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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황으로 살기 팍팍해진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처럼,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실개천이 보인다. 바람만 불어도 먼지가 이는 모양새는 외경(外境)에 끄달려 탐ㆍ진ㆍ치 삼독(三毒)을 일으키는 중생심과 같다. 때마침 불어 닥친 황사에 더해 시야를 짙게 가리는 흙먼지가 우리네 업장이요, 중생의 무명인가. 서해고속도로를 달려 신작로를 지나니 ‘금오산 향천사’를 알리는 초석이 보인다. 주위로 수목에 둘러 싸인 길은 뽀얗고 말갛다. 아기자기 모인 마을을 지나 절에 오르는 좁은 길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한다. 쾌청하기 이를 데 없다.
백제 의자왕 무렵, 일본 백제사에 머물던 의각 스님은 중국에 건너가 옥으로는 3053불상과 16나한 존상을, 향나무로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상을 조성했다. 3년 만에 불사를 마친 스님은 부처님을 돌배에 모시고 오산현 북포해안(現 예산읍 창소리)에 도달했다.
절터를 찾아 1개월 여 배에서 기도했던 의각 스님 앞에 하루는 금까마귀 한 쌍이 날아왔다. 스님이 금까마귀를 따라가니 한참을 날던 금까마귀가 날개 짓을 쉬고 물을 마쳤다. 스님이 다가서자 금까마귀는 자취를 감췄고, 이내 향냄새가 가득했다. 금까마귀가 머물던 곳에 절을 지은 스님은 산이름을 금오산(金烏山), 절 이름을 향천사(香泉寺)라 지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향천사를 찾아 법정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차나 한잔 하고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한달음에 바삐 달려온 속내를 스님은 아시는 걸까? 찻잔에 차를 더하는 스님에 질세라 객도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말없이 입술을 적신다. 한 잔 다시 또 한 잔. 찻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기만을 반복할 뿐 고요하다. ‘이 순간, (차 마시는 본분을 잊고) 먼저 말문을 열면 본분사(本分事)를 잊은 철부지가 되지나 않을까?’ 고민하던 객이 먼저 말문을 연다. “스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법정 스님은 “허~ 차나 하고 하자니까. 급해? 한잔 더 할까?”라며 말을 막는다. “네. 스님. 한잔 더 주십시오.” 또 다시 두어 잔 더 마시고 나니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를 알똥말똥 하다.
때가 됐나보다. 법정 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허~. 어떤 말을 듣겠다는 건지. 나는 이야기도 잘 못해. 물어봐. 묻는 말에 대답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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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침묵을 깬 스님의 말씀은 “물어라. 답해주겠다.” 묻지 않는 자는 답을 구할 수 없듯이, 발심을 해야 수행을 하고, 수행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큰 의심이 있어야 화두를 깨듯 스님의 말씀도 그러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자력(自力)인 까닭이다. ‘잠시나마 차 마신 공덕(?)으로 공짜법문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객이 뜨끔했다.
객이 하나둘 질문을 던지자 법정 스님의 법문보따리도 풀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15세에 출가했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절에 가서 생활하면 좋겠다”던 부모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덕숭산 정혜사서 출가한 스님은 인천 용화사 창건 당시부터 전강 스님에게 선을 배웠다.
“지금까지 이만큼 사는 것이 전강 스님 모시고 공부한 덕분 같아. 공부할 때 야무지게 했지. 그때는 많이 자야 오전 12~3시까지 3시간씩만 자고 살았어. 묵언ㆍ탄성ㆍ활안 스님 모시고 공부했는데, 중노릇한 보람은 그 때가 최고였어.”
법정 스님이 화두 외에 평생 마음에 담은 법구는 “부처님 간 곳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 말소리 나는 곳일세.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欲識佛去處 只這語聲是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다. 부대사(傅大士, 497~569)가 쓴 선시의 일부를 인용했던 전강 스님의 가르침에 법정 스님은 쉼 없이 스스로를 경책하며 초발심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다.
“전강 스님에게 처음 무(無)자 화두를 받았어. 판치생모(板齒生毛, 판때기 이빨에서 털이 난다) 하라는데, 의심이 안났지. 간화선은 의심이 생명인데 의심이 안나니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몇 년을 꾹 참고 버텼어. 앉아 있느라 용쓰며 용맹정진 했지.”
당시 용화사에서는 전강 스님이 지대방 문을 열고 너머에 앉아계시고, 열댓 스님들이 마주보며 12시간씩 정진했다. 대중들이 졸면 전강 스님이 소리를 질렀는데, 항상 “법정이 저 놈 잠만 자는 것 봐라” 하며 호통 쳤다.
“졸지도 않는데, 매번 전강 스님이 나만 나무라는 게 억울해서 짐을 몇 번이나 꾸렸는지 몰라. 그때 송담 스님이 ‘법정 자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제일 막내라 그런 것이니 서운해 하지 말게나’ 라고 붙잡아서 꾸렸던 짐을 여러 번 다시 풀었지.”
법정 스님은 화두도 안들리는데 화두 드는 연습(?)만 하며 세월을 보냈다. 3년쯤 지났을까?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에 둥근 달이 맑게 보였어. 어찌나 개운하고 또렷하던지. 그 달은 가슴에 담고 해제 후 동화사로 갔지. 효봉 스님이 조실로 계실 때였어. 동화사에서 가서는 화두를 바꿔봤어. 무자 화두에서 이뭣고(是甚?)로 내 마음대로 바꿨어. ‘이 몸뚱이가 송장인데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이냐’ 하고 찾으니 얼마나 잘 되는지 몰라. 한번 화두를 들면 30분, 1시간은 훌쩍 가버리더라고.”
그 후 법정 스님은 공부에 더욱 재미를 붙여 용맹정진을 이어갔다. 1주일 용맹정진 하던 중 4일째 되던 날, 안개가 걷히는 듯한 것을 느꼈던 스님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됐다.
“어릴 적 서당에서 보던 책들이며 모든 것이 한눈에 다 꿰지더라고. 1700공안이 모두 타파가 됐어. 대중과 말할 때는 상대방이 무슨 말 할지 미리 알아서 서너 마디는 미리 준비하고 말하게 됐지. 모든 것을 알고 환하게 보게 되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어.”
하지만 법정 스님의 신통은 그걸로 끝났다. “당장 뛰어가 조실스님과 법거량을 해야 하는데, 2~3일 남은 정진기간 꽉 채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 앉아서 화두를 붙잡아야 하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화두는 어디 가고, 엄한 것만 맞춰보고 정신 쏟다보니 다시 안개가 끼듯 하더라고. 결국은 조실스님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루묵이 돼버렸지.”
전강 스님 이후로도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 구산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두루 모셨던 스님은 큰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자신의 경험 탓에 스승의 역할을 강조했다.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맞닥뜨리는 경계에서 스승의 역할은 중요해.”
이어 법정 스님은 후학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공부 해보니 정말 되더라고. 그 맛은 해본 사람이 아니면 몰라. 그때의 환희심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유할 수가 없어. 지금은 도루묵이 됐어도 그 경험 덕에 내게는 신념이 생겼어. 스님이라면 적어도 한번 죽자사자 용을 써서 이런 경험을 해봐야 타락하지 않아.”
법정 스님은 근기에 맞는 수행을 강조했다.
“참선을 하려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제대로 아는 자라야 해. 아니면 주력을 해야지. 경전을 읽거나.”
법정 스님은 스님들에게는 선방에 가기 전 기도정진할 것을 권한다. “참선이 어려운 신도에게 ‘불보살님, 신장님 누구든 당신 한 몸 구제해줄 만한 힘은 가진 분들이니, 무조건 열심히만 하라’고 말하지.”
수행자로 살아온 스님은 “참선 공부는 풍선 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풍선을 입에 물고 있어봐야 소용없어. 풍선에 바람을 넣으려면 입에 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람을 넣는 것이 더 중요하지. 참선도 바람을 불어넣는 정신이 있어야 공부를 이룰 수 있어. 정성을 다해서 바람을 불다보면 풍선이 빵빵해지다 터지지. 풍선을 부풀리는 방법을 알아야 해.”
“풍선은 왜 부풀릴까? 터뜨리려고?” 순간 객이 망상을 피운다. 법정 스님은 어찌 알았는지 딱 잘라 말한다. “참선의 최종목적은 견성성불이야.”
스님은 참선을 주로 해온 까닭에 대구 동화사 등 강원도 여러 곳 다녔지만 경전에 대한 집착은 없다. “경전은 공부를 하다 답답하거나, 선지식을 찾아가기 어려울 때만 짬짬이 참고했어.”
“부처님을 비롯해 예수ㆍ공자 등 모두 사는 길을 알려줬어. 스님은 부처님 흉내를 잘 내고, 재가자는 재가자다운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해. 우리가 산다는 것이 평생 남 하는 일 따라하는 것 아니야? 옛조상들이 하던 것을 몇 겁 두고 반복할 뿐이야. 한발 더 나가 불교는 이 윤회를 벗어나 생사초월을 한다는 것이 다르지만.”
스님은 “사람 몸 받기 힘들다(人身難得). 윤회고를 벗어나려면 야무지게 공부해 생사를 타파해야 한다”며 선수행을 강조했다.
“생사초월까지 언급 않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수단으로는 참선만한 것이 없어. 하지만 참선은 나를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지. 모두를 위해서 하는 것이야.”
법정 스님은 “참선은 너와 나의 분별을 떠나, 산하대지 삼라만상 등 일체와 합일하는 것으로 인연법을 알아야 자비심도 나온다”며 “참선은 나로 인해 모든 이가 있는 연기(緣起)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객이 못미더웠을까? 스님의 세심한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것은 부동(不動)인데, 내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할 수도 존재 안할 수도 있어. 나무에도 풀에도 ‘나’라는 존재는 마음먹기에 따라 어디든 존재할 수 있지. 모든 것이 상의상관한 관계라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해.”
법정 스님은 “인연은 때 되면 꽃이 피듯,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하지 않고 스스로 되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길 중에는 부처의 길, 중생의 길이 있어. 순간 발 들이는 것에 따라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가지. 이 순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도 달렸어. 이 순간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실천하며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지.”
스님은 “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한 강력범죄가 잇따르는 등 세상이 험악해진 것은 노력해서 얻기보다 쉽게 얻으려는 데서 악행이 늘었기 때문”이라며, 인내와 화합을 강조했다.
“현재 정국이 어수선한 것도 화합하지 못해서야.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지. 상대를 이해하면 아상(我相)은 저절로 사라지고 자기희생의 자비심이 저절로 생겨.”
화합을 중요시한 법정 스님은 대중 공의에 의한 사찰 운영을 위해 수덕사 주지 시절, 종무소에 총무, 교무, 재무의 3직에 포교, 호법, 사회, 문화를 더해 7직을 뒀다.
수좌인 법정 스님의 인연처답게 향천사에는 천불선원(千佛禪院)이 있다. 규모도 작고 사중살림이 어려운 탓에 이번 동안거에는 일곱 분 스님만이 안거를 지냈다. 수덕사 주지 시절 ‘화합’과 ‘자율’을 강조했던 법정 스님의 리더십은 천불선원 운영에서도 드러난다.
“선원 대중스님들에게 입승스님 위주로 자율정진을 하자고 했지. 천불선원은 최소한의 수행만 강제고 나머지는 자유야. 용맹정진도 없어.”
환희심을 위해, 수행의 맛을 보기 위해 용맹정진 하라던 스님이 정작 천불선원 운영에는 왜 이리 여유로울까?
“공부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해야 진짜 공부야. 바보도 하루 종일 바보는 아니잖아? 잠깐 제 정신 들었을 때 그때 열심히 하면 돼. 시간 많이 짜서 앉아있게만 한다고 공부가 돼나? 10시간 앉아있어 봐야 풍선 입에 물고만 있는 것과 같아. 참선 하려면 1시간이라도 눈을 부릅뜨고 용을 쓰고 화두에 매달려야 진척이 있어. 그게 바로 입에 문 풍선을 빵빵하게 부는 거야.”
법정 스님이 다시 차를 권했다. 스님과 차를 마신 객의 배도 부푼 풍선이 됐다.
#법정 스님은 1944년 서산 출생. 수덕사에서 1959년 원담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3년 수덕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고, 이듬해 범어사승가대학을 수료했다. 인천 용화사 안거를 시작으로 제방선원에서 16하안거를 성만했다. 광천 영봉암 주지 등을 거쳐 2003~2007년 예산 수덕사 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현재 예산 향천사에 주석하고 있다.