으니 일체를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사상입니다. 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이 세상 티끌 하나라도 나 아닌 게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모두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인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어요? 남을 원망하고 쓸데없는 곳에 화를 품는 것도 죄업 짓는 것이니 그냥 ‘탁’하고 놓아버려야 해요. 놓아버리면 저 티끌에서부터 온 시방이 나 아닌 것이 없을 터인데......”
도영 스님은 당신은 전생부터 불교와 지중한 연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하루는 백양사에서 탁발 나온 스님이 있었는데 어린 눈에 참으로 훌륭해 보이더란다.
“스님이 오십호 정도 되는 마을을 집집마다 들러서 탁발을 하시는데 그때 목탁소리며 염불소리가 하두 좋아 끝까지 따라다녔지. 그때 어린 마음에 나도 커면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어.”
도영 스님은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낯설지 않고 편하게 다가온 것은 다 전생에 불연이 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면서 환한 웃음을 짓는다. 금산사로 출가한 도영 스님은 월주 스님을 은사로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무섭기로 소문난 금오 스님으로부터 야단맞은 일은 없는지 물었더니 머리 깎은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불교 정화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통합종단이 등장한 직후인데, 대선사인 금오 스님은 참선 중심의 수행도량으로 불교가 재정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분이었어. 정화를 하긴 했는데 스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금산사 대중 스님 서른 명을 비롯하여 여타 지역의 스님들을 이끌고 서울 조계사로 올라가는 길이었지. 그때 나는 누군가 절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슬며시 뒤로 빠져나와 금산사로 돌아왔지. 그런데 금오 스님께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하시면서 이십 리 길을 도로 내쳐 오신거야. ‘도영이 이놈 잡히면 때려죽인다’며 엄포까지 놓았으니 대중 스님들 모두 가슴을 졸였지. 금오 스님의 벼락같은 소리에 겁에 질려 있는데 어디선가 대중 스님 한 분이 달려와서 장삼을 건네면서 ''장삼 가지러 갔다고 말하고 참회해''라고 일러주시는 거야. 금오 스님을 모시면서 수행자로서 살아가야 할 많은 것을 배웠지.”
도영 스님이 이곳 송광사 주지 소임을 맡아 왔을 때만 해도 쇠락한 고찰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송광사는 전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낼 만큼 그 세가 커졌고 활기 넘친다. 이곳 사람들은 ‘전주의 정서와 문화를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사찰이 단순히 예배하는 공간이나 박재된 문화재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도영 스님은 송광사 주지 소임을 맡자마자 ‘문화재관람료 매표소’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대웅전과 마주하는 곳에 세심정(洗心亭)을 세우는 등 공원처럼 가꾸어서 누구나 오고 싶은 아름다운 사찰로 바꾸어놓았다.
작년에는 사찰 바로 옆에 오천 평이나 되는 백련지(白蓮池)를 조성했는데, 이 또한 사찰을 지역의 문화공간과 마음의 쉼터로 만들기 위함이다. 도영 스님은 “부처님의 진리는 변함없지만 그 전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졌기에 어느 곳에서 어떤 소임을 맡더라도 불교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또한 어느 세기보다 물질의 풍요를 한껏 누리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한데서 파생되어 나오는 병폐가 심각함을 스님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눈으로 세상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그에 맞는 처방을 내놓는 스님의 통찰력에 감탄할 뿐이다. 오로지 전법에만 열을 쏟았다는 보조국사 체징 스님의 후신이 아닌지 모르겠다.
스님의 따스한 눈빛과 햇빛 그리고 빗님과 바람이 도와 송광사 일대는 몇 달 후면 하얀 연꽃 향기로 가득 하겠지. 바람 한 줄기가 그 연꽃 향기를 데려다 주리라.
도영 스님 약력
1961년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69년 금산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동국대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80년, 1984년, 1994년 세 번에 걸쳐 금산사 주지역임. 조계종 종회의원 역임. 1999년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 조계종 포교원장 역임. 지금은 완주 송광사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