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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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환경 좋아졌는데 공부는 더 안해”
[선지식을 찾아서] 백운 스님(미륵사 회주)



부산 구포역에 내리니 비가 흩날렸다. 봄비라고는 하지만 볼에 와 닿는 바람은 차가웠고 신산스러웠다. 스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여기는 지금 바람 불고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 올라오기가 힘들 텐데...”라고 걱정하시면서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보살 한 사람을 내려 보냈다고 하셨다. 마중 나온 보살의 차를 타고 미륵부처님이 상주한다는 미륵사로 향했다. 금정산 초입을 벗어나자 누군가 무심하게 부려 놓은 것처럼 커다란 바위덩어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금정산을 일러 ‘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가 뒤덮고 있다’하여 천구만별(天龜萬鼈)이라 불리는 그 연유를 알 것 같았다. 비포장도로로 한참을 달린 차는 바리케이드가 쳐진 곳에 멈추었다. 산을 보호하기 위해 시에서 그런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이다.

미륵사 보살은 준비해온 비옷을 내밀었다. 비옷을 입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서 차에서 내렸지만, 세찬 비바람에 금방 기가 꺾여버렸다. 맑은 날에는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이런 날에는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산길을 조금 올라가자, 바람은 돌풍으로 변해 세상을 삼켜버릴 듯 거세었다. 거센 바람소리는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귀청을 때렸다. 바람소리는 금정산의 나무들이 저마다 내지르는 아우성처럼 들리기도 한다. 문득 천지가 뒤집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12㎏이 넘는 카메라 가방을 매고서 걷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를 절로 착각하여 다 온줄 알고 좋아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바위덩이였다. 온 몸은 비에 흠뻑 젖었고, 얼굴을 타고 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원효 스님은 ‘무슨 까닭으로 이런 험난한 곳에 절을 세운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올랐다. 원효스님은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라 했다. ‘일체 분별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이 마음을 보지 않는다면 얻을 만한 상(相)이 없다’고 했다.

비바람을 뚫고 미륵사에 도착하니 돌 속에 지은 ‘염화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염화전 뒤편의 거대한 바위는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로 불리고 있다. 이 좌선바위 뒤편에는 미륵불과 닮은 바위가 있는데, 이 두 바위를 조합해서보면 스님이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니 원효스님의 남다른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백운 스님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시면서 이 우중(雨中)에 볼 것도 없는 산승을 뭣 하러 만나러왔느냐고 핀잔을 준다. 스님은 다리도 불편하신데 이 험한 산길을 어떻게 오르내리느냐고 했더니 “죽을 맛이여! 올라오면 내려가기 싫고 내려가면 올라오기 싫어져.”라면서 웃으신다. 요즈음 은사인 동산 스님의 일대기를 집필하고 있는데, 건강이 따라주지 못해 전에만 못하단다. 삼년 전에 뇌졸중이 와서 한쪽 수족이 자유롭지 못해서 한동안 글도 못쓰고 고생했지만, 이젠 그럭저럭 회복되었다고 한다.


백운 스님의 방에는 책상 양 옆으로 붓글씨로 청산(靑山), 백운(白雲)이라고 써서 붙여놓았다. 어디에서 살던지 푸르른 산에 말없이 걸렸다가 말없이 지나가는 흰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게 살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아니겠는가 싶다. 스님은 범어사 주지자리가 와도 “난 주지 하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야. 강원에서 17년간 강주 노릇한 것도 억울한데 마음공부 해야지.”하면서 마다했기에 법호처럼 하늘의 뜬구름처럼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것이리라.

백운 스님은 17년간 화엄사, 범어사, 송광사 등 큰 절의 강주로 지내온 강백이자, 불교 집안에서 처음으로 스님의 신분으로 소설을 쓴 소설가이다. 서산 대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편양언기 선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양치는 성자>는 백운 스님의 첫 작품으로 많은 이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편양 선사는 깨달음을 증득한 후 오랫동안 보림 기간을 통해 양치기와 거지왕초로 자비행을 실천한 독특한 이력의 스님인데 이러한 행적이 백운 스님에게는 참으로 위대하게 보였기에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백운 스님 또한 소탈하고 꾸밈이 없다. 백운 스님은 한국 불교사에 자취를 남긴 선사들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전기 형식으로 엮어내고 있는데, 펴낸 책을 꼽아 보면 <백파 선사>, <진묵대사>, <성월 대선사>, <부설거사>, <만암문집>, <인곡문집> 등이 있다.

스님은 범어사 5대 중창주인 성월 스님의 일대기인 <성월대선사>를 보여주시면서 “내가 동산 스님을 4년 정도 시봉한 일이 있는데, 그때 은사 스님께서 성월 노사이야기를 많이 하셨어. 용성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지만, 성월 스님도 은사와 다름없기에 동산 스님 일대기보다 먼저 펴냈어. 김구선생이 내려와서 그러는데, 성월 스님이 대한민국 독립자금 제일 많이 낸 분이라고 하데.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어.”

소설을 비롯하여 이런 글을 쓰게 된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유명한 점쟁이에게 내 사주를 물었더니,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겠다는 괘가 나왔어. 단명할 사주를 바꾸려면 절물을 먹으면 된다고 해서 다섯 살에 화방사에 들어가서 아홉 살까지 살았어. 그때 노스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방선하고 나면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면 원효스님, 사명대사, 오조법사 등 고승들의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어. 그때 들은 것이 바탕이 되었겠지.”

열다섯 살까지 절물을 먹어야 하는데 육년을 앞세워 나왔더니 죽을 고비를 여섯 번이나 넘겼다고 하시면서 인과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육이오 전쟁이 난 다음 해에 제 2대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하던 아버지는 빨갱이에게 학살당했고, 백운 스님도 그 여파로 세 번이나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때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나타나 살려주었다. 그 후 한 번은 늑막염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 번은 회약을 먹었는데 회충이 위장을 뚫고 올라와서, 또 한 번은 교통사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뻔했는데 용케도 살아났다고 했다.


“사람들이 인과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사는데, 어느 생에서라도 다 받게 되어있어요. 인과에 대한 응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피할 수가 없어요.”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이해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여쭈었더니 동산 스님으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서리 이고 있는 소나무의 깨끗한 지조(霜松潔操)
물속의 달은 옷깃이 비었더라!(水月虛襟).

“동산 스님께서는 이런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아 벽에 써놓고서 평생을 수행자로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꿋꿋하게 살다 가신 분입니다. 저는 어려운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은사 스님께서 감인대(堪忍待)의 가르침을 주셨듯이 견디고 참으며 기다렸어요. 세상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요. 그때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요.”

백운 스님은 동산 스님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총독부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의술공부를 하였던 동산 스님은 우연히 용성스님을 뵙게 되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 “인간의 신병은 의술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고치겠소?”라고 묻는 말씀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후 “불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병을 고치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가 되었다.

해방이 되던 해 우리나라 불교는 왜색불교의 혼탁으로 독신 수행 승려보다 취처를 한 승려가 더 많았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동산 스님은 오로지 정진으로 일관했다. 또한 참선납자들을 지도했으며 130명이 넘는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동산 스님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를 재미나게 들려주시기에 “스님은 정말로 소설가 기질을 타고 나셨다”고 했더니 빙긋 웃으신다.

이승만대통령은 약속시간보다 늦게 유엔군 사령관과 외국의 외교사절들과 함께 범어사를 방문했다. 대통령이은 범어사 대웅전 앞에서 참배도 않고 중절모를 벗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불상을 가리키며 뭐라고 설명을 하는 광경이 동산 스님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곧은 성품대로 동산 스님은 호통을 쳤다.

“소위 일국의 대통령이란 분이 불전에 와서 중절모를 쓰고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은 어디서 배운 예의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설명하고 있었다면서 즉석에서 사죄하고 법당에 삼배를 했어. 그러면서 ‘내 김구선생한테 호통을 들어봤지만, 이처럼 큰소리 듣기는 스님이 처음입니다.’라면서 스님을 존경한다고 했어. 이 인연으로 뒷날 내무부장관이었던 백성욱박사를 내려 보내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어요. 그 후로도 두 번이나 경무관을 보내 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했지만 은사 스님은 그때마다 ‘나는 산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어찌 정치를 하겠소. 승려는 산문을 지켜야하는 것이 할일이며, 부처님을 도외시하고 범어사를 떠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어요. 사람들은 불교의 위상을 높일 절호의 기회라면서 적극 권유했지만 다 물리쳤어요. 얼마나 멋있어요?”
당시 미8군사령관인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이 공군대위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가 실종되었다. 백방으로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범어사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로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벤 장군 내외를 대동하고 범어사로 내려왔다. 위령제를 마치고 돌아갈 때 동산 스님은 이대통령에게 대처승 정화에 대한 의지와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의 시초가 되었지. 동산 스님의 덕화가 이승만대통령을 감화시켰고 스님이 정화불사에 정진하고 계실 때 대통령이 무려 여덟 차례나 ‘대처를 한 왜색 승려들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유시를 내렸지. 이렇게 해서 정화운동이 성공하게 되었어.”

은사 스님의 마지막 작품을 적어주셨다. 스무 하룻날 이 작품을 적어주시고는 스무 사흗날 열반하셨다면서 스승을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가득하다.

상서로운 풀은 좋은 운수를 만들고(瑞草生嘉運)
숲 속의 꽃은 이른 봄을 가져온다.(林花結早春)

세수 팔순을 넘으신 백운 스님은 근현대불교역사의 산증인이기에 훤히 꿰고 계신다. 동산 스님께서 갖은 핍박과 고난을 겪으면서 세운 종단이기에 후학들에게 열심히 정진하고 또 정진할 것을 당부할 뿐이란다.

“요즈음 승속을 막론하고 살기가 참으로 좋아졌어요. 좋아진 환경 속에서 더욱 공부를 잘해야 할 것인데 옛날보다 못해요. 육이오전쟁 때 살기가 궁핍하여 동래군청에 가서 식량을 구걸했어. 그랬더니 국수를 한 차량 주데. 그걸로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때웠는데, 대중들이 설사를 하고 난리가 났어. 할 수 없이 옥수수를 얻어와 국수를 넣고 죽을 끊여서 먹었더니 설사가 가라앉데. 헐벗고 굶어가면서도 구도열은 뜨거웠고, 큰스님 모시고 열심히 정진했지.”

백운 스님은 범어사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대학에서 10년 넘게 강의했다. 한국불교사, 중국불교사, 인도불교사, 승만경, 법화경, 선문촬요 등 해서 경전과 참선까지 두루두루 다 가르쳤다. 요즈음도 신도들에게 <선문찰요>, <선관책진>, <금강경오가해>를 강설하신다. 17년간을 강주로 지내 온 스님은 강백답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출가자와 재가불자가 불교를 더 깊이 더 많이 알게 될 때 한국불교가 날로 발전해갈 것이라는 것이 스님의 일관된 생각이다.

“요즈음 경을 읽기보다는 선이 수승하다고 해서 전부 그쪽으로 흐르는데 선교쌍수(禪敎雙修)를 이루어야해. 선에 관한 수행력이 있어야 경전을 해석하고 선문의 글을 이해할 수 있어. 백양사에서 경전 공부를 하고 범어사로 가서 동산 스님께 선 강의를 들었어요. 동산스님은 선교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에 선문(禪文) 새기는데 참으로 명쾌했지.”

스님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면서 한 번 새겨보란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이나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더라.(靜坐處茶半香初)
미묘이 작용할 때 물 흐르고 꽃은 피더라.(妙用時水流花開)

“추사선생의 글인데 선방에 걸려있으면 더 좋은 글이지. 물 흐르고 꽃 피는 것이 바로 묘용인 것이라, 달리 특별한 것 찾지 마라는 것이지.”

방안에서 차 향기도 음미하고 스님의 재미난 이야기도 듣고 있는 사이 시간은 살같이 지나갔다. 바깥의 비바람은 더욱 거세지는 듯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린다. ‘올라오면 내려가기 싫어진다’는 스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백운 스님 약력

전남 영암 백련사에서 출가. 1952년 범어사에 와서 동산 스님을 모셨다. 범어사, 통도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영동 중화사, 김해 장유암 주지역임. 1971~1987년 17년간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강주를 지냄. 지금은 금정산 미륵사 회주이다.
저서로는 <양치는 성자> <백파 선사>, <진묵대사>, <성월 대선사>, <부설거사>, <만암문집>, <인곡문집> 등 다수 있다.
문윤정 논설위원(수필가) | un82@buddhapia.com
2009-03-16 오전 11:10:00
 
한마디
푸하하 허허허// 출가해서 대처하는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장황하게 떠드시요? 원효, 만해, 구마라습등등은 반푼이라오. 출가자로서 양심있으면 어떻게 마누라끼고서 스님소리를 듣소? 뗏끼 이사람아. 부처님법에 출가자가 어디 대처를 하고 지랄인데? 당장 승복벗어, 응?
(2009-03-20 오후 11:34:49)
90
허허허 역사왜곡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현대 한국불교사는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어요.특히 쪼개종이 주장하는 소위 불교정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2009-03-20 오후 1:17:41)
94
허허허 초대 대통령 이승만 집사에게 불교 내부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단초를 하동산이 제공했다고? 어불성설! 이승만은 이미 미국에서 한반도 기독교화를 약속하고 온 사람이지요.불교 지식인 승려, 곧 대처승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기독교를 뿌리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집사가 정교분리의 헌법에도 분명히 위반되는 위헌적 발언을 통해 소위 대처-비구 불교 내부 전쟁을 유도하였고, 불교 스스로 자멸하도록 만들었지요.이것이 이른바 쪼개종에서 주장하는 정화의 실체입니다.
(2009-03-20 오후 1:15:04)
78
허허허 당시 불교인은 지식인 대처승 8천5백명, 무식 비구승 5백이었어요.숫적 열세에 놓인 독신 비구승 대표들이 종로깡패들을 불러들임으로써 90년대까지 쪼개종 깡패 투쟁승들이 종단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지요. 대처-비구 싸움을 유도하여 한반도에 불교를 탄탄히 심어왔던 김법린 백성욱 조지훈 등 이른바 지식인 대처승들이 인적 청산을 당하였지요.그리고 쪼개종의 끊없는 불교 승려들 싸움에 식상한 국민들이 기독교에 눈을 돌림으로써 오늘의 기독교 부흥이 도래했었던 것이지요...그러니까 이승만과 소위 정화운동을 일으킨 쪼개종의 원조들은 불교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망하게 만들었지요.만약 대처승이 중이 아니라면 원효,만해,구마라습,지겸 등 이른바 고대 대처승들도 중이 아니라 할거요?뭘 제대로 알고 말씀하세요.
(2009-03-20 오후 1: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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